<-- 141 회: 6권 - 6장. 줄리아의 협박 -->
“흐음, 엘레네라…….”
“전 아직 레베카가 좋지만, 엘레네 역시 좋은 이름인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우리 딸의 이름을 하사하시다니 정말 영광이에요. 두고두고 자랑거리가 될 거예요. 감사해요, 카록 도련님!”
“예, 뭐…….”
예상 밖이었다. 아버지와 아서 형님, 레이라 형수 세 사람 모두 엘레네라는 이름에 만족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릭 국왕이 친히 이름을 하사했으니 가문의 영광인 셈이었다.
불만을 느낀 사람은 결국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 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제길! 왜 엘리스가 아닌 거야! 내가 추신까지 덧붙여서 눈치를 줬는데도! 이 눈치 없는 국왕 같으니!”
“이놈! 폐하께 무슨 불경한 말투냐?!”
아버지의 호령.
“어쩐지, 카록 네가 웬일로 이런 기특한 생각을 하나 싶었더니 그런 꿍꿍이가 있었구나. 쯧쯧, 정말 카록스럽구나.”
혀를 차는 아서 형님.
“카록 도련님 실망이에요. 결과적으로는 감사하게 됐지만요.”
레이라까지.
세 사람의 눈총을 트리플로 받은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터덜터덜 밖으로 나섰다.
아, 우울해. 마침내 인생 처음으로 아버지를 패배시켜서 뿌듯했던 마음이 싹 가라앉는다.
에릭 국왕 이 녀석,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내가 얼마나 속 좁고 뒤끝 있는 녀석인지 언젠가는 알게 될 거다.
나는 정령술 수련이나 계속 하기로 했다.
모래 골렘은 성공적이었다. 아버지와의 테스트 대련을 통해서 나는 오러 마스터라 할지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운디네와 샐러맨더도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다면, 물 골렘과 불 골렘까지 만들 수 있다. 모래 골렘, 물 골렘, 불 골렘이 동시에 적을 공격하는 광경이라니!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세 가지 골렘은 저마다 장점이 있었다.
모래 골렘은 물리적인 파괴력을 내는 데 유리하며 때때로 오러에 공격당해도 버텨낼 정도로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물 골렘은 날카로운 칼날로 절삭하는 데에 유리하다. 다이아몬드를 깎을 때도 물을 이용하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불 골렘은 살상력이 뛰어나다. 모든 생명체는 불에 타면 죽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세 가지 골렘을 조종하게 되면 그 누구와 싸워도 승산이 있는 것이다.
뭐, 사실 땅속 깊숙이에 숨은 채 골렘들을 조종해 싸우는 것 자체가 반칙이나 다름없지. 오러 마스터가 삽질의 마스터는 아니니까 말이야.
삽질 마스터는 우리 노움이지. 아하하.
그래서 나는 수련의 방향을 새로이 정했다. 바로 운디네와 감각을 공유하는 수련이었다.
그런데 내가 깜빡한 것이 있었다.
이곳에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줄리아, 시스, 한센 등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서 재회의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정령술 수련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잔뜩 화가 난 줄리아가 한밤중에 우리 저택을 방문했을 때였다.
“정말 너무해요! 제가 보고 싶지도 않았던 거예요? 돌아왔으면 냉큼 집에나 올 것이지!”
“그, 그게 말이야…… 먼저 아버님과 형님께 인사를 드려야 해서…….”
“무슨 놈의 인사가 한 달 가까이 걸려요?!”
“미, 미안.”
“아무튼 내가 미쳐! 무슨 상단의 단주라는 분이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혼트 제국에 수출할 식량 및 생필품이 2만 레디나어치나 창고에 쌓여 있는데 그냥 묵혀둘 생각이에요?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 타결됐으면 신속하게 수출해서 판매처를 선점해야 하잖아요! 게다가 카록 카탈로그 건이나 인력 충원 건까지 쌓인 일이 한두 가지가……!”
오랜만이구나.
줄리아의 불만 공세. 나는 한 시간 가까이 줄리아의 불만 토로에 시달려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드디어 끝났구나.
줄리아가 분노를 모두 털어놓았을 때, 나는 심적으로 지친 나머지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지금 당장 집으로 가요. 그리고 내일부터 출근해서 일하세요.”
“얘야, 제발 나 좀 쉬게 놔두면 안 되겠니? 이 단주님은 얼마 전에 무지막지 중요한 협상을 타결시키고 돌아왔어요. 정치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하니? 난 완전히 녹초가 됐단 말이에요. 응?”
“그럼 상단 업무는 어쩌고요?”
“그건 지금껏 그래왔듯이 너희가 알아서…….”
순간 줄리아의 눈빛에서 파이어 볼이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요?!”
“그, 그래도 일하는 즐거움, 성취감이라는 원동력이 있잖니.”
“그러니까 단주님이야말로 그 일하는 즐거움과 성취감을 원동력 삼아서 분발하시는 게 어때요?”
“얘야, 제발…….”
나는 거의 애걸하듯이 줄리아에게 매달렸다.
줄리아는 그런 날 흘깃 보더니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알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단주님의 일을 줄일 수 있는 대책을 찾았어요.”
“정말?”
“예. 유란 상단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음? 여러 번 들어본 것 같은데.”
내 상인 인생이 벌써 76년째였다. 이 대륙에 상단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서 상인으로 살다 보면 금방 서로 알게 된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유란 상단은 꽤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상단주 유란은 나보다 서너 살쯤 나이가 많은데, 위험한 동네로 소문난 혼트 제국에 일찍부터 진출해서 돈을 꽤 만졌던 걸로 기억한다.
“레던 왕국과 혼트 제국을 오가며 교역을 하던 꽤 경험 있는 상단이에요. 유란이라는 상단주가 각국의 거래처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는 꽤 수완가였던 모양이에요.”
순간 나는 뭔가가 떠올라 손가락을 딱 튕겼다.
“맞춰볼게. 유목 민족에게 물건을 다 털리고 파산 위기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줄리아의 눈이 동그래진다.
놀란 그녀의 표정이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헉, 내가 미쳤나.
“협상 때 육제후가 유목민족들에게 뒷돈을 줘서 분탕질 좀 치라고 종용했거든. 그 탓에 유목민족들이 닥치는 대로 약탈을 자행했고, 아마 그때 운 나쁘게 당했나 보군.”
“그랬군요! 네, 아무튼 유목민족들한테 물건을 싹 털려서 직원들과 목숨만 겨우 건져서 돌아왔대요. 덕분에 거래는 파기당하고 위약금까지 물어줘야 할 지경에 이르렀죠.”
“거기에 물건을 확보하느라 빛까지 졌을 테니 완벽한 파산이로군.”
아아. 미래가 또 바뀌었구나.
그 건실하던 유란 상단이 바덴 강 협상에 얽힌 정치 게임의 희생양이 되어버렸어.
이거 미안해지는데.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였다.
유란 상단을 인수하고 상단주 유란에게 혼트 제국 방면의 수출 업무를 전담시키면 나는 상단 업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투입하고 나는 뒤로 빠져서 놀자는 경영철학이 완성되는 것이다!
“빚이 얼마래?”
“6천 레디나요.”
“어이쿠. 크게 놀다가 다쳤네.”
나는 잠시 계산을 해보았다.
6천 레디나를 갚아주고 유란 상단을 인수해 혼트 제국 방면의 거래를 맡긴다.
혼트 제국에 수출하기 위해 미리 선점해둔 식량 및 생필품의 물량만 2만 레디나였다.
바덴 강 통행세가 대폭 낮아져서 수출에 유리해졌고, 혼트 제국은 워낙 험한 동네라서 유통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팔면 다섯 배 높은 가격에 판매할 수 있다.
거기서 얻는 이익만 따져도 6천 레디나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좋아. 한 번 상단주 유란을 만나볼게.”
“그렇지 않아도 요 근방에 있어요. 제가 몇 번 접촉해서 상단 인수 의사가 있다고 했거든요.”
빛을 진 채 파산한 상인의 미래는 죽음뿐이었다. 빚을 갚지 못하면 얼마나 무서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빚을 받지 못한 빚쟁이는 악마로 돌변한다. 전 재산 압류는 당연한 수순이고, 가족까지 전부 노예로 팔아버릴 정도이다.
차라리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할 정도이고, 실제로 훗날 자살자가 가장 많은 직업이 상인이라는 슬픈 통계가 발표된다.
상단주 유란은 그런 처지에 있다가 상단을 인수해주겠다는 사람을 발견한 셈이었다.
아마 죽다 살아난 심정이겠지. 내가 상단을 인수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터였다.
나는 좋은 정보를 전해준 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땡큐, 줄리아.”
“정말, 제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무서운 소리 좀 하지 말아줄래? 네가 없으면 난 끝장이라고.”
“후후훗.”
줄리아는 왠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팔짱을 껴왔다.
얘가 또 시작이네. 요즘 부쩍 나에게 애교를 떤단 말이야. 조금 부담스럽긴 했지만, 팔에 닿는 가슴의 감촉이 좋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시스가 반겼다.
시스는 간식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쿠키를 먹고 있다가 날 발견하자 눈을 크게 떴다.
벌떡 일어난 시스는 나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힘차게 내 품에 뛰어들었다.
퍼억!
“크헉! 그, 그래. 반가워, 시스.”
아버지의 몸통 박치기에 당한 듯했지만 나는 꾹 참고 시스를 안아주었다.
줄리아는 질투 어린 눈길로 시스를 쏘아보았다.
“앗? 그러고 보니 저는 아직 재회한 기쁨의 포옹을 하지 않았네요. 다음은 제 차례에요. 시스, 어서 비켜!”
시스를 억지로 떼어낸 줄리아는 내 품에 휙 뛰어들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상황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