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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34화 (134/529)

<-- 134 회: 6권 - 3장. 타결 -->

에반 테일러.

상당히 아까운 인물이다.

이 자가 얼마나 똑똑한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않은가. 내 부하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폐하께서 당신을 자작이라고 부르더군요.”

에반이 문득 말을 걸었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직 공표하지 않았지만, 혼트 제국을 이번 협상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한 공로로 자작으로 승작했소.”

“장차 듀론 후작 각하의 후계자로 지목될 것이니 미래가 탄탄대로이겠군요.”

“뭐, 그럴 지도 모르지. 그러는 그쪽은 전망이 어두운 것 같소.”

에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뭘, 모른 척을. 제이슨 란즈헬은 댁을 별로 신임할 것 같지 않은데.”

“대체 어디까지 아는 겁니까?”

“글쎄. 란즈헬 백작의 살날이 머지않았다는 것, 후계자는 아무리 봐도 제이슨 란즈헬이라는 점. 그리고 제이슨 란즈헬은 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뭐, 그 정도?”

“……역시 당신을 죽여야 했습니다.”

에반의 살기 섞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단정 짓기는 아직 이르지 않소? 나로 인해 그대의 인생의 진짜 전성기가 펼쳐질 지도 모르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허, 똑똑한 사람이 모른 척은.”

에반은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지금 저를 스카우트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맞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들은 걸로 해야지. 오늘 내가 한 제안을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해두시오. 나중에 갈 곳이 없어지거든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는 것이 좋을 거요.”

이건 내 진심이라고?

당신이란 사람이 너무 아깝거든.

“…….”

그 뒤로 에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건물 뒤편의 후원은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갖가지 활엽수가 한가득 자라는 숲속의 한 가운데에 달빛이 쏟아지는 꽃 핀 들판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원형 테이블 하나와 의자 네 개가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주전자와 찻잔이 놓여 있고, 란즈헬 백작은 찻잔 중 하나를 들고 향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란즈헬 백작은 날 스윽 바라보더니 눈짓으로 앞자리를 가리켰다.

나는 말없이 앞자리에 앉았다. 함께 온 에반이 찻잔에 차를 따라서 나에게 주었다.

그도 나도 말이 없었다. 그냥 계속 차를 마시고 선명한 달빛을 감상할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란즈헬 백작과 대면한 것이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란즈헬 백작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카록 쿤트인가.”

“예, 백작 각하.”

“생각보다 평범한 인상이군.”

그야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댁처럼 척 봐도 비범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죄송하게 됐군요?

그렇다고 란즈헬 백작에게 쫄 건 없지.

나는 넉살 좋게 대꾸하기로 했다.

“역시 그렇지요?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비범하다는 소리는 들어 본적이 없다.

“본디 과감한 행동을 할 만한 타입이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만한 사건을 겪었나?”

그것 참 족집게 같은 양반이다. 요즘엔 똑똑한 인간들을 하도 많이 만나서 놀랍지도 않다.

예.

한 번 늙어 죽었다가 한창 젊을 때로 부활했답니다.

그래서 겁 대가리가 없죠.

간을 내 놓고 다니거든요.

“글쎄요. 정령술을 익히게 된 것이 전환점이라면 전환점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자네는 결과를 모르는 일을 벌일 성격이 아닌 것 같군. 그런데도 혼트 제국과 오리엔 왕국까지 끌어들여서 이번 바덴 강 통행세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면, 어떤 결말이 나올지도 예상했다는 뜻인가?”

바덴 강 문제가 거론되자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혼트 제국과 대립하는 틈을 타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카르스 황제가 정말로 카슈텔 성을 공략할 줄은 몰랐습니다.”

“카슈텔 성을 공략할 줄은 몰랐다?”

“예.”

“그럼 카슈텔 성을 왜 공략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고 있겠군?”

“카슈텔 성은 바덴 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잖습니까. 그걸 바덴 강 협상 문제에 모두의 시선이 가 있는 틈을 타 간단히 점령했으니 분명 10만 대군을 일으킨 보람이 있는, 남는 장사겠지요.”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그 이면에 카르스 황제가 노리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지.”

“네?”

의외의 말에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우리가 생각 못했던 게 더 있단 말인가?

란즈헬 백작은 그런 날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이래서 게임은 재미있어. 사람이 열 명이면 생각도 열 가지야. 내가 본 걸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할 때가 빈번하지. 사람은 완전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순간 나에게 완전해지라고 했던 뮤트 공작의 조언이 또다시 생각났다.

“바덴 강 통행세를 문제 삼아서 우릴 압박하는 자네의 계획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생각이 앞섰군.”

“제가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경청하겠습니다.”

“좋지.”

고개를 끄덕인 란즈헬 백작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카르스 황제가 카슈텔 성을 점령하는 강수를 두었지.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나는 유목민족들에게 접촉해서 혼트 제국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키도록 했지. 유목민족들의 발호로 보급로도 위험해졌겠지. 내가 그렇게 하도록 종용했으니까.”

그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 과연 카르스 황제는 내가 이런 식으로 공격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카르스 황제가 그 정도도 예상 못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데 왜 알면서도 미리 대비하지 않았던 것일까?

군사적 재능이 대단한 카르스 황제가 자신의 10만 대군의 보급로를 허술하게 관리했을 리 없을 텐데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맹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란즈헬 백작이 먼저 정답을 말했다.

“카르스 황제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

“옛?”

놀란 내게 란즈헬 백작이 설명했다.

“유목민족은 수십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서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혼트 제국의 골칫거리지. 하지만 혼트 제국의 강대한 군사력이라면 유목민족을 제압할 수 없는 것도 아니야. 다소 희생을 감수한다면 말이지.”

“…….”

“그런데 왜 지금껏 카르스 황제는 잠자코 유목민족들의 만행을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카슈텔 성을 단숨에 집어삼킨 그 날카로운 이빨을 감춘 채 말일세.”

그건 아마도 유목민족의 전쟁수행능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대륙 정복의 꿈을 위해서는 타고난 기마궁수병인 그들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을 적으로 돌려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놀라 말했다.

“명분을 기다리고 있었군요!”

란즈헬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간 마을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는 짓은 중범죄이긴 해도 유목민족들이 옛날부터 늘 해왔던 일이지. 그걸 빌미로 대대적인 토벌을 시도하면 모든 유목민족이 하나로 뭉쳐 대항하는 바람에 많은 희생을 감당해야 하지.”

“하지만 카슈텔 성에 주둔 중인 10만 대군의 보급로를 위협한 것은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중대한 반역죄로군요.”

“맞네. 일부 유목민족들의 반역행위로 바덴 강 유역의 정복을 포기하고 철군해야 했다고 공표하고, 그걸 이유로 들어 유목민족 정복에 나선다면 충분히 납득이 가지.”

그럼 유목민족들 중에서도 카르스 황제를 따르는 부족들이 대거 나타날 것이다.

황실의 통제를 받기는 싫어도 엄연히 자신들이 혼트 제국 사람이라는 의식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과거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과 함께 대륙을 질타했다는 자부심은 누구보다도 유목민족들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목민족 때문에 바덴 강 유역의 정복을 포기했다고 하면, 수많은 부족이 분노하여 카르스 황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 결과 카르스 황제는 골칫거리였던 몇몇 강성한 부족들을 대거 정복하고, 자신을 충실히 따르는 유목민족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카르스 혼트!

그 미치광이 황제는 내가 협상 테이블에 끌어들이려고 제안을 했을 때, 거기까지 계산을 끝내놓고서 제안을 받아들였단 말인가.

거의 본능적으로 정치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찬스라는 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카르스 황제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있는 란즈헬 백작까지!

하나 같이 나와는 인종 자체가 다른, 정치 게임을 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 아닌가.

앞으로도 그런 적들을 상대로 계속 싸워나가야 한다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르스 황제의 능력은 이미 전생 때 대륙의 절반을 삼켜버린 것으로 입증됐다.

그런 자와 맞서 싸워서 우리 가족과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니 암담해진다.

그냥…….

눈 딱 감고 지금 당장 그를 죽여 버릴까?

나의 상급 정령술이라면 할슈타인 백작의 눈을 속이고 암살을 시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단순하고 비열한 수단으로 국제정세를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하지만 카르스 황제는 인류 역사에 폭풍을 불고 온 인물이다.

그런 자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대륙이 흘릴 수많은 피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란즈헬 백작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그리고 있는 그림이 따로 있는 법이지. 카르스 황제가 대륙 정복의 그림을 그리고 있듯이, 자네 또한 나름대로의 그림이 있을 터. 한 번 듣고 싶군. 이번 바덴 강 협상이라는 그림을 그린 장본인으로서, 이 협상이 어떻게 타결되는지 그 결말을 나에게 보여주게.”

그 말에 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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