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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122화 (122/529)

<-- 122 회: 5권 - 6장. 스카우트 -->

“그런데 생각해보니 제가 졌을 경우의 조건을 이야기하지 않았군요. 1천 오린을 내놓으면 되겠습니까?”

“아니.”

“그럼 무얼 원하십니까? 내기에 진 건 인정하지만, 터무니없는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내 요구는 간단해.”

“듣고 있습니다.”

“마시고 즐겨.”

나는 당혹해하는 리처드에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이야기를 들려줘.”

리처드는 피식 웃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요구대로 리처드는 자신의 지난 과거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벅 남작가라는 작은 가문의 둘째 공자였다.

어려서부터 검술에 재능을 보여 형을 도와 가문을 빛내 주리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 16살 때, 벅 남작가는 멸문했다.

이유는 우습게도 그의 영지에 철광석 광산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철광석이 매장된 걸 발견한 지 석 달도 못 되어 벅 남작가는 이웃영지인 슈타덴 자작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부모님도 형도 모두 죽었고 오직 그만이 살아 도망쳤다.

슈타덴 자작가도 찔리는 게 있었는지 그를 죽이려고 추적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 오러 유저 상급의 실력을 갖고 있던 리처드는 죽기 살기로 검술만 연마했다. 용병이 되어서 실전까지 치르면서 힘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오러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을 때, 복수를 결심했다.

복수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벅 남작가를 억지로 멸문시키고 철광석 광산을 강탈했지만, 이번에는 슈타덴 자작가가 모두의 표적이 되었다. 주변 영지에서 그들의 철광석 광산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슈타덴 자작가가 철광석 광산을 멋대로 강탈했으니, 자신들도 못할 것 없다는 분위기가 생겼다.

리처드는 슈타덴 자작가를 노리는 영지에 투신했다. 슈타덴 자작가를 칠 때까지만 싸워주기로 했다.

결국 슈타덴 자작가와 영지전이 벌어졌고, 리처드는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워서 공을 세웠다.

얼마나 열심히 싸웠던지, 그 과정에서 중급의 경지에 발을 들이기까지 했다.

결국 슈타덴 자작가는 멸문을 당했다.

그렇게 복수에 성공한 리처드는 다시 용병이 되어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실컷 낮잠을 자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았다. 가끔 돈이 떨어지면 용병길드에서 의뢰를 받아 수행했다.

기사로 등용하고 싶다는 수많은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이제 귀족가문과는 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활을 반복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복수는 허무하더군요. 가족을 죽인 원수 놈들이 사형대에서는 왜들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하고 있던지…… 검을 휘두를 맛도 안 났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사형을 집행할 기회를 얻었지만, 결국 포기했습니다.”

“잘 한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과거의 원한도 생각나지 않고 속이 후련한 걸 보니 말입니다. 그때 내 손으로 그들의 목을 쳤더라면, 평생 잊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살 생각이야?”

“뭘 어떻게 삽니까? 지금처럼 이렇게 멋대로 살다 가는 거지.”

나는 리처드의 심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너무 젊은 나이에 원하던 모든 걸 얻었다. 복수, 실력, 돈, 그리고 어느 정도의 명성까지.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으니 매일 술을 마시고 여자를 품으며 육체적인 쾌락에 몰두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보통 젊은 나이에 성공을 이룬 인물들이 저런 반응을 보인다.

나는 리처드에게 한 마디 했다.

“꿈이 없군.”

“꿈이라……. 그런 건 어릴 때나 꾸는 것 아닙니까.”

“아닐걸.”

“그럼 남작님의 꿈은 뭡니까?”

“난 어릴 때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특별한 사람?”

“형들에 비해서 난 아무런 재능도 없었거든. 그래서 나도 무엇 하나 내세울 수 있는 특별함을 갖고 싶었어.”

“그래서 특별해졌습니까?”

“응. 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지. 그래서 새로운 꿈을 갖기로 했어. 나의 가족과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위협 없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 그게 지금의 내 꿈이야.”

리처드는 피식 웃었다.

“어떤 위협도 없이. 정말 야무진 꿈이군요.”

“그러게.”

나도 따라 웃었다.

리처드는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꿈이 없습니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금의 생활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인간은 본래 끝없이 원하며 살아가는 동물이다.

진리를 깨달은 성인(聖人)이나 마음을 비우고 살 수 있다. 그런 건 만족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은 갈증이다.

내 정신연령도 어느 덧 93세.

너처럼 허무주의에 빠진 어린 녀석 하나 일으켜 세우는 건 일도 아니지.

나는 입을 열었다.

“어떨 땐 사람들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릴 땐 다들 꿈을 꿨으면서 나이 들면 홀랑 까먹는단 말이야.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까, 이제 어른이니까, 그렇게 자조하면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순수했을 때 정해놓은 꿈을 포기해버리지.”

“…….”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있으면서, 그걸 현실을 직시한다고 하지. 그렇게 미래에 펼쳐질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곤, 사회를 이루는 하나의 부속품이 된 것처럼 끝없이 무의미한 인생의 쳇바퀴만 돌려. 그래놓고는 자기들이 어른이라고 말하는 놈들이 나는 제일 싫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하거든.”

나는 리처드를 응시하며 달래듯이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 좋은 인생은 복수도 돈도 명예도, 안정적인 생활도, 심지어는 가족도 아니야. 바로 자기 자신의 꿈을 조금씩 이루어나가는 삶. 그것이 죽을 때 후회하지 않는 좋은 인생이야.”

말을 마친 나는 와인글라스에 포도주를 따르며 물었다.

“자, 말해봐. 어릴 적의 너는 무슨 꿈을 꾸었지?”

리처드도 와인글라스를 절반쯤 채웠다.

그리고 한 모금 입안에 넣고 혀를 굴려 맛을 음미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적에 생각해본 적 있었습니다. 어른이 되면 역사책에 잔뜩 기록되는 훌륭한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나는 웃었다.

“뭐야,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이잖아?”

“…….”

“이미 짐작했듯이 나는 너를 우리 가문의 기사로 만들고 싶어서 왔어.”

“그리로 가면 제 꿈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겁니까?”

“천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 꿈을 이뤄주겠다고 장담하진 않겠어. 하지만 꿈을 이루기 좋은 곳에 데려다줄 수는 있어. 거기서 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해주지.”

말을 마친 나는 리처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으면 무언가 입질이 와야 정상이다. 경험상 내 설득이 꽤 먹혀들었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리처드는 고개를 저었다.

“제안은 감사하나 거절합니다.”

“어째서?”

“꿈이 어쩌고 하셨지만, 그냥 저처럼 생각 없이 하루하루 즐기는 삶도 있습니다.”

“즐긴다고? 그게 전혀 즐거운 삶이 아니었다는 걸 언젠가는 깨닫게 될 거야.”

전생 때 리처드는 더 이상 무의미하게 인생을 보내면 안 된다는 자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포기하고 육제후의 일원인 린델 백작가의 기사가 된 것이 아니겠는가.

“글쎄요.”

리처드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못내 아쉬워서 한숨을 쉬었다.

저 리처드 벅을 포기하자니 아까워 죽겠지만, 더 이상 설득을 해봐야 무의미했다.

“잘 마셨습니다. 과연 제 인생 최고의 술맛이었습니다.”

작별을 하고 리처드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내일 떠나. 혹시 마음이 바뀌면 내일 아침에 서문에서 보자고.”

“혹여나 절 기다리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며 리처드는 훌쩍 떠나버렸다.

나 역시 계산을 마친 후 터덜터덜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마 리처드 벅은 지금껏 그랬듯 무의미하게 세월을 보낼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자신이 허송세월을 보냈음을 깨닫고는,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움직이리라.

바로 그때 그가 날 기억 속에서 떠올려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육제후 쪽이 아닌 우리 가문에 오지 않겠는가?

아무튼 훗날을 기약하고, 오늘은 하딘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자.

*   *   *

열린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온다.

눈을 떴을 때, 같은 침대에는 뽀얀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잠들어 있는 여자 두 명이 보였다. 간밤에 돈을 주고 부른 여자들이었다.

리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록 쿤트 남작…….’

어제 그에게 인생과 꿈에 대해 들었을 땐 그 말이 옳은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반발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의 말을 부정하기 위해 여자를 안았다.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다!

이렇게 내 멋대로 실컷 즐기며 살다가 뒈질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다고 그래?

다들 날 부러워한다고!

리처드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 여자를 품고서 밤새 일곱 번이나 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의 저릿한 쾌감이 지나자 어느 때보다도 짙은 허무함이 밀려왔다.

“쳇.”

리처드는 여자들을 깨워서 내보냈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워 입고 밖으로 나섰다.

기분 전환을 위해 그가 향한 곳은 어제도 들렸던 단골 술집이었다.

콧수염 난 중년 바텐더는 리처드를 웃으며 맞이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오셨군요.”

“아아. 레이스 브리튼 한 병!”

“잠시 기다리십시오.”

바텐더는 와인저장고에서 와인을 가져왔다.

브리튼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유리병이 대령되자마자, 리처드는 코르크를 따고 병째 집어 들어 벌컥벌컥 나발을 불었다.

귀한 명주를 대하는 그 품위 없는 행동에 바텐더는 화들짝 놀랐다.

리처드는 눈을 감고 홍수처럼 밀려오는 진한 와인의 풍미를 혀와 목구멍으로 느꼈다.

하지만 어쩐지 부족하다.

어제 맛보았던 환상의 맛과 비교하면 요리용으로나 쓸 싸구려 백포도주만 못했다.

쾅!

“제길!”

입맛을 버려놓았다.

어제 그 맛을 느껴보지 않았더라면, 즐겨 마시는 레이스 브리튼이 이토록 맛없게 느껴질 리 없었다.

괜히 환상의 맛을 봐서 입맛만 높아졌다.

“다음에 또 오지.”

더 이상 술을 마실 기분이 들지 않았다. 리처드는 대충 계산을 하고 술집을 나왔다.

인파가 많은 거리가 오늘따라 쓸쓸하고 덧없게 느껴졌다. 이젠 무슨 낙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순간 카록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 꿈을 이뤄주겠다고 장담하진 않겠어. 하지만 꿈을 이루기 좋은 곳에 데려다줄 수는 있어. 거기서 네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는 장담해주지.”

리처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힘줄이 돌출하도록 주먹을 꽈악 쥐었다.

카록 쿤트 남작.

서문이라고 했던가? 분명 오늘 아침에 떠난다고 했다.

“이런 빌어먹을! 내 생활을 망쳐놓고 그냥 갈 생각은 아니겠지!”

따로 챙길 짐도 없었다. 리처드는 왕도 오리엔의 서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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