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회: 5권 - 6장. 스카우트 -->
“그것이 사실인가?”
떨리는 오리엔 국왕의 물음에 브리튼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오오, 그렇단 말이냐.”
“허어, 그럴 수가!”
오리엔 국왕과 레이몬드 후작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상급 정령사가 출현한 것이다!
상급 정령사의 군사적인 가치만 따진다면 이 자리에 있는 브리튼 공작이나 레이몬드 후작에 견줄 수 있다.
또한 정령술의 특성상 활용이 자유로워 검술보다 훨씬 다양한 효용에 쓰일 수 있으니, 무척 귀중한 재원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오리엔 왕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무인인 브리튼 공작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니 가공할 수준이 아닌가.
레이몬드 후작은 기가 차서 투덜거렸다.
“빤히 보고도 상급 정령사인 줄을 몰랐다니, 대마법사라 불리는 내 명성이 다 부끄러워지는구먼. 내가 눈 뜬 장님도 아니고 원……. 어서 정령친화력을 측정하는 마법이라도 개발해야지 안 되겠군.”
사실 레이몬드 후작은 오랫동안 정령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연구해보고 싶어 했다.
정령술은 엘프가 전해준 신비의 비술로 대자연의 의지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런 정령술에 대해 연구해보면 궁극의 경지인 8서클로 가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컸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 정령사가 있어야 정령술을 연구하지 않겠는가?
레이몬드 후작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마법사가 정령술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신비의 종족인 엘프의 능력이나 미지의 영역인 정령계, 그리고 대자연의 궁극 등 불타는 마법사의 탐구욕을 자극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정령술은 미스터리 그 자체였다.
마법길드처럼 정령길드 같은 단체가 결성되어서 정령술에 대한 지식을 연구·기록해나간다면 오죽 좋겠냐만, 도통 그 정령사라는 작자들은 얽매이는 걸 너무 싫어했다.
‘자기네들이 무슨 엘프라도 된 것처럼 사회적 틀에 자유가 제한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한단 말이야!’
한때 레이몬드 후작은 수소문해서 하급 정령사 한 명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깊은 산골짜기에 사는 정령사를 몸소 찾아가 연구에 협조해달라고 부탁했다.
엄청난 돈을 제안했지만 정령사는 무척 싫은 표정을 짓더니, ‘혹시 왕궁으로 따라 가야 하는 겁니까?’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거절당할 것 같아서 그냥 가끔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만 하겠다고 했다.
사정사정을 한 끝에 간신히 승낙을 얻어냈고, 참고로 정령사는 돈은 필요 없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정령사는 사라져 버렸다.
정령사가 살던 산골짜기의 초옥에는 편지 한 통만 달랑 놓여 있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자주 찾아오셔서 부담스럽고 귀찮습니다.]
이 정도면 정령사라는 타이틀만 없으면 정신 장애가 있다고 봐도 좋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카록 쿤트 남작은 굉장히 희귀한 케이스였다.
하급도 중급도 아닌, 무려 상급 정령사나 되는 존재가 사업도 하고 왕실에도 관여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옛날 전설적인 인물인 대정령사 라울이 국가를 위해 능력을 발휘할 의욕이 있었더라면 대륙 전체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카록 쿤트 남작은 이미 활발하게 활동 중이며, 나이도 고작 21살이니, 장래엔 대정령사의 경지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레이몬드 후작의 말에 오리엔 국왕은 마치 카록을 이미 사위로 맞이한 것처럼 즐거워했다.
“그야말로 짐의 부마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으냐. 정령술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식견과 상재까지 출중하니, 우리 막내딸도 좋아하겠구나.”
“다들 동의하니 이제 고 녀석을 어떻게 부마로 만드느냐의 문제만 남은 듯합니다, 폐하.”
“그렇군. 브리튼 공작, 어찌 하면 좋겠는가?”
브리튼 공작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의 됨됨이를 보면 상단을 경영하고 있으나 재물에 크게 집착하는 것 같지는 않고, 정치 활동을 하고 있으나 권력 지향적인 인물로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욕심이 있다면 상급 정령사라는 능력으로도 더 큰 이익을 얻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오리엔 국왕도 수긍이 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에릭 국왕이 바보도 아니고, 상급 정령사인 줄 알았으면 더 높은 작위가 큰 영지도 내줬겠지. 그럼 여자는 어떤가? 혈기왕성한 젊은 사내인데 짐의 막내딸 같은 미녀를 보면 탐내지 않겠는가?”
“여자를 얻기 위해 중대사를 결정할 만큼 여색을 밝혔다면, 벌써 부인을 여럿 두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는 아직 미혼입니다.”
“으음. 하긴, 시종장의 말로는 이곳에 머물면서도 시녀들에게 그다지 호감을 나타내지 않았다더군.”
“가장 포섭하기 힘든 케이스로군요. 이럴 줄 알았습니다. 정령사라는 족속들은 어디 쉽게 넘어 오는 법이 없지요.”
레이몬드 후작은 옛날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1년에 2천 오린씩 지급할 테니 정령술 연구를 도와달라고 모집해도 한 놈도 안 나타나는 족속들이 바로 정령사였다.
“젊은 남자가 미인을 싫어할 리는 없습니다. 중대사를 결정할 정도로 좋아하지 않을 뿐.”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겐가?”
오리엔 국왕의 물음에 브리튼 공작이 답했다.
“계기를 만들어주면 됩니다.”
“어떻게 말인가?”
“레던 왕실은 조만간 동맹을 제의해올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3이 되어 혼트 제국을 막자고 했으니 말이네.”
“그때 조건을 하나만 더 붙이면 됩니다.”
비로소 브리튼 공작의 뜻을 알아챈 오리엔 국왕은 테이블을 탕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동맹의 증표로 카록 쿤트를 짐의 부마로 달라고 말이지? 크하하하! 좋군, 좋아!”
* * *
“누가 내 얘기를 하나?”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굴러다녔다. 아아, 심심해 죽을 것 같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아니, 이 동네 국왕 일당(?)은 무슨 놈의 상의를 이렇게 오래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상단 운영 좀 오래 해봐서 아는데, 리더는 의사결정에 있어서 오래 끌면 끌수록 조직에 해가 된다.
내 기준은 이틀.
그 이상은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시간이 길어져도 생각이 제자리를 맴돌게 된다.
아무튼 이 나라처럼 세월아 네월아 하는 회의는 독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설마, 뭔가 다른 꿍꿍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도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우리나라 쪽은 혼트 제국의 10만 대군 때문에 난리가 났을 터였다.
하루하루 시간이 귀중한 판국인데 나는 이곳 오리엔 왕국에서 발목을 잡혀 버리다니 짜증이 치밀 지경이었다.
오리엔 국왕을 완벽하게 설득했다고 나는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쾌한 확답을 주지 않고 나를 붙잡아두기만 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슬슬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혼트 제국과 손잡았나?
바덴 강을 치기로 결단해놓고는 레던 왕국에게 대비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날 붙잡아두고 있는 게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내 신변도 위험했다.
브리튼 공작의 날카로운 안목 탓에 내가 상급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킨 상황.
만약 바덴 강을 치기로 했다면, 적국의 위협적인 강자인 나를 순순히 보낼 리 없었다.
괜스레 신경이 날카로워진 걸까?
하지만 나는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노움을 항상 소환해놓기로 했다.
소환된 노움은 내 머리 위로 폴짝 뛰어 올라 앉았다.
이제는 진짜 열네 살 인간 소녀와 똑같은 체격을 갖고 있었지만, 무게는 여전히 깃털 같았다. 게다가 점점 귀여워진다. 귀여움마저 진화하는가!
-헤헤, 나 귀여워.
내 생각을 읽은 노움이 방실방실 웃었다. 아아. 예민해진 내 마음이 노움의 애교에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그때, 노움과 공유된 감각에 누군가의 접근이 포착됐다. 으음, 저 존재감은 예의 그 늙은 시종장이었다.
예상대로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시종장이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제가 안내해드리지요.”
“아아. 패트릭, 넌 여기서 기다려.”
“예.”
나는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밖으로 나섰다.
오리엔 국왕이 날 부른다니 안심이었다.
만약 딴 마음을 품었더라면 오리엔 국왕이 날 부르지 않고, 대신 브리튼 공작과 레이몬드 후작 두 사람이 찾아와 내게 항복 및 귀화를 제안했을 터였다.
물론 시종장을 따라 갔더니 오리엔 국왕 대신 왕실친위기사단과 궁정마법사단이 잔뜩 포진해있더라~ 라는 상상도 할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오리엔 국왕은 강한 군주를 표방하는 인물이라, 그런 비열한 술책에 스스로 손을 담그고 싶어 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집무실에는 오리엔 국왕과 레이몬드 후작, 브리튼 공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리엔 국왕은 날 보자 크게 웃으며 반겼다.
“하하핫!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 미안하군. 상의할 게 너무 많아서 본의 아니게 결정이 늦어졌네.”
아뇨. 댁이 원래 결단이 느린 건 이미 알고 있는데요, 뭐.
“좋은 대답을 기대해도 되겠는지요?”
내 물음에 오리엔 국왕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짐은 혼트 제국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번 바덴 강 협상은 레던 왕실에 협조할 것이며, 앞으로도 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좋은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짐은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 당연한 선택을 하는데 일주일이나 걸리셨고?
“본국과 동맹을 맺지 않은 이상, 혼트 제국도 경거망동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혼트 제국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처지가 못 되는 건 확실합니다만, 글쎄요. 카르스 황제의 심계가 이걸로 끝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럼 무언가 다른 걸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냐?”
“예. 잘은 모르겠지만, 카르스 황제는 그만큼 무서운 상대라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짐도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겠다. 그래, 언제 레던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냐?”
“폐하의 답변도 들었고 한 시가 급한 상황이니 내일 즉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다음에 또 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
“폐하의 존안을 또 뵐 수 있다면 저로서는 영광일 따름이지요.”
그렇게 오리엔 국왕과 작별을 고하고, 나는 가뿐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오리엔 왕국이 우리 쪽으로 돌아선 걸 확인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이제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