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회: 6권 - 2장. 협상 -->
연회는 과연 란즈헬 백작가라는 말이 나올 만했다.
카슈텔 성이 점령된 상황이라 유랑 곡예단이나 극단을 불러 공연을 할 정도로 흥겨운 연회는 없었다.
그러나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연회는 온갖 진귀한 음식과 포도주가 나왔다.
접시와 포크, 수저, 나이프는 모두 금제였다.
상상이 가는가? 부자는 금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더니 란즈헬 백작 이 작자는 아예 금으로 된 식기로 매일 식사를 하고 있었다.
란즈헬 백작가가 이 정도라면 육제후의 다른 다섯 가문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새삼 육제후가 얼마나 바덴 강 유역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예 작정을 한 듯, 바닥은 대륙 동부의 일부 지역에서만 생산된다는 귀한 양탄자가 깔렸고, 위층의 모든 창문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나 같이 우아하고 예술성이 높아 보였다.
“이럴 수가.”
에릭 국왕은 나직이 탄식하며 치를 떨었다.
원채 사치를 즐기는 체질도 아니지만, 부족한 왕실 재정 탓에 검소한 생활을 하는 에릭 국왕으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광경일 터였다.
“폐하, 감정을 다스리셔야 합니다. 분노는 협상에 임하기에는 좋은 감정이 아닙니다.”
루이가 다가와 속삭였다.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나도 에릭 국왕을 위로했다.
“어차피 이번 협상의 승자는 우리입니다. 란즈헬 백작도 결국은 통행세 인하에 응할 수밖에 없고, 다만 지금은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안간 힘을 쏟고 있을 뿐입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틀려질 것이니 절 믿으십시오.”
나는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지금 같은 때에 자신감이 무너지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그대는 정말 자신만만하구나.”
물론 내가 자신만만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육제후는 혼트 제국과 대립하면서 강한 심적 압박을 느끼고 있고 바덴 강 통행세는 어쩔 수 없이 일정 수준 이상 양보해야 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카르스 황제의 돌발적인 군사행동은 의외였지만 모두 예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니 불안할 이유가 없지요.”
“그럼 짐이 하나 묻겠다. 이번 협상의 결과로 대륙은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대륙의 경제는 이미 농경 중심에서 상공업 위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바덴 강 통행세 인하가 확정되면 그 흐름이 가속화될 겁니다.”
“상공업인가…….”
에릭 국왕이 생각에 잠긴 듯 한 표정이 되었지만,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예. 그리고 그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폐하께 기회가 생깁니다.”
“기회?”
“레던 왕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왕권을 거머쥘 기회가 말입니다. 바덴 강 협상, 그리고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 및 관세협상 등은 모두 그것을 겨냥한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이냐?”
“예. 두고 보십시오. 그 일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 폐하의 위상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제야 에릭 국왕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짐에게 그대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하루빨리 왕실로 와다오.”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협상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에릭 국왕은 육제후에 대한 분노를 잊고 싱글벙글한 채 연회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각국의 주요 인사를 만나 담소를 나누는 에릭 국왕을 지켜보고 있는데, 문득 루이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까 폐하께 드린 말씀 중에, 농경에서 상공업 중심으로 경제의 패러다임이 바뀔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응. 그랬지.”
“그런데 그게 어째서 왕권의 강화로 이어지게 될지 저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봉건제는 기존까지의 농경 중심의 경제에 초점이 맞춰진 제도야. 그래서 공을 세운 가신에게 땅을 하사한 것이고, 영주는 자신의 땅에 속한 농부가 소작한 곡물을 거둬들여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군자금을 마련하지.”
루이는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농경사회일 때 힘을 유지할 수 있는 봉건영주들이 상공업으로 경제 중심이 이동하면 힘을 잃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바덴 강의 통행세가 낮아진다고 그런 현상이 가속화된다고 하기에는 연결고리가 약한 것 같은데요.”
“그건 이번 협상이 어떻게 타결되는지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루이는 내 생각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바덴 강의 통행세는 육제후의 부의 원천이야. 통행세 인하 및 하향 동결이라니,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턱이 없지. 나라면 전쟁을 불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까지는 양보 못해.”
루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지금의 혼트 제국은 아직 대흉년과 흑혈병 여파로 인한 재정난으로 군수물자의 보급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고, 또한 유목민족 문제도 남아 있지요.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어느 정도 양보를 해줘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이번 통행세 인하를 요구하는 명분을 떠올려 봐.”
내 말에 루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퍼뜩 고개를 치켜들고 놀란 얼굴로 날 본다.
“대흉년과 흑혈병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진 삼국의 백성을 위하여 높은 물가를 조장하는 바덴 강의 통행세를 인하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렇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참 똑똑하단 말이야. ‘총독체제에 의한 레던 왕국 통치의 초안’을 저술한 루이 콘체른다워.
“식량 및 생필품에 한하여서 통행세를 인하 및 하향 동결한다는 조건을 걸겠군요! 그럼 사치품과 군수품에 대해서는 여전히 높은 통행세를 받아낼 수 있으니 육제후도 그 정도 선까지는 양보를 해줄 테고요.”
그렇다.
일전에 내가 혼트 제국에 수출하기 위해 줄리아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2만 레디나어치나 확보해두라고 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협상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날 본다.
“식량과 생필품에 대한 통행세가 낮아지니 물가도 싸지고 그만큼 평민층은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지겠군요.”
“반대로 육제후는 손해를 본 만큼 사치품과 군수품에 대해서 통행세를 더 높게 책정할 거야. 사치품 및 군수품의 주요 소비자인 귀족은 손해를 보게 된다는 뜻이지.”
“그만큼 평민층의 경제는 활성화되고 귀족층의 소비는 침체되겠군요.”
“바로 그거야. 경제가 활성화되면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농사만 짓는 평민은 줄어들 거야.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상업에 뛰어들고 잘 팔릴 만한 물건을 만들려할 테지. 상업과 가내수공업이 발달할수록 영주는 영지민을 통제하기 어려워진다는 뜻이야.”
“거기까지 바라보시고 이 일을 계획하신 겁니까?”
“응.”
“정말 대단하시군요.”
“하하, 별 말을.”
사실은 이미 그렇게 진행된 미래를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육제후를 쳐부수고 바덴 강 유역을 점령한 카르스 황제는 높은 통행세부터 폐지해버렸다.
또한 바덴 강 유역의 도시들을 자유상업지구로 지정했다.
그 결과 평민층이 자유상업지구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기회의 땅인 자유상업지구로 달려간 것이다.
영주들은 평민층의 이탈을 막기 위해 엄격한 억제책을 마련했지만 결국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억누르지 못했다.
그렇게 봉건영주들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반대로 황권은 나날이 강력해졌다.
카르스 황제의 대륙 정복 전쟁은 대륙의 절반은 장악하는 데에 그쳤다.
하지만 그 전쟁은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불러온 결과를 낳은 셈이 되었다.
본래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항상 전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90년이나 살면서 그러한 시대 흐름을 봤었기 때문에 나는 자신 있게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라는 대계를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 농경 경제에 의존하는 영주들은 살아남을 수 없게 된다.
영주도 직접 상업에 투자해야 하고 영지의 특산품을 개발하는 등 시대 흐름에 발맞추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철광석 광산을 매입하고 카록 병기점을 설립했을 때 우리 쿤트 가문을 합작투자로 끌어들인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농경 경제가 무너지더라도 쿤트 가문이 종속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미 우리 가문은 광산과 병기점으로 세금 징수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으니, 아서 형님도 뭔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을 것이다. 앞으로 계속 상업에 투자할 의향을 보일 것이다.
루이가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쿤트 남작, 아니 자작님께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이도 같고 출신도 비슷했기 때문에 언제든 제가 자작님을 앞지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음. 부인할 수가 없군.
아니, 오히려 그 루이 콘체른이 나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니 나로서는 영광이랄까?
“그런데 방금 자작님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껏 살면서 제가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한 오만한 마음이 많이 꺾였습니다. 제론 데커드 준남작님을 봤을 때도 그랬지만, 자작님은……. 예, 자작님이라면 차기 재상이 되신다 해도 성심껏 모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루이 콘체른…….”
“예. 자작님을 진심으로 제 상관으로 모시고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난 아직 차기 재상이 되겠다고 결정을 내리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이미 자작님은 누가 봐도 차기 재상입니다. 게다가…….”
루이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출세를 포기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자작님과 함께 일하면 자연히 제 출세도 빨라질 테고, 자작님의 성격으로 볼 때 재상이 되어도 일찍 은퇴할 것 같은데 그 후임 자리도 충분히 노려볼 만하지요. 그땐 제론 데커드 준남작님이 꽤 강적이긴 하지만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나도 피식 웃었다.
“아니, 만약 내가 재상이 된다면 그 후임은 분명히 너야. 왜냐면 제론 그 녀석은 나만큼이나 일할 의욕이 없거든. 억지로 붙잡아두지 않으면 언제든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서 야반도주할 인간이니 네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저 똑똑하고 출세욕도 충만한 루이 콘체른, 전생 때는 총독으로서 레던 왕국에 안정을 찾아놓은 업적을 세운 그가 나의 충실한 동료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믿음직스러운 일이었다.
나중에 루이를 후임으로 앉혀놓고 나는 물러나서 막후정치……를 가장한 은퇴생활을 즐기는 것도 생각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이렇게 똑똑하고 훌륭한 이들이 함께 하는 한, 이 나라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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