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회: 6권 - 4장. 귀가 -->
“시야?”
“예. 싸움 전체의 흐름을 보고 그것을 조율해나가는 폭넓은 시야가 뮤트 공작 전하께는 있었습니다. 상대의 다음 동작을 파악하는데 끝나는 게 아니라,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도 예측할 수 있는 시야입니다.”
“과연……. 수많은 경험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로군.”
“아마 그렇겠지요.”
“카록. 방금 그 대결은 한 번 더, 아니 한 세 번쯤 더 보여줄 수 있겠느냐?”
“물론이죠.”
“좋아!”
벌떡 일어난 아버지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잘 들어라! 지금부터 내 아들 카록이 방금 그 대결을 세 번 더 반복해서 보여줄 것이다. 두 위대한 기사가 보여준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외워라! 분명 우리 모두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공부가 될 것이다. 전부 외우기 전에는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옛!”
“그럼 다시 부탁한다, 카록.”
“예, 아버님.”
그로부터 나는 세 번이 아니라,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대결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와 기사들은 그것을 외워서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둘씩 짝지어서 그 대결을 따라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과연, 좋은 훈련이었다.
오러 마스터들의 동작은 하나하나가 그 상황에 있어서 최상의 움직임! 그 동작을 따라할 수만 있어도 크게 실력이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오러 마스터들을 흉내 냄으로서 그들이 대결 중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유추해내려 하셨다.
그들을 이해하다보면 아버지 자신 역시도 마스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기사들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훈련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오늘 참 정령술을 보람 있게 사용한 것 같다.
아참.
그러고 보니 아직 아버지께 아서 형님의 자식이 딸이라는 말을 아직 안 했네.
뭐,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 가르쳐드리면 한참 좋은 수련 분위기가 깨질 게 분명하니까.
결국 그날 나는 하루 종일 기사들의 훈련을 도와야 했다. 수시로 대결을 재현해주고, 그것을 따라하는 기사들의 동작을 일일이 지적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아예 수련장 테두리 쪽에 절반 정도 크기로 뮤트 공작과 할슈타인 백작의 대결을 표현한 석상들을 수십 개나 만들어놓았다.
기사들은 그것을 확인하며 따라하는 연습을 했다.
“저 대결을 빠르게, 완전히 똑같이 따라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라!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너희의 몸에 배이게 해라. 마스터들의 싸움은 그것 자체가 훌륭한 견본이다!”
아버지는 기사들에게 호령하고는 자신 역시 뮤트 공작의 동작을 따라했다.
해가 지고서도 훈련은 계속됐고, 결국 램프를 잔뜩 밝혀놓고 자정이 넘고 나서야 끝났다.
“모두들 수고했다. 훈련은 내일 또 이어진다!”
“수고하셨습니다!”
기사들은 기진맥진하여서 갑옷과 무기를 벗고 터덜터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내가 운디네를 시켜서 깨끗이 씻겨주고 피로도 풀어주었기 때문에 멀쩡히 걸어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힘든 훈련이었다.
리처드는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말을 건넸다.
“사기 당한 기분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힘겨울 거라는 말씀은 없었잖습니까.”
“하하핫. 다 네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쳇. 부인할 수 없군요. 아무튼 힘들어서 여자는커녕 술 한 잔도 못할 지경입니다.”
역사에 남을 훌륭한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인 리처드 벅은 가볍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나에게 말했다.
“카록. 당분간은 이 저택에서 지내면서 나의 수련을 도와다오.”
“예, 아버님.”
나는 아버지와 함께 저택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걸으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과연 오러 마스터들의 대결을 다르더구나. 그 검술의 정교함과 절묘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였나요?”
“그래. 그런데 너는 브리튼 공작과 싸워서 무승부를 이뤘다니, 네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상상할 수 없구나.”
“아닙니다, 아버님. 실제로 싸웠다면 제 패배였을 겁니다. 뮤트 공작 전하와 할슈타인 백작의 싸움을 보고서 브리튼 공작이 제 실력을 다 발휘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정말 대단하죠. 노움을 시켜서 아무리 단단한 벽을 만들어도 오러 블레이드는 막을 수 없거든요. 그저 피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죠.”
“위력만 따진다면야 오러 블레이드가 벨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우리들 무인의 입장에서는 네 정령술도 무섭다.”
“그런가요?”
“당연하지 않으냐. 무인끼리 싸우면 인체(人體)와 무(武)라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하다못해 마법 역시 일정한 법칙에 의해 마나를 운용하고 주문을 외어서 마법을 발현하지. 그런데 네 정령술은 아무 규칙도 없이 변화무쌍하다. 일전에 나에게 물 채찍과 불 채찍을 휘둘렀었지? 그때 이 애비는 사실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그래요?”
“그래. 오히려 물이나 흙으로 창을 여러 개 만들어서 쏘는 것은 쉬웠지. 물론 위협적인 공격이긴 해도 일직선으로 날아오니까 방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채찍질은…… 한 번 휘둘렀는데 채찍이 제 멋대로 변화하며 공격을 하지 않으냐. 무인이 정말 무서워하는 공격은 그런 것이다. 만약에 채찍 하나를 휘둘렀는데 채찍이 두 개 세 개로 갈라져서 공격하든가 하는 공격을 펼쳤더라면 더욱 고생했겠지.”
“아! 그럼 앞으로는 마구 갈라지는 채찍질 공격을 해야겠네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네 발상의 전환이다. 넌 이미 내 석상도 만들고 오늘은 두 마스터의 대결까지 진흙인형으로 보여주는 등 기상천외한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으냐. 좀 더 그 엉뚱한 발상을 전투 방면에서도 발휘해보면 어떻겠느냐.”
음, 그렇군.
하기야, 내가 싸움을 싫어하는 통에 정령술을 전투에 응용하는 법을 연마하지 않았지.
이번 기회에 오러 마스터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로 수련을 해두는 게 좋겠어.
운디네와 샐러맨더와도 감각을 연결하는 연습도 해야 하고.
에릭 국왕으로부터 휴식 기간을 받았을 때 연마해둬야지. 나중에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정령술에 신경 쓸 여력도 없을 테니까.
“조언 감사합니다, 아버님. 열심히 연습해서 아버님을 꺾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불효막심한 녀석이! 말했지만, 난 이제 네 녀석이랑은 싸우지 않을 것이다!”
발끈하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낄낄 웃었다.
그런데 문득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레베카요.”
“저는 마리아가 좋아요.”
“내 어머님의 이름을 따서 레베카가 딱 좋지 않소?”
“전 어릴 때부터 제 딸이 태어나면 마리아라고 지을 거라고 생각했었단 말이에요.”
아서 형님과 레이라가 투덕투덕 다투고 있었다. 하하하. 딸의 이름을 놓고 다투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흥미가 생겨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아버지가 말했다.
“아직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름을 놓고 다투는 게냐?”
아서 형님과 레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직 모르십니까, 아버님?”
“딸이에요, 아버님. 카록 도련님이 확인해 주셨는걸요.”
“뭐, 뭐라고?!”
경악한 아버지는 홱 나를 노려봤다.
“이 녀석아! 왜 진작 얘기해주지 않은 거냐?!”
“에…… 그야 수련에 방해될 까봐 말씀드리지 않고 있었죠.”
“당연하지! 내 손녀가 중요하지 그깟 검이 중요하겠느냐?”
그깟 검이라니?
댁은 오러 마스터가 될 때까지 죽어라 수련해야 한다고!
아버지는 무지무지 행복해서 승천할 것 같은 얼굴로 레이라의 불룩한 배를 쳐다봤다.
“오오, 우리 귀여운 손녀 애니. 어서 태어나려무나. 이 할아버지가 사랑을 듬뿍듬뿍 주마. 으하핫! 할아버지라!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은 호칭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애니?”
“아, 아버님…….”
“아버님, 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레이라와 아서 형님이 망치로 머릴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싱글벙글하며 말했다.
“소싯적에 네 어미 레베카가 널 임신했을 때, 난 꼬박 석 달을 졸라서 딸이면 애니라고 이름 짓기로 결정했었지. 결국 딸이 아니라 네가 태어났지만 말이다. 그러니 손녀의 이름은 애니가 당연하지 않으냐.”
오오. 형님의 이마에 힘줄이 솟은 모습은 참 오랜만에 본다. 아서 형님은 분노를 참고 있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예. 제가 여자였더라면 애니가 될 뻔했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시간을 한 30년쯤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안타깝게도 이 아이는 제 딸이므로 이름은 레베카입니다.”
“친애하는 나의 아들아. 이럴 때는 우리 쿤트 가문의 최고 어른이자 가주의 주장을 따르는 법이란다. 난 그저 우리 손녀 애니가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태어나길 바랄 뿐이지.”
“영지 업무 좀 보시고서 가주 소릴 하시지요? 일을 전부 제게 떠넘기시더니 이럴 때만 가주입니까?”
“아서야. 설마 30년 만에 처음으로 나에게 반항을 하는 게냐? 뒤늦게 찾아온 질풍노도의 시기는 아니겠지? 아니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된 제 어미 레베카를 다시 찾는 걸 보니 아직 덜 성숙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두 부자가 으르렁거리며 서로를 노려본다.
“안 돼요! 제 뱃속에 있으니까 제 애에요. 내 딸은 마리아로 지을 거예요!”
심지어 형수까지 이리 주장하니, 실로 뱃속의 아이가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르는 상황.
“새아가야. 착한 며느리인 줄 알았는데 네게 이런 반항적인 면이 있는 줄은 몰랐구나.”
“아버님! 제가 제 친구들을 소개시켜드리겠다고 했지요? 새 장가 드실 수 있도록 주선해드릴 테니, 따님을 낳으시거든 그때 애니라고 이름을 지으세요. 제 딸 마리아를 애니라고 부르시는 일은 그만두시고요.”
“여보, 하늘이 두 쪽 나도 우리 딸은 레베카요.”
나는 기가 막혀서 그 상황을 가만 지켜보다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이럴 땐 정신연령 94세인 내가 나서서 한 마디 해줘야지!
“그러지 마시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세 사람은 싸움을 중단하고 날 쳐다봤다.
난 웃으며 말했다.
“엘리스는 어떤가요? 전 그 이름이 좋은데.”
그리고 곧 나는 무서운 세 쌍의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엘리스가 어때서?
좋잖아! 마리아, 레베카, 애니보다 훨씬 낫네!
결국 싸움에 승자가 나타나지 않자, 아버지와 내가 먼저 탈락했다. 아서 형님 부부의 침실까지 쫓아가서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잠을 청하러 떠나면서도 ‘그래도 내 손녀는 애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그냥 새장가를 가시죠? 아직 팔팔하다 못해 날아다니시니, 제 동생들을 여럿 낳다 보면 그중에 딸도 있겠죠 뭐.
“괜찮을까요? 형님 부부, 밤새도록 싸울 모양인데.”
“놔둬라. 어차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아니냐.”
“아니던데…….”
“뭐라고?”
“아, 아닙니다.”
전생 시절, 레이라에게 한 번 이혼 당하고 망나니 아들까지 처가로 떠나보낸 슬픈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칼로 물 베기’란 표현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칼로 내 심장을, 아니 영혼까지 썩둑 베어갔단 말이다!
응? 가만…….
칼로 물 베기라고?!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버님! 칼로 물 베기입니다!”
“무슨 소릴 하느냐?”
아버지는 드디어 미쳤냐는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난 흥분에 차 소리쳤다.
“오러 마스터를 상대로 싸우는 요령 말입니다! 오러 블레이드로 물을 벨 수는 없잖습니까!”
내 말에 아버지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이런 게 기발한 발상이라는 것이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내일부터 당장 수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