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회: 5권 - 7장. 협상개시 -->
나는 씨익 웃었다.
“간단합니다. 뮤트 공작 전하를 불러 함께 가시면 됩니다.”
바로 그거라는 듯이 다들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 * *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화창하던 활엽수들이 마른 낙엽을 힘없이 떨어뜨렸고, 가을꽃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 예정된 가을이 온 것이다.
한 중년 사내가 정원을 거닐며 낙엽이 흩날리는 차가운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온도조절마법이 인식되어 있어 사시사철 입는 붉은 코트. 적당한 키에 약간 마른 체구. 차가운 인상, 반백의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
세상은 그를 육제후의 두뇌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라 불렀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대략 2년쯤 전부터다. 그때부터 가을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기침이 많아지는 계절이 찾아오고 있음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겨울이 좋다.
혹한이 매섭게 몰아치며 너는 얼마 못 가 죽는다고 똑바로 말해주는 겨울이 좋다.
그저 의미심장하게 낙엽이나 흘리며 서글퍼하는 가을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을 뿐인데 무슨 감정이 더 필요하나.
많은 걸 누리며 살았고, 또한 많이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천국도 지옥도 필요 없다.
그냥 죽어 사라지겠다.
눈을 감는 순간 생전에 치열하게 고뇌하고 열정을 담았던 모든 걸 놓고, 완전히 소멸하고 싶다.
그리 될 것이다.
“쿨럭쿨럭.”
란즈헬 백작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멀찍이 떨어져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걱정스러운지 동요했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절대 방해 말라고 일러두었던 탓이다.
손수건에 약간 묻어 있는 피를 보곤 그는 차갑게 웃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신비하구나.
영원히 살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죽어간다고 신호를 보내온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란즈헬 백작은 손수건을 접어 품에 넣었다.
“백작 각하.”
‘란즈헬의 청소부’라 불리는 그의 심복 에반 테일러 남작이었다.
“말해라.”
“예. 육제후의 다른 다섯 가문 모두 란즈헬 백작 각하께 이번 협상의 교섭을 위임하셨습니다.”
“이견은 없었나.”
“예. 늘 그랬듯 만장일치로 백작 각하께 신뢰를 보였고, 다만…….”
“다만? 린델 백작이냐?”
에반은 섬뜩해졌다. 뭐든 다 알고 있는 듯한 그의 태도가 가끔씩 무서웠다.
“예. 카슈텔 성이 반환되고 포로가 석방될 때까지 타협하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조건이냐 충고냐.”
“그냥 충고입니다. 모든 건 백작 각하의 판단에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됐다. 카슈텔 성은 죽어도 못 돌려받아.”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에반도 동의했다.
혼트 제국은 레던 왕국을 상대로 언젠가는 군사 활동을 벌이겠다는 야욕이 너무나 뚜렷했다.
카슈텔 성은 바덴 강 유역을 공략할 교두보로 쓸 생각임이 확실했다.
‘너무 안일했다. 두 수 앞을 내다봤더라면 추측하기 힘들지 않았을 텐데.’
에반은 혼트 제국의 애송이 황제에게 속아 넘어간 게 너무나 분했다.
카슈텔 성 점령은 모두가 허를 찔린 기습이었다.
다들 10만 대군은 그냥 압박용 카드일 뿐인 줄 알았다.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만 막아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카록 쿤트가 오리엔 왕국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입수했을 때 내심 안도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카슈텔 성을 공격하다니.
그것도 지금껏 숨겨 왔던 새로운 오러 마스터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라는 희대의 이벤트에 정신 팔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뒤통수를 맞지 않았을 터였다.
“쿨럭!”
그때 란즈헬 백작이 또다시 기침했다.
“각하!”
에반은 화들짝 놀라 상념에서 벗어났다.
란즈헬 백작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가리며 한참을 기침했다.
가을이 싫은 건 에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주인인 란즈헬 백작이 심하게 기침을 하는 계절이 가을과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보이는군.”
란즈헬 백작이 나직이 말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
“나의 죽음.”
그 말에 에반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백작 각하, 바람이 많이 쌀쌀합니다.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시지요.”
란즈헬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방안에 들어가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그 앞에 앉아 있으면 안락하고 따스하겠지.”
“그렇습니다, 백작 각하.”
“하지만 그렇다고 겨울이 오지 않는 건 아니다.”
“…….”
“가을이 되고 겨울이 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변화를 늘 주시해야 해.”
“……옳으신 말씀입니다.”
“간밤에 유언장을 썼다.”
“예?”
에반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앞으로의 거취 문제도 달려 있는 일이었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계자는 제이슨밖에 없다. 둘째는 란즈헬 상단, 셋째와 넷째는 각각 얼마 전에 얻은 몰스 영지와 페트람 영지를 준다.”
‘역시…….’
에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이슨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에반의 속내를 아는지 란즈헬 백작은 계속 말했다.
“유언장에 제이슨에게 널 중용하라고 일러두었다. 넌 그동안 나를 잘 보좌해왔고, 누구보다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할 줄을 아니까.”
“가, 감사합니다.”
칭찬은 기뻤으나 에반의 얼굴을 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이슨이 내 말대로 널 중히 여길 것 같지는 않군.”
“그렇겠지요.”
“그래서 미리 일러둔 것이다. 앞으로의 네 일을 슬슬 생각해두라고 말이다.”
“그럼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건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변화의 분기점이 바로 이번 협상이다.”
란즈헬 백작은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에반이 그 뒤를 따랐고, 멀리 떨어진 기사들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쫓았다.
“살아 존재한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뜻이다. 매 순간순간 생각해서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해야 하지. 인간이든 짐승이든.”
그는 혼잣말처럼 계속 말했다.
“하지만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어느 상단의 직원, 어딘가의 대장장이, 영주의 지배를 받는 농노, 아비의 발자취나 쫓기 바쁜 귀족가문의 후계자. 수많은 인간이 그렇게 조직의 일부가 되거나 타인에게 정신을 지배 받으며 살고 싶어 하지. 그리고는 누구냐고 물어보면 자신의 직업이나 직장, 혹은 가문을 말한다. 스스로 존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인간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삶을 결정할 때 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내가 평생 육제후의 두뇌라 불리며 대표자 역할을 자처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에반은 그만 숙연해졌다.
저런 말을 하는 란즈헬 백작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정말로 그의 삶이 끝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 너 또한 스스로 살아 존재해라. 이것이 내가 네게 해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다.”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뜬금없이 왈칵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에반은 애써 참았다.
자신의 주군 란즈헬 백작과는 어떤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주인과 심복, 혹은 쓸모가 있기 때문에 곁에 두고 쓰는 그런 사이일 뿐.
그러니 눈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가자. 협상이 코앞이다.”
“예, 백작 각하!”
에반이 힘차게 대답했다.
란즈헬 백작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었다.
천국도 지옥도 필요 없다.
그냥 죽어 사라지겠다.
그러니 아직 존재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이 시간에 더욱 충실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