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회: 6권 - 5장. 모래 골렘 -->
다음날 쿤트 일가의 아침 식탁은 조금 냉랭했다.
“애니.”
“레베카.”
“마리아.”
“어, 음. 엘리스.”
우리 네 사람은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녀들이 식탁에 음식을 쌓아놓기 시작했다.
최근 우리 가문의 식단은 남자 셋이 먹던 예전과 비교해서 무척 풍성해졌다.
재정적으로 풍족해진 덕분이 첫째이고, 둘째는 임신한 레이라의 건강을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군량으로 쓰이는 말린 육포와 푸아그라의 맛의 차이를 못 느끼시는 아버지의 앞에 약한 불에 적당히 익힌 송아지 스테이크를 놨겠는가?
“……밥 먹자.”
아버지는 화목한 분위기는 체념했는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제야 식사를 하는 가족들.
잠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깨작깨작 식사를 하는데, 문득 레이라가 무언가에 놀란 듯 포크를 떨어뜨렸다.
“어머!”
“무슨 일이냐?!”
“왜 그러시오, 여보?!”
“무슨 일 있습니까, 형수님?”
쿤트 가문의 세 남자(물론 나를 포함)가 벌떡 일어났다.
우리의 한결 같은 반응에 레이라는 입을 가리고 푸훗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잠깐 놀란 것뿐이니 염려 마시고 다들 앉으세요.”
“흠흠, 그러마.”
“알겠소.”
“괜찮으시다면야 뭐…….”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의아해서 레이라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엇에 놀라셨죠, 형수님?”
레이라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우리 마리아가 발로 찼거든요. 어서 나오고 싶어서 칭얼대는 것 같아요. 호호호.”
“오오, 내 손녀 애니가 말이냐?”
“레베카가 말이오? 나도 한 번 들어봅시다.”
나 원, 저 양반들도 참…….
……엘리스가 좋다니까 그러네.
“노움.”
-응!
노움은 내 머리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나는 노움을 머리에 앉힌 채 감각을 공유했다.
노움의 감각에 접속하자 레이라의 뱃속에 있는 엘리스(나도 나름 주관이 뚜렷하다)가 보였다.
아침부터 아이의 컨디션이 좋은 모양인지 웅크린 채 조금씩 손발을 움직이는 게 보였다.
“오, 정말 어제 보다 활발해 보이네요. 기분 좋은 모양인가 봅니다.”
아서 형님은 놀라 날 바라봤다.
“넌 보이느냐? 아차, 정령사였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령사가 부러워지는군.”
아버지도 날 부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나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건강해보이네요. 우리 엘리스…….”
“애니다.”
“레베카다.”
“마리아라니까요.”
세 사람이 거의 동시에 쏘아붙였다.
네, 죄송합니다. 이제 지겨우니까 그만 합시다. 예?
***
나에게 내 키가 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대답할 것이다.
178cm. 그러나 노움에게 내 키가 몇이냐고 묻는다면 노움은 큼직한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기운차게 대답하겠지.
-179.3423cm!
“어휴, 우리 노움 천재야.”
-헤헤, 나 천재야.
나는 노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운디네도 쓰다듬어달라며 머리를 내밀었고, 나는 웃으며 운디네도 쓰다듬어주었다.
이것이 바로 정령의 감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나에게 오른손으로 깃펜으로 서류에 사인하면서 동시에 왼손으로는 책을 펼쳐서 읽으라고 한다면 나는 못한다. 글쎄. 죽어라 연습을 한다면 가능하게 되는 날이 올 지도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기 쉽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내 귀여운 정령들은 한 번에 서너 가지 일을 하라고 시켜도 능히 해낼 것이다. 집중력을 분산할 수 있는 능력. 아니, 애당초 그런 거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정령의 또 다른 능력이다.
상급 정령술은 바로 정령사로 하여금 정령의 그런 능력을 공유할 수 있게 해준다.
노움과 감각을 공유하면 나는 두 눈의 초점과 상관없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키가 179.3423cm라는 것도 알 수 있고, 노움을 소환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
그 결과, 마치 노움이 아니라 내가 정령술을 펼치는 것 같은 느낌을 얻는다.
생각과 감각을 공유한다는 건 노움과 내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상급 정령술의 진정한 위력은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아직 상급 정령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브리튼 공작과 싸웠을 때, 중급 정령사였던 시절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했다.
이젠 그 강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투방식을 찾고자 한다.
화두는 ‘칼로 물 베기’다.
나는 노움과 감각을 공유한 후 땅속에서 모래를 끌어올렸다. 마른 모래가 하늘로 솟구쳤다.
이윽고 모래는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체격이나 이목구비나 나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이걸 모래 골렘이라고 칭할 생각이다.
내가 손을 뻗는다고 생각하자 모래 골렘이 오른손을 뻗었다. 걸음을 옮기는 생각을 하자 모래 골렘이 능숙하게 걷기 시작했다.
나까지 덩달아 걸음을 옮길 뻔했던 것이 약간 문제였지만 곧 익숙해질 것 같았다.
좋아.
두 개의 몸을 가진 기분이다.
이거 참 재미있는데? 나는 모래 골렘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는 생각을 보냈다.
모래 골렘은 이윽고 뛰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서 발소리도 없고 가벼웠다.
음. 나랑 비슷한 속도로 달리는군.
좀 더 빨리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적어도 뮤트 공작과 할슈타인 백작보다 빨라야 하니까 말이다.
생각을 보내자 모래 골렘은 놀라운 속도로 달렸다.
파앗!
한 발 내딛자 무려 5미터씩 껑충껑충 뛰었다.
순식간에 100미터를 주파한 뒤 되돌아와 내 앞에 섰다.
좋아.
그 할슈타인 백작보다도 빠른 속도였다.
나는 계속 모래 골렘을 조종했다.
조종은 어렵지 않았다. 내 몸이라고 생각하고 컨트롤하면 되니까.
하급 정령사였을 때 어스 핸드를 내 손처럼 생각하고 조종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완전히 다르다.
하급 정령사였을 땐 내 손동작을 보고 노움이 어스 핸드를 움직여주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래 골렘은 내가 컨트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더욱 정교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정령친화력이 넘치기 때문에 더욱 단단하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빨리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아버지의 오러를 맞아도 견디게 만들 수 있고, 강철도 박살낼 만한 펀치도 날릴 수 있다.
상급 정령사가 되었기에 가능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낸 모래 골렘의 진가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좋아, 뛰자!”
나는 기세 좋게 소리치고 모래 골렘에게 있는 힘껏 점프를 하게 했다.
파아앗!
무려 20여 미터 높이까지 점프한 모래 골렘.
더, 더, 더! 모래 골렘은 계속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정령친화력으로 움직이므로 어스 핸드와 마찬가지로 마음대로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이다.
모래 골렘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높이까지 솟구쳤다.
“이제 추락.”
모래 골렘은 땅을 향해 수직 낙하했다. 이윽고,
쿠우우웅!
굉음과 함께 모래 골렘이 추락한 자리가 움푹 파였다. 모래 골렘은 아예 형체도 없이 무수히 많은 모래알로 흩어졌다. 하지만!
촤라라락! 휘리릭!
모래가 다시 뭉쳐져서 순식간에 다시 원래의 모래 골렘으로 돌아왔다.
바로 이거다.
오러 블레이드에 베이면 그냥 몸을 통과하게 놔두면 된다. 강력한 충격에 형체가 일그러져도 순식간에 원상복귀가 된다. 형체가 자유로운 모래 아닌가!
나의 상대는 마치 칼로 물을 베는 듯한 기분으로 모래 골렘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어젯밤에 아버지에게 들었던 의견도 가미시켰다.
공격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하고 기괴하게 해야 한다.
모래 골렘이 펀치를 날렸다. 가슴과 옆구리에서도 팔이 튀어나와 펀치를 날렸다.
발차기를 하자 발이 세 개로 갈라져서 머리, 옆구리, 정강이를 동시에 걷어찼다.
입을 쩌억 벌리자 칼처럼 날카로운 혓바닥이 적을 꿰뚫는다.
그뿐인가?
왼팔은 5미터짜리 기다란 칼로 변해서 마구 베었다.
오러만 한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웬만한 건 전부 벨 수 있다.
“또 뭐가 있을까나?”
나는 신바람이 났다.
기상천외한 공격 기술을 생각해내는 일은 일종의 체스 게임과도 같았다.
“그래. 하나를 조종할 수 있으면, 두 갠들 못하겠어?”
나는 모래 골렘을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모래 골렘이 꿈틀거리더니 두 개로 갈라졌다. 이윽고 나와 똑같은 형상을 지닌 모래 골렘이 둘로 변했다.
이것도 재미있는 방법인 것 같다. 싸우다 말고 모래 골렘이 둘이 되면 상대도 황당하겠지? 으흐흐!
모래 골렘 두 개를 컨트롤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노움의 감각을 빌린 상태여서 무리 없이 조종이 가능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이제 테스트를 해봐야겠지?
이 근방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에게 테스트 대련을 부탁해야겠군.
오러 마스터는 아니더라도 이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강자면 충분하겠지?
손녀딸의 이름을 기어코 ‘애니’라고 지으려 하는 어떤 난폭한 중년 기사 말이야.
***
“……그래서 나와 대련을 하겠다고?”
“네.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싫다.”
아버지 고집은 쇠심줄이었다.
하여간 이놈의 집안 혈통, 고집 안 센 인간이 없어요. 나를 포함해서.
“그러지 마시고 이 귀여운 막둥이 아들의 부탁이잖습니까?”
“안 귀엽다.”
이런 식으로는 안 되겠어. 좀 더 잘 구슬려봐야지.
“아버님, 진지하게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발견한 전투 방식은 오러 마스터를 이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 끝에 탄생시킨 것입니다.”
“고작 반나절쯤 생각해서 떠올리지 않았느냐. 각고의 노력은 무슨.”
“……아무튼! 이 기회에 아버님께서도 스스로의 경지를 측정해보실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런가?”
내 말에 아버지는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