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회: 6권 - 2장. 협상 -->
연회가 끝난 다음날, 협상이 시작되었다.
에릭 국왕, 오리엔 국왕, 카르스 황제, 그리고 란즈헬 백작. 네 세력의 대표자들이 한 테이블에서 협상을 벌였다.
초반 양상은 카르스 황제와 란즈헬 백작의 정면 대립으로 시작되었다.
“협상에 임하기에 앞서 우선 우리는 혼트 제국이 멋대로 점령한 카슈텔 성의 반환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
카르스 황제는 별만 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 가운데, 란즈헬 백작은 계속 말했다.
“카슈텔 성을 공격한 것만으로도 사실은 충분히 전쟁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적국과의 협상은 터무니없는 소리이며 혼트 제국으로 향하는 상선이 바덴 강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통제할 계획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선 카르스 혼트 황제 폐하께서는 전쟁인지 카슈텔 성을 반환할 것인지 선택하십시오.”
카르스 황제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럼 카슈텔 성을 반환하시겠습니까?”
“반환도 없다.”
란즈헬 백작은 피식 웃었다.
“말씀의 앞뒤가 맞지 않군요. 혹시 저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가 어린아이입니까?”
“그대가 생각하는 어린아이의 기준 연령이 몇 살이냐에 따라 다르지.”
“묘하군요. 나이로 보면 어린아이가 아닌데, 제 기준에 억지를 부리는 사람은 분명 어린아이입니다.”
란즈헬 백작은 차분한 어투와 다르게 과감한 언사로 카르스 황제를 도발했다.
에릭 국왕과 오리엔 국왕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카르스 황제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카르스 황제는 도무지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그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그럼 난 어린아이가 아니로군. 나는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니까.”
“그럼 왜 카슈텔 성을 반환하지 못하십니까? 10만 대군을 일으켜 카슈텔 성을 선제공격해 점령해놓고는 돌려주기는 싫고 전쟁도 싫다는 것입니까?”
“그렇다.”
카르스 황제의 덤덤한 대꾸는 상대를 짜증나게 할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란즈헬 백작은 냉정을 유지하는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그것이 바로 억지가 아닌지요?”
“아니다.”
“협상에 진지하게 임하실 뜻이 있으시다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긴 세월 동안 혼트 제국은 너희들 육제후라 불리는 무리에 의해 큰 피해를 입었다. 바덴 강 유역을 점유한 너희는 국제관계를 생각지 않고 너희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통행세를 매년 인상했지. 덕분에 수입의존국인 자국은 물자 부족으로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살아야 했고, 지난 대흉년과 흑혈병 때 입었던 피해는 떠올리기도 싫을 지경이다. 그에 따른 응징으로서 군대를 일으켜 카슈텔 성을 점령한 것이다.”
카르스 황제는 덧붙여 말했다.
“말하자면 카슈텔 성 점령은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충고이자 교훈이며, 참고로 전쟁은 원치 않지만 굳이 두려워할 이유 또한 없다. 힘으로 되찾고 싶다면, 어디 한 번 시도해봐라.”
란즈헬 백작은 카르스 황제를 노려보았다.
“말씀을 듣자하니 요지는 바덴 강 통행세가 높아서 혼트 제국의 경제가 피폐해졌다는 뜻인데,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자국의 사정도 잘 파악하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그런 폐하를 위해 제가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드리지요.”
“말해봐라.”
“열 명의 상인이 바덴 강을 통과하여 혼트 제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만 무사히 장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다른 아홉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글쎄.”
“다섯 명은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세 명은 혼트 제국의 마을에 들렀다가 마을 주민의 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한 명은 혼트 제국의 영주에게 체포되어 짐을 모두 강탈당한 채 목숨만 부지하여 쫓겨났습니다.”
“다들 운이 안 좋았군.”
“이것이 귀국의 사정입니다. 그들 상인 열 사람 중에서 바덴 강의 통행세가 턱없이 높아서 장사에 실패한 사람이 있었는지요? 결국 귀국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내부 문제를 저희에게 탓하시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힘으로라도 되찾고 싶다면 시도해보라고 하셨습니까? 이미 힘으로라도 되찾을 준비를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시도될 때에는 양국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어질 것입니다.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카슈텔 성의 반환을 다시 한 번 고려해보심이 좋을 겁니다.”
란즈헬 백작의 맹렬한 공세는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이에 무표정으로 대응하는 카르스 황제 역시도 물러설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자국에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나 그것을 객관적 지표가 없는 이야기로 과대 포장하여 너희의 문제를 덮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자리는 바덴 강의 통행세 문제를 논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카르스 황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린델 백작가의 자식을 합쳐서 카슈텔 성 점령 때 붙잡은 포로가 3천 명 가량이다. 그들을 아직 살려두고 있는 것은 아직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전쟁을 원한다면, 나는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이 보여준 모범을 따를 테니까.”
란즈헬 백작의 굳은 안면이 꿈틀했다.
에릭 국왕 역시 당혹을 금치 못했는데, 눈에 띠는 것은 몹시 불편해 보이는 오리엔 국왕의 표정이었다.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
신기에 가까운 용병술로 무너져가는 혼트 왕국을 사상 최강의 국가로 만든 인물. 인류 역사상 가장 대륙 정복에 가까웠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당시 대제국이었던 오리엔은 그에게 연패를 거듭하며 급속도로 몰락, 항복하여 속국으로 전락하는 수모마저 겪었다.
그 수많은 업적 외에도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일화는 또 있었다.
베잘리우스 대공은 포로를 살려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전부 불태워 죽였다.
한 명도 남김없이.
그런 잔혹한 행위로서 악마적인 명성과 공포를 얻어냈고, 이는 언제나 그와 싸우는 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그 대가로 그는 남은 평생을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베잘리우스 대공의 업적에 매료된 혼트 제국의 과격주의자들은 종종 포로를 불태워죽이곤 했다.
하물며, 자신이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는 카르스 황제가 그러지 않을 턱이 없었던 것이다.
오리엔 국왕은 순간 카록 쿤트 남작을 만나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능력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카르스 황제는 애송이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가 스스로를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 말이 허언이 아니었군. 저 미치광이 같은 어린 황제가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직접 만나보니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하는군.’
한 톨의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인형 같은 무표정을 보니 더욱 위험해보였다.
‘혼트 제국의 동맹 제의를 거절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어. 저 자는 절대로 믿을 만한 군주가 아니다.’
오리엔 국왕은 협상이 계속 진행되기 위해서는 저 과열된 분위기를 전환할 계기가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오리엔 국왕은 에릭 국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쟁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사람은 란즈헬 백작이 아닌 것 같은데, 에릭 레던 국왕. 그대를 어찌 생각하오?”
모두의 시선이 에릭 국왕에게로 향했다.
에릭 국왕은 잠시 고민했다.
애당초 혼트 제국을 끌어들인 이유는 지금처럼 육제후를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는 레던 왕국의 국왕이기도 했다. 육제후가 엄연히 레던 왕국의 귀족인 이상 군주로서 그들의 편이 되어주어야 했다. 명분상 그래야 마땅한 것이었다.
에릭 국왕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레던 왕국의 국왕으로서 이번 혼트 제국의 군사행동은 묵과할 수 없소. 카슈텔 성 역시 린델 백작가에게 통치를 맡겨놓은 본 왕의 영토이며, 이미 그 전투로 사상자도 발생했으므로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요.”
긴장된 분위기가 협상 테이블에 흐르기 시작했다.
에릭 국왕은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본 왕은 혼트 제국이 카슈텔 성을 반환할 때까지, 레던 왕실군을 일제히 남하시켜 바덴 강 유역에 배치해 카슈텔 성에 주둔 중인 혼트 제국의 10만 대군에 맞설 것이오.”
란즈헬 백작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실군이 바덴 강 유역에 배치된다?
그걸 가장 싫어할 사람은 카르스 황제가 아니라 바로 육제후였다.
정치적으로 대립 중인 왕실군이 자신들의 영지에 물밀 듯이 들어오는 격인데 어느 영주인들 꺼리지 않겠는가?
명목상으로는 육제후의 편을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셈이었다.
궁지에 몰린 란즈헬 백작.
에릭 국왕은 그가 승복하고 양보를 하길 기대했다. 그리해야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였다.
너무나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똑똑똑.
누군가가 협상장의 문을 노크했다.
“카르스 혼트 황제 폐하.”
할슈타인 백작의 목소리였다. 카르스 황제는 모두에게 나직이 양해를 구했다.
“실례하지. 들어와라.”
이윽고 할슈타인 백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른 세 사람에게 가볍게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한 뒤, 카르스 황제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폐하께서 안 계시는 사이에 국내에서 유목민족 몇 부족이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마을 세 군데가 습격을 받아 초토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카슈텔 성에 머물고 있는 10만 군대의 보급로까지 유목민족의 출현하여 보급부대의 두 개 백인대가 전멸했습니다. 이대로는 보급에 차질이 생깁니다.”
“사자를 급파해라. 3,4군단은 유목민족의 약탈 활동을 저지, 5군단은 보급로를 사수.”
“옛.”
할슈타인 백작은 명령을 받자마다 밖으로 사라졌다.
“……공교로운 타이밍이군.”
카르스 황제는 란즈헬 백작을 응시했다.
란즈헬 백작은 차갑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