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회: 5권 - 7장. 협상개시 -->
오리엔 왕궁을 떠날 때 레이몬드 후작과 브리튼 공작이 마중을 나왔다.
“기회가 되면 또 오게. 개인적으로 정령술에 대해 꼭 연구해보고 싶다네.”
“그리 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브리튼 공작가도 그대를 환영하지.”
“영광입니다, 공작 전하.”
나는 두 사람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이것 참……. 살다보니 대마법사와 오러 마스터의 배웅을 받는 날도 오는구나!
나는 그제야 내가 이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렇게 나는 패트릭과 함께 마차에 올라 왕궁을 나섰다.
거리로 접어들어서 깨알 같은 인파를 해치며 서문으로 향했다.
서문에는 하딘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아주 어쩌면 리처드 벅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제의 그의 태도를 보면 확률이 매우 희박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일말의 기대는 무너졌다.
서문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평범한 체격, 용병치곤 무척 선량한 인상을 가진 청년, 바로 하딘 이었다.
나는 마차 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하딘, 이쪽이야!”
“아, 예!”
하딘은 냉큼 달려와 마차 안에 올라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작님.”
“하하, 이쪽이야말로.”
부탁할 게 뭐가 있겠니? 어차피 내가 아닌,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될 텐데.
쩝.
이렇게 생각하니 좀 아깝네. 후일 오러 엑스퍼트 상급까지 실력이 성장할 걸 빤히 아는데 아버지와 아서 형님에게 순순히 넘겨야 한다니!
나는 옆에 앉은 패트릭을 바라보며 아까운 마음을 달랬다.
그래, 나에겐 용병왕 콘돌이 있잖아. 더 욕심내면 벌 받지.
암.
패트릭은 내가 빤히 보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성문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다.
대륙 최고의 대도시답게 성을 나서는 인파가 너무 많았다.
그 탓에 백여 명이 넘는 병사가 검문에 동원되었지만 좀처럼 길게 늘어진 줄은 줄어들 기미를 안 보였다.
그런데 문득 우리 바로 뒤에 있는 마차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왜 마차 문을 함부로 열다니! 이게 무슨 무례요!”
“미안하게 됐소.”
“나 참!”
으잉? 사과하는 사내의 중저음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는데?
이윽고,
덜컥!
누군가가 우리가 타고 있던 마차 문을 확 열어 젖혔다.
우리의 시선이 노크도 없이 마차 문을 열어젖힌 사내에게 쏠렸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190cm가 넘는 장신, 듬성듬성한 턱수염, 남자답게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라?”
“여기에 있었군!”
리처드 벅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차에 올라타 하딘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
“……주군, 아는 사이입니까?”
어색한 침묵 속에서 패트릭이 나직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리처드를 보며 실실 웃었다.
“좋은 결정이야.”
“내 생활을 다 망쳐놨습니다. 책임지시죠.”
“내가 뭘?”
“이제 여자를 품어도 재미없어졌고, 술은…… 제기랄! 그건 정말 완전히 입맛을 버려놓았습니다. 이제 어떤 와인을 마셔도 성이 안 차게 됐단 말입니다!”
“하하하.”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운디네가 재주를 부린 환상의 포도주를 마시고 나면 다들 저런 금단현상을 겪게 되지.
“어떻게 책임질 셈입니까?”
“역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기사가 되어라. 그땐 그 멋진 포도주를 매일 대접해주지.”
“약속했습니다.”
“그래.”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리처드 벅의 결정에 나는 너무나 기뻤다.
사실 전생 시절에 리처드 벅은 한동안 허송세월을 보낸다.
40대가 되어서야 마음을 잡고 린델 백작가의 기사가 되어서 검술 연마에 전념, 오러 엑스퍼트 최상급의 경지까지 이르러 아버지의 호적수가 되었다.
만약 그 허송세월이 없다면?
그런 창창한 재능으로 젊은 30대를 피나는 수련에 쏟아 붓는다면 과연 얼마나 더 발전할까.
어쩌면 전생 때는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오러 마스터가 또 한 명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기대되지 않은가?
한참 후, 우리는 병사들로부터 검문을 받고 왕도 오리엔을 떠났다.
레던 왕국으로 향하면서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처음 하루는 서먹서먹했다.
하지만 이틀째에 접어들자 금방 친해져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호오, 오러 엑스퍼트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예. 그동안 오러 유저 상급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바스크 쿤트 자작님께서 체계적으로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실력이 갑자기 좋아졌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확 오러 컨트롤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게 되더군요.”
“하긴, 나야 원래 기사가문 출신이라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검술을 연마해왔지만, 보통 용병들은 경지가 높아지기가 힘들지. 실전에 특화된 단련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래도 오러 컨트롤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하거든.”
“저도 오러 유저 상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인데, 콘돌 경의 말씀을 들어보니 희망이 생깁니다.”
“예. 하딘 씨도 저처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의외로군. 바스크 쿤트 자작님 정도의 강자라면 자기 수련에 바쁠 텐데 휘하 기사들을 지도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주다니.”
“자작님께서는 요즘 오러 마스터가 되기 위한 수련의 일환이라면서 오히려 열심히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
“남을 가르침으로서 자신도 가르침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것 같긴 하군. 아무튼 이거 잘됐군. 쿤트 자작가의 기사가 되기로 결심하길 잘한 것 같아.”
“하하. 대련 상대가 없으셔서 요즘 무척 심심해하시던데, 벅 씨가 기사가 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실 겁니다. 아마 단단히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좋지. 오러 마스터를 바라보는 강자와 붙게 된다니 긴장 되는군. 여자랑 하는 것보다 화끈하겠어.”
부쩍 친해진 세 사람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용병왕 콘돌, 하딘, 리처드 벅.
용병업계의 신화라 불렸던 세 사람이 함께 잡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번 두 번째 인생은 정말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나 하나로 인해 이렇게 대륙에 변화가 생길 줄을 누가 알았겠어?
나 한 사람이라는 작은 변수가 커다란 폭풍으로 자라났다.
폭풍은 자라고 자라서 대륙 전체에 부는 변화의 바람이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생보다 더 행복한 역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이 생길 때마다 나는 가슴 깊이에서 힘이 솟는 걸 느낀다.
국경을 넘고 레던 왕국의 영토를 서쪽 방향으로 가로지른 지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패트릭에게 말했다.
“나는 이대로 레던 왕성으로 갈 생각이야. 패트릭 너는 쿤트 영지로 가서 아버님께 두 사람을 소개시켜드려.”
“혼자 가실 생각이십니까?”
“응. 사실 마차가 없으면 난 훨씬 빨라.”
“예, 알겠습니다.”
“그럼 난 간다.”
나는 노움을 부른 뒤 어스 핸드를 만들어 그 위에 올라탔다.
“수고하십시오.”
“또 뵙지요.”
하딘과 리처드가 인사해왔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는 레던 왕성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어스 핸드 위에 올라타서 균형을 잡으며 하늘을 나는 기분은 최고였다.
“음, 계속 서서 갈 순 없지.”
나는 어스 핸드 위에 흙으로 작은 의자 모형을 만들었다.
그 뒤에 걸터앉아 한결 편해졌다. 우리 귀염둥이 노움도 내 어깨 위에 사뿐히 앉았다.
의자에 앉아서 하늘을 날고 있다니.
아하하.
이거야 원 세상의 왕이라도 된 듯 한 기분이었다.
정령술 만세!
* * *
하늘을 나는 생활.
상상이나 해봤는가?
나는 꼬박 하루를 하늘 위에서 보냈다. 하루 종일 앉아 있기도 불편해서 어스 핸드를 좀 더 큼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등받이가 뒤로 기울어져 있어서 비스듬히 누울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여전히 어스 핸드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노움아. 얼마나 더 가야 하니?”
-21시간 31분 19초.
어휴, 우리 똘똘한 노움.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말하는구나.
문득 배가 고파졌다.
나는 샐러맨더와 운디네를 소환했다.
“샐러맨더야. 요 근방에 새 같은 거 있나 살펴볼래?”
-헹! 귀찮다!
“……운디네 시켜서 때찌때찌 한다?”
-말 안 들으면 혼나!
운디네가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화를 냈다.
-쳇!
샐러맨더는 아니꼽다는 듯이 투덜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움은 대지에 있는 모든 존재를 감지하지만, 공중에서는 그러지 못한다.
하지만 샐러맨더는 불의 정령답게 모든 생명체의 체온을 감지할 수 있었다.
-3킬로미터 앞에 새 한 마리 있다!
“그래? 노움, 들었지?”
-응!
노움은 속력을 더욱 높였다. 그렇게 한참을 날자 샐러맨더가 말했던 새가 보였다.
“끼루룩! 끼룩!”
저게 무슨 새지?
붉고 푸른 깃털로 알록달록한 새였다. 길이는 50cm쯤 될 것 같았다.
“운디네, 저거 잡아줘.”
-응.
운디네는 워터 스피어를 날려서 새의 머리를 꿰뚫었다.
알록달록한 새는 가엾게도 머리통이 아예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운디네는 워터 핸드로 추락하는 새를 낚아채 나에게 가져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