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회: 6권 - 3장. 타결 -->
날이 저물어서 첫날의 협상이 끝이 나자, 에릭 국왕은 정신적으로 몹시 지친 얼굴로 나왔다.
나와 루이가 그를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폐하.”
“협상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까 할슈타인 백작이 혼트 제국에서 급히 달려온 전령으로부터 무슨 소식을 듣고는 협상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에릭 국왕은 내 물음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전히 난항이다. 란즈헬 백작은 역시 만만하지 않더군. 그렇게 몰아세웠는데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니.”
그 말에 나는 의아해졌다.
“란즈헬 백작이 물러서지 않았단 말입니까? 이상하군요. 충분히 궁지에 몰렸으리라 생각되는데.”
이에 루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마 할슈타인 백작을 통해 들어왔던 소식은 혼트 제국 내부에서 유목민족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맞다.”
에릭 국왕은 루이가 그 사실을 알아맞히자 놀란 얼굴이 되었다.
“그렇구나!”
그제야 나는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바덴 강 협상이 시작되기에 앞두고 내가 혼트 제국과 오리엔 왕국을 끌어들이는 동안, 육제후라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저 볼프강 란즈헬 백작 아닌가.
란즈헬 백작은 가장 두려운 상대가 카르스 황제라는 것을 알고는 혼트 제국을 곤란하게 할 만한 카드를 준비했다.
그것이 바로 혼트 제국의 골칫거리인 유목민족과 몰래 결탁하는 것이다.
유목민족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대부분 탐욕스러우며, 돈 몇 푼을 위해 학살을 자행하는 사나운 자들이니 말이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시무시한 전투력까지 갖췄으니 돈 주고 살 수 있는 최고의 무기인 셈이다.
육제후와 결탁한 겁 없는 몇몇 부족이 카르스 황제가 없는 틈을 타서 마을 몇 개를 약탈하며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마도 현재 카슈텔 성에 주둔하고 있는 10만 대군의 보급로까지 습격해서 카르스 황제를 곤란하게 만들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내가 란즈헬 백작이라면 그걸 의뢰할 테니까.
보급에 차질이 생기면 10만 대군을 계속 카슈텔 성에 주둔시킬 수 없어진다.
카슈텔 성은 오직 방어용으로 허허벌판에 축조된 요새이기 때문에 현지보급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렸던 란즈헬 백작이 그걸로 숨통이 트였겠군요.”
“그대의 말대로다. 쉽게 승복할 것 같지가 않군. 며칠이 지나도 통행세는커녕 카슈텔 성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어.”
란즈헬 백작은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기를 할 테고, 무언가 흐름에 큰 변화가 없는 이상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계속될 것이다.
혼트 제국은 카슈텔 성을 점령했을 때 붙잡은 수많은 포로라는 협상 카드가 있고, 유목민족의 동란은 혼트 제국에 배치된 여러 군단으로 진압할 것이다.
하지만 반면에 육제후 측은 계속 다른 유목민 부족들과 접촉하여 금전적 지원을 대가로 혼란을 일으킬 것은 종용할 것이고, 넘치는 자금으로 용병을 잔뜩 고용하는 등 전쟁 준비를 할 것이다.
그렇게 손해를 감수하면서 서로 물어뜯는 제로섬 게임이 계속되면 좋을 게 없었다.
혼트 제국과 육제후가 소모전을 벌이면 우리 레던 왕실 측은 일면 유리할 것 같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양측의 대립을 방치하면 그것만으로도 육제후파와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돌이킬 수 없어진다.
에릭 국왕은 이 나라의 군주로서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
장차 카르스 황제가 대륙 정복에 나섰을 때, 그를 막으려면 모두를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란즈헬 백작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을까?
나는 란즈헬 백작을 떠올렸다.
그를 실제로 본 것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접 눈으로 본 란즈헬 백작은 생각보다 야위었고 안색도 창백했다. 다만 두 눈만은 더없이 차갑고 의지에 차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란즈헬 백작의 나이가 올해로 몇 살이지?
순간 전생에 란즈헬 백작이 병으로 사망했던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그가 몇 년에 사망했는지는 확실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았다.
나는 에릭 국왕에게 물었다.
“폐하. 혹시 란즈헬 백작의 안색이 어땠습니까? 전보다 건강이 나빠진 것 같거나 하는 인상은 없었습니까?”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봤던 2년 전과 비교해서 얼굴빛이 부쩍 안 좋아졌더군.”
“란즈헬 백작가의 인물들도 하나같이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는데 협상 때문만은 아닌 것 같군요.”
루이도 거들었다.
나는 확신이 들었다.
란즈헬 백작은 곧 죽는다.
아마 본인도 자신의 건강 상태를 알 테니 그걸 알 것이다.
힐링 포션을 복용했을 게 분명한데도 저렇게 얼굴빛이 안 좋은 걸 보면 중병에 걸렸을 터.
그럼 육제후의 구심점인 자신이 얼마 안 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과연 란즈헬 백작은 어떤 선택을 할까?
끝까지 왕실, 그리고 혼트 제국과 대립하는 길을 택할 것인가?
전생대로라면 그의 뒤는 장남인 제이슨 란즈헬이 이어 받는다.
그리고 장남 제이슨은 그 아버지 같은 육제후를 조율하는 리더로서의 자질이 없다.
그걸 아비인 란즈헬 백작이 모를 리 없겠지.
제이슨이 후계자가 된 이유는 순전히 외척 가문을 비롯해 가신 상당수가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니까.
내가 란즈헬 백작이라면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
나라면 자신의 사후, 육제후의 미래 전망이 그리 밝지 않은 상황에서 레던 왕실과 혼트 제국 양측 모두와 대립하고 있는 고립된 국면은 만들지 않을 것이다.
고립된 상황에서 두뇌이자 리더였던 란즈헬 백작이 죽어버리면 육제후는 지리멸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 끝에 에릭 국왕에게 말했다.
“아마도, 란즈헬 백작은 합의를 보려고 할 겁니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던 그 란즈헬 백작이?”
“예. 아마 곧 합의를 보기 위해 우리에게 접촉을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 말에 루이가 의견을 냈다.
“만약에 정말로 란즈헬 백작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저도 자작님의 의견대로 란즈헬 백작이 지금까지의 대립 노선을 깨고 왕실과 화해할 길을 제시할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아직 란즈헬 백작이 심각한 중병에 걸렸다고 확신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란즈헬 백작이 합의를 보기 위해 우리와 접촉을 시도한다면, 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석해도 된단 말이로군?”
“예.”
“흐음…….”
에릭 국왕은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밖에서 호위를 서고 있던 로열나이츠의 기사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폐하. 에반 테일러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에릭 국왕은 놀란 얼굴로 날 쳐다봤다.
“정말로 우리에게 먼저 접촉을 시도했군?”
루이는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자작님의 추측대로였습니다. 란즈헬 백작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나는 에릭 국왕을 쳐다봤다.
에릭 국왕은 기사에게 손짓했다.
“들라 해라.”
“예.”
이윽고 에반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란즈헬 백작이 뭐라고 하더냐?”
“백작 각하께서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대립을 종식하고 협상이 원만하게 타결되기를 원하십니다.”
“짐 또한 마찬가지다. 허나 그건 그대가 어떤 조건을 가져왔느냐에 달렸지.”
“그 조건을 조정하기 위하여, 백작 각하께서는 이 자리에 있는 한 사람과의 독대를 청하고 계십니다. 그는…….”
에반은 홱 고개를 돌려서 나를 응시했다.
“카록 쿤트 남작입니다.”
역시 내가 주도한 일이란 걸 란즈헬 백작은 아는 모양이군.
에릭 국왕은 날 보았다.
“다녀와라, 카록 쿤트 자작. 이번 일은 그대에게 달렸다.”
“예.”
“따라오시지요. 백작 각하께서는 후원에 계십니다.”
나는 에릭 국왕에게 인사를 하곤 에반을 따라 나섰다.
복도를 걷는 동안 에반과 나는 어색한 침묵을 지켰다.
그냥 느낌일 뿐이지만, 에반은 어딘지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였다.
눈빛은 침중하게 가라앉았으며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적의가 드러나 있었다.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에반이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혼란스러울 거다.
란즈헬 백작이 죽고 나면 자신의 위치 역시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니까.
전생 때, 에반 테일러는 제이슨 란즈헬이 가주가 되자마자 실각하여 란즈헬 백작가를 떠나야 했다.
란즈헬 백작가에서 퇴출당한 그는 더 이상 육제후의 진영에서는 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오리엔 왕국으로 떠났다.
왕실파도 육제후파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아까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