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회: 5권 - 8장. 협상 테이블에 모여드는 사람들 -->
병색이 완연한 창백한 낯빛.
아무 감정도 없어 보이는 인형 같은 무표정.
그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혼트 제국의 어린 황제, 카르스 혼트가 처음으로 외국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란즈헬 백작의 표정은 당혹스러웠다.
저 남자였나!
10만 대군을 동원해 대륙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자가.
그런 위험한 군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르스 황제는 중병을 앓고 있는 란즈헬 백작 자신보다 더 일찍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힐링 포션을 마신 덕분에 란즈헬 백작이 카르스 황제보다 안색이 좋았다.
란즈헬 백작은 다가가 카르스 황제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환영은 해드릴 수 없을 듯합니다.”
카슈텔 성을 예고 없이 점령해버린 적국의 황제에게 예를 갖추지 않겠다는 시위였다.
“기대하지 않았다.”
카르스 황제는 특유의 무표정을 지으며 감정 없이 대꾸했다. 그러자 대번에 양측 사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마치 치열한 전쟁 끝에 휴전 협상을 나온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란즈헬 백작은 문득 그림자처럼 카르스 황제를 따라다니는 중년의 검사를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이 남자가 그 할슈타인 백작입니까?”
“맞다.”
카르스 황제가 대꾸했다. 할슈타인 백작은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란즈헬 백작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혼트 황실이 지금껏 감춰온 오러 마스터.
얼마 전 10만 대군으로 카슈텔 성을 포위하고 일대일 대결을 요구해 기사 셋을 상처 하나 안 입고 사로잡아버린 인물. 상대 역시 상처 하나 없었던 점이 육제후 진영으로서는 더 치욕적이었다.
바로 그 남자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는데, 사람을 시켜 쉬실 곳을 안내해드리지요.”
란즈헬 백작은 그렇게 제안하며 좋지 않아 보이는 카르스 황제의 건강 상태를 건드렸다.
그러나 카르스 황제는 감정이란 게 아예 없는지, 아무 반응도 안 보인다.
“그대만 할까.”
흠칫.
도리어 란즈헬 백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짐도 힐링 포션을 많이 마셔봐서 척 보면 알지. 아무리 마셔도 정상인과는 조금 다르거든.”
“…….”
“안내하라.”
“그러지요.”
카르스 황제는 다시 할슈타인 백작과 함께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란즈헬 백작은 말에 올라 일행들과 함께 앞장서서 성 안으로 진입했다. 그 뒤를 혼트 제국 일행이 뒤따라 들어갔다.
카르스 황제 일행을 안내하면서 란즈헬 백작은 에반에게 손짓했다.
에반이 가까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황제를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느냐?”
그 물음에 에반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묘한 인물이었습니다. 말을 주고받으면서 얼굴 표정이 전혀 변하지 않는 걸 보니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상식적인 범주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인물 같습니다.”
“그렇군.”
란즈헬 백작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화를 나누는데 마치 바위와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오리엔 국왕과 에릭 국왕은?”
“오리엔 국왕 쪽은 조금 전에 우리 영지에 진입했다는 순찰대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에릭 국왕 쪽은 아직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에릭 국왕이 가장 늦게 오겠군.”
그들이 모두 들어가고 성문이 닫혔다.
* * *
아침이 되자 우리는 다시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운디네의 능력으로 피로는 없었지만, 이틀에 한 번 꼴로 잠을 자며 달린 탓에 정신적으로는 약간씩 지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중 누구도 피로를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빛은 다들 빛나고 있었다.
벌써 란즈헬 백작령에 진입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 광란의 질주가 끝이 나는 것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문득 서쪽 방면에서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이쪽으로 접근했다.
무장한 것으로 보아 란즈헬 백작가의 기병들로 보였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정지! 잠깐 멈춰주십시오!”
그러자 우리 쪽에서 랜달이 우렁차게 고함을 질렀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이신 에릭 레던 국왕 폐하께서 달리시니 막지 마라!”
그러자 기병대들 쪽에서 당황했다.
국왕이란 사람이 마차도 없이 말 타고 질주하며 나타났으니 황당할 것이다.
“확인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따라올 수 있으면 와서 직접 확인해라! 폐하께선 계속 달리고 싶어 하신다!”
결국 기병대는 허겁지겁 말에 채찍질을 가한 끝에 간신히 따라붙었다.
로열나이츠 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왕실의 문장을 확인하자 기병대는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예를 갖추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그러자 에릭 국왕이 말했다.
“괜찮다. 그보다 란즈헬 성은 어디에 있느냐?”
“이대로 20분 정도 더 달리시면 나타납니다!”
“알겠다. 이랴!”
“자, 잠시만! 폐하께서 오시면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먼저 가서 보고를 해야 맞이할 수 있는……!”
“환영 같은 건 필요 없으니 괜찮다.”
결국 우리는 란즈헬 성을 향해 질주하고, 가여운 기병대 역시 우리보다 빨리 가서 상부에 보고를 올리기 위해서 기를 쓰고 달리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마침내 란즈헬 성이 보였다.
바덴 강에 인접하여 성벽과 항구가 하나로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로 된 성채였다.
그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컸다.
“이야, 언제 봐도 참 크단 말이야.”
나 역시 전생 때는 자주 이용하던 곳이었지만, 하도 오랜만에 보니 또다시 감탄이 나왔다.
“저 만한 성채를 축조할 자금 여력이 충분할 테니까요.”
함께 달리던 루이가 대꾸했다.
과연 상인들 사이에서 ‘바덴 강의 강도들’이라 불리는 육제후가 다스리는 도시다웠다.
마침내 란즈헬 성의 성문에 도착했다.
“뭐, 뭐지?”
“잠깐 정지!”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놀라서 가로막았다. 검문 없이 성안에 사람을 들이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따라온 기병대가 다급히 소리쳤다.
“비켜! 국왕 폐하이시다!”
“폐, 폐하?”
그제야 병사들은 로열나이츠의 황금빛 갑옷을 알아보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일제히 엎드려 극상의 예를 갖추는 병사들.
에릭은 말 위에서 뒤돌아 우리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마음껏 기뻐해라! 우리는 열흘 만에 드디어 레던 왕성에서 이곳에 도달했다. 이 대륙에서 그 누가 우리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겠느냐?”
“우와아아!”
로열나이츠는 환호했다.
묵묵히 따라온 뮤트 공작은 그다지 감흥이 없는 눈치였고, 루이는 그저 피곤해 죽을 지경으로 보였다.
“열흘?”
“레던 왕성에서 열흘 만에 이곳에 와?”
“정말일까?”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이나 기병대나 황당해서 수군거렸다. 당연히 못 믿겠지.
중북부의 레던 왕성에서 남단에 위치한 이곳까지 열흘이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속도란 말인가?
나는 흥분해서 열광을 하는 로열나이츠를 빤히 보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루이에게 속삭였다.
“해놓고 보니까 좀 유치하긴 하다. 그치?”
“먼저 제안하셔놓고는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이십니까?”
루이는 질린 얼굴로 나를 질책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한 줄 아냐는 눈빛이었다.
* * *
란즈헬 백작가의 저택에는 이미 혼트 제국과 오리엔 왕국 측 인물들이 도착해 있었다.
“미리 나와 맞이하지 못한 점 용서하십시오.”
란즈헬 백작이 에릭 국왕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보였다.
“개의치 마시오. 짐이 빨리 달려오는 바람에 보고 받을 틈도 없었을 것이오. 아무튼 이번 사태는 함께 잘 조율해서 해결해봅시다.”
“노력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하는 사이, 란즈헬 백작의 뒤편에 서 있던 그의 심복 에반이 날 응시했다.
저 작자도 오랜만이군.
아마 저놈이겠지?
블루울프 용병단에게 사주해서 날 암살하게 한 녀석이. 그런 일은 저놈 전문이니까 아마 맞을 거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에반에게 웃어주었다.
선물 잘 받았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이젠 무서울 게 없는 몸이야.
그러나 나는 곧 이 말을 정정해야 했다.
내가 무서워하는 인간이 멀리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바로 카르스 황제였다!
“레던 국왕이오?”
카르스 황제는 에릭 국왕에게 말을 걸었다.
에릭 국왕은 카르스 황제의 심상치 않은 창백한 안색에 흠칫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대가 혼트 제국의 황제 되시겠구려.”
“맞소.”
“이야기는 많이 들었소.”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카르스 황제는 문득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씨익.
예의 그 일그러진 듯한 기괴한 웃음을 짓는 카르스 황제. 나, 날 보며 그렇게 웃지 마! 아는 체 하지 마!
갑자기 모두의 시선이 잠시 내게로 쏠렸다.
“오랜만이군. 카록 쿤트 남작.”
“예. 다시 뵙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지?”
“예?!”
기절할 듯이 놀란 나에게 카르스 황제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지었다.
“농담이다. 그 얼굴 표정은 들어보지 않아도 알겠군.”
“하, 하하.”
나는 놀라 얼어붙은 것 같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농담이라고? 그래, 농담이라니까 웃어야지.
내 저 정신병자를 다시 보게 되다니.
그런데 문득 란즈헬 백작은 뮤트 공작을 보곤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뮤트 공작 전하?”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뮤트 공작에게 모였다.
뮤트 공작.
레던 왕국 최고의 기사.
왕실파와 육제후파를 막론하고 누구나 존경해 마지않는 인물로, 그 이름은 에릭 국왕보다도 더 무겁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났으니 다들 주목하는 건 당연했다.
“반갑군.”
뮤트 공작은 나직이 말했다.
육제후의 두뇌라 불리며 왕국 최고의 권력을 가진 란즈헬 백작도 뮤트 공작 앞에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작위나 인망이나 뮤트 공작은 육제후파도 건드리지 않는 일종의 성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를 나는 협상장에 데려왔다.
존재감만으로도 육제후에게 부담감을 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지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전쟁이 나나 안 나나 확인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뮤트 공작의 시선이 문득 카르스 황제에게로 옮겨졌다. 카르스 황제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만일 전쟁이 난다면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인물도 여기에 있고 말이야.”
그 발언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카르스 황제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던 할슈타인 백작이 앞으로 나왔다.
“한 번 해보시지.”
할슈타인 백작은 뮤트 공작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두 강자가 서로를 향해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무서운 살기가 요동치듯이 터져 나와 주변 공기를 차갑게 냉각시켰다.
뛰어난 무인은 살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줄 안다.
하물며 오러 마스터의 살기는 그것만으로도 일반인쯤은 심장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얼마 전에 브리튼 공작이 패트릭을 향해 살기를 쏟아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두 오러 마스터의 살기가 충돌한 것이다.
다들 살기에 압도당해서 아무런 제지도 하지 못했다.
크윽, 이거 정말 큰일 나겠네.
노움!
나는 은밀히 노움을 소환했다.
물론 주요 인사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노움을 떡하니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노움을 땅속에 숨겨두었다.
노움과 감각을 공유했다. 그러자 무한히 자유로운 정령의 감각에 연결되면서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살기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만들 하시오!”
그때, 누군가가 겁 없이 두 오러 마스터 사이에 끼어들며 소리쳤다.
그제야 뮤트 공작도 할슈타인 백작도 살기를 거둬들였다.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내가 두 분의 상대가 되어드릴 수도 있소.”
두 사람에게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몇 되지 않는다.
그는 바로 조엘 브리튼 공작이었다. 삼국의 오러 마스터가 벌이는 대립각에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지켜봤다.
“크하핫! 공작도 그쯤 해두게.”
이 과장스럽게 호탕한 웃음소리.
어느새 다가온 오리엔 국왕이 브리튼 공작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폐하.”
뮤트 공작은 비로소 에릭 국왕에게 사죄하며 물러났다.
“감히 나섰습니다.”
할슈타인 백작도 카르스 황제의 뒤편으로 한 발짝 물러선다.
에릭 국왕, 카르스 황제, 오리엔 국왕.
세 군주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육제후의 대표인 란즈헬 백작은 방금 전의 소란 탓인지 식은땀을 닦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역시 뮤트 공작을 데려온 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대의 배우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침내 대륙의 판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협상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 *
카록 병기점.
늦은 밤에도 사무실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마법 램프를 켜놓은 채 서류를 뒤적거리던 줄리아는 창밖의 새카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유리창을 통해 자신의 얼굴이 비춰지는 걸 보았다.
아직은 주름살 하나 없이 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쉼 없이 흐른다.
“내 나이도 벌써 21살이야.”
카록에게 영입되고서 정신없이 일하고 나니, 어느 새 혼기도 한참이 지나 있었다.
상인으로서 부와 명예를 얻어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줄리아였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여잔데…….’ 하는 힘없는 넋두리를 하게 되었다.
어떤 여자가 피부 안 좋아지게 밤새워서 서류나 뒤적거리고 있단 말인가.
어떤 여자가 옷을 이틀째 입느냔 말이다!
이렇게 일에 치이며 살다가 노처녀로 썩는 게 아닐까 싶어서 가슴이 무거워졌다.
“하아…….”
저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
줄리아는 모종의 결심을 한 듯, 먹잇감을 포착한 독수리처럼 눈을 매섭게 번뜩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날 책임질 남자는 딱 한 명밖에 없어! 이게 다 누구 탓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