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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24화 (124/529)

<-- 124 회: 5권 - 7장. 협상개시 -->

그리고 요리가 시작되었다.

운디네는 죽은 새의 몸을 깨끗이 씻었다.

샐러맨더는 깃털을 모조리 태워버리고 적당한 세기의 불로 새를 구웠다.

나는 노움을 시켜서 거대한 어스 핸드 위에 동그란 식탁을 만들었다.

“컵도 만들어줄래?”

-응!

세 정령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귀여운 내 정령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가 바로 도자기 굽기 아닌가.

노움이 진흙으로 컵 모형을 빚고 샐러맨더가 불로 구워 컵을 완성했다. 그 컵에 운디네가 건강에 좋은 물을 가득 따라주었다.

그때, 마침 새 통구이가 완성되었다.

센스 좋은 운디네는 먹기 좋게 새 통구이를 물의 칼날로 토막을 내주었다.

나는 새 통구이를 맛있게 먹었다. 살이 부드럽게 씹히는 게 일품이었다.

소금 같은 조미료가 없어서 맛이 좀 텁텁하고 싱겁긴 했지만 충분히 먹을 만했다.

허허.

상급 정령사가 되니 이런 짓도 가능하구나.

나는 하늘을 날며 새 통구이를 요리해 먹는 대륙 최초의 사나이가 되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시스와 줄리아를 데리고 하늘(?)로 피크닉이나 가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생각해놓고 보니 끝내주는 아이디어였다. 줄리아가 꺅꺅대며 기뻐할 게 눈에 선했다.

줄리아를 떠올리니, 뜬금없이 얼마 전에 있었던 충격적인 키스가 떠올랐다.

[“어머, 단주님. 목이 마르신 것 같네요? 제가 먹여드릴게요. 직, 접.” ]

커헉!

나는 화들짝 놀라 회상에서 퍼뜩 깨어나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남의 입을 통해 물을 마신 건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이라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줄리아가 날 좋아하고 있지 아마?

처음 그 사실을 알아챘을 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본 줄리아는 그저 억척스럽고 불만도 무진장 많은 소녀일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만 보면 애교도 부리고 칭찬 받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늘 불만만 투덜투덜 늘어놓던 때를 떠올리면, 참 사람 마음은 알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줄리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시스는 내가 본 어떤 여자보다 아름다웠지만 묘한 정신세계를 가져서 속내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에 비해 줄리아는 딱 내게 맞는 여자일지도 몰랐다.

예쁘고 활발하다.

성격은 억척같아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때때로 나에게 애교를 부리는 귀여운 모습도 보인다.

전생 시절엔 황금의 여인이라 불렸을 정도이니 상재나 수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실제로 줄리아가 없으면 난 큰 곤란을 겪을 게 분명했다.

다 따지고 보니, 놀랍게도 줄리아는 딱 나의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헐…….

생각해 보니, 나는 여자에게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전생 때는 후디니 자작가와 연을 맺을 수 있다는 생각에 혹해서 결혼했다가 피를 봤다.

결혼 생활이 파탄 난 뒤로는 여자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사랑이 뭔지 나는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늘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싶었다.

“흐음. 그러고 보니 내 나이도 이제 곧 22세인데 슬슬 결혼을 해야겠지?”

아서 형님도 결혼해서 아이를 갖게 되었고, 릭 형님은 검에 미쳐서 앞으로도 결혼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순서로 따져보면 다음은 내 차례이지 싶었다.

아마 지금쯤 우리 쿤트 가문에 날 타깃으로 한 혼담도 여럿 들어왔을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아버지도 틀림없이 내 혼사 문제를 고려하고 있을 터였다.

정략혼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왕이면 내게 꼭 필요하고 또한 내가 원하는 여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되었다.

“끙, 근데 꼭 결혼을 해야 할까?”

사실 홀로 지내도 나쁠 것 없었다. 요 귀염둥이 정령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인생도 좋다.

오히려 가정을 꾸리면 처자식에게 얽매여야 하고 이것저것 트러블도 생길 테니 골치 꽤나 썩을 것이다.

“에잇! 모르겠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래도 줄리아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쿤트 영지로 돌아갈 때 선물이나 사가야겠다.

*   *   *

레던 왕성에 도착해서 왕궁에 입궁하자마자 에릭 국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에릭 국왕도 듀론 후작도 업무를 중단하고 나를 호출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내 인사에 에릭 국왕은 손을 휘휘 저었다.

“인사는 생략하고 어서 결과를 말해보라.”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었다.

“오리엔 왕실로부터 혼트 제국과 동맹을 맺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다행이군!”

에릭 국왕은 크게 안도한다.

듀론 후작이 나에게 말했다.

“자네가 오리엔 왕국에 다녀오는 동안 큰일이 벌어졌네.”

“큰일 말입니까?”

“그렇다네. 큰일이지. 혼트 제국의 10만 대군이 카슈텔 성을 함락시켜버렸다고 하니 큰일 아니겠는가.”

“옛?!”

나는 기겁을 했다.

카슈텔 성은 육제후의 일인인 린델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에 속한 성채였다.

바덴 강 유역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관문 같은 성격을 가진 요새가 점령당한 것이다.

혼트 제국에게!

당연하게도 카르스 황제의 지시를 받은 것이리라.

그 순간, 나는 각기 따로 놀던 퍼즐 조각이 모두 맞춰진 듯한 깨달음을 느꼈다.

그렇구나. 바로 이거였어!

카르스 황제가 진심으로 노리던 건 오리엔 왕국과의 동맹이 아니었다.

물론 동맹이 성사되면 좋겠지만 카르스 황제도 미끼삼아 던져보기만 했을 뿐 큰 기대를 안 했으리라. 즉, 우리 모두의 이목을 돌려놓는 눈속임인 셈이었다.

10만 대군을 일으킨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생각이 정리된 나는 듀론 후작에게 물었다.

“혹시 카슈텔 성은 큰 사상자 없이 빠르게 함락되지 않았습니까?”

“맞네. 10만 대군이 단숨에 포위했고, 자네가 일전에 말했던 할슈타인 백작이 출현하여 무위를 과시했네.”

“혼트 제국군이 사로잡은 포로의 숫자가 상당히 많겠군요?”

“물론일세. 전의를 잃은 카슈텔 성 수비군이 일찌감치 항복을 했으니까.”

“휴우, 다행입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다행이라니?”

듀론 후작이 재차 묻자 나는 대답했다.

“카르스 황제의 진짜 목적이 바로 그거였으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저는 또 무언가 아주 위험한 음모를 꾸몄을지 몰라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릅니다.”

“그럼 애당초 혼트 제국은 카슈텔 성을 점령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일으킨 겐가?”

“예. 유혈 없이 신속하게 점령하기 위해 10만 대군은 물론이고 할슈타인 백작까지 투입했지요. 제대로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는 건 피차 마찬가지니 카르스 황제도 큰 전쟁으로 이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사상자를 내지 않고 포로를 많이 잡은 겁니다.”

“하지만 카슈텔 성을 빼앗긴 육제후가 가만히 있겠는가?”

“그래서 최대한 사상자를 줄이고 포로를 최대한 많이 붙잡은 겁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육제후가 카슈텔 성 반환을 요구하면, 혼트 제국은 그 대신 포로를 조건 없이 풀어주겠다고 맞받아치겠지요. 혹시 붙잡힌 포로 중에 주요 인사는 없었는지요?”

“맞네. 카슈텔 성은 린델 백작의 셋째 아들 빅터 린델 남작이 지키고 있었지.”

“그걸 노렸을 겁니다. 협상 카드가 될 만한 포로를 말이죠.”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로서는 안 좋게 되지 않았나. 어쨌거나 육제후도 우리 왕국의 귀족이고, 카슈텔 성은 엄연히 레던 왕국의 영토인데 말일세.”

듀론 후작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닙니다만, 그리 나쁜 일도 아닙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카슈텔 성이 빼앗김으로서 바덴 강 유역이 혼트 제국의 공격권에 들어갔습니다. 육제후도 이제부터는 혼트 제국의 동향까지 걱정하게 되었지요. 바덴 강 유역의 안전을 위해서는 왕실의 힘이 필요하니, 지금까지보다는 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겁니다.”

“육제후와 혼트 제국 둘 다 걱정해야 하는 우리 왕실의 부담을 조금은 나눠 가진 셈이군?”

“예. 결국 이번 협상으로 육제후를 제외한 모두가 이익을 보게 된 셈입니다.”

“하하하핫!”

내 말이 끝났을 때, 에릭 국왕이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의아해하는 나에게 에릭 국왕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훌륭하다, 카록 쿤트 자작. 우리가 머리를 맞댄 끝에 내린 결론과 똑같은 의견을 도출했구나!”

“예?”

순간 나는 뜨악해져서 듀론 후작과 루이, 제론을 훑어보았다.

세 사람 역시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끄응, 그렇군!

나도 알아챘는데, 이 자리에 있는 천재들이 몰랐을 리 없지!

“절 테스트하신 겁니까? 너무하십니다, 후작 각하.”

내가 투정을 부리자 듀론 후작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으며 날 다독였다.

“너무 삐치지 말게. 덕분에 내 뒤를 이을 재목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지 않았는가.”

헐.

날 후계자로 삼고야 말겠다는 영감님의 결의 어린 집착이 느껴진다.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협상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마 육제후는 카슈텔 성을 빼앗긴 직후라 자존심 때문에라도 완강하게 버틸 테지요.”

루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혼트 제국이 너무 몰아붙였습니다. 포로를 석방하는 조건 외에도 카르스 황제가 무엇 하나 더 양보해주어야 육제후도 체면이 살 겁니다.”

“하지만 혼트 제국이 카슈텔 성을 반환할 것 같지는 않고, 어떤 양보를 얻어내야 한단 말이냐.”

에릭 국왕의 물음에 이번에는 제론이 발언했다.

“말씀대로 카슈텔 성은 돌려받기 힘듭니다. 카슈텔 성은 혼트 제국이 바덴 강 유역 침공의 교두보로 삼을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혼트 제국에게 카슈텔 성의 주둔 병력을 1만 이하로 제한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모든 포로의 무상 해방이 있어야 육제후도 납득할 것이라 봅니다.”

듀론 후작과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 의사를 나타냈다.

에릭 국왕은 생각 끝에 결정을 내렸다.

“좋다. 짐은 협상 테이블에서 육제후와 혼트 제국의 공방을 지켜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그 조건으로 조율하겠다. 하지만 육제후는 짐이 협상을 주도하는 걸 원치 않을 터. 무언가 육제후를 압박할 수 있는 수단 또한 필요하지 않은가.”

그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아주 좋은 압박 카드가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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