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회: 5권 - 4장. 대륙정복의 계책 -->
[거기 하늘을 나는 마차! 혼꾸멍나기 전에 지상으로 내려가라! 정식 절차를 밟고 왕궁에 진입하지 않으면 침입자로 간주한다!]
웬 흰 수염을 휘날리는 마법사 영감의 호령이 음성증폭마법으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남작님, 이러다 오해를 사겠습니다.”
“음, 저 영감님,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지?”
“보면 모르십니까? 궁정마법사단의 단장 레이몬드 후작 아닙니까!”
“오, 그래? 그 7서클 대마법사라는?”
그 말에 나는 노움의 감각을 통해 마법사 영감을 살펴보았다.
패트릭의 말 대로였다.
심장을 중심으로 대량의 마나가 일곱 개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리엔 왕국의 7서클 대마법사라면 궁정마법사단장 레이몬드 후작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어서 침입자로 간주되기 전에 해명을 하시지요!”
“알았어. 맡겨둬.”
나는 마차 문을 열고 어스 핸드 하나를 더 만들어 공중에 띄우고는 그 뒤에 사뿐히 올라섰다.
이를 지켜보던 레이몬드 후작이 날 빤히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 정령사냐?]
“예. 저는 레던 왕국에서 온 카록 쿤트 남작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에릭 레던 국왕 폐하의 어명을 받들어 오리엔 왕국의 존귀한 통치자이신 분을 알현하고자 왔습니다.”
[카록 쿤트? 쿤트 상단의 주인이며, 그 노움과 운디네를 부린다던 중급 정령사가 바로 자네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명성 높으신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 각하께서 저를 알아주시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뭔가?]
“말씀이 너무 크게 들려서 귀가 따가운데, 음성증폭마법은 중단하시고 조용히 이야기해봄이 어떻습니까?”
[자네야말로 일단 마차를 지상으로 내려놓고 대화를 청하는 게 어떻겠나? 눈이 달려 있으면 밑을 좀 보게.]
그 말에 나는 아래쪽을 보았다.
“헉!”
저게 뭐야?
오리엔 왕궁을 지키는 병사들이 제각기 활과 창을 들고 우리 마차 쪽을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쯧쯧, 왕실의 사자씩이나 돼서 이게 무슨 짓인가? 왕궁 근처에서는 비행마법이 금지된 걸 모르는가?]
“마법이 아닌데…….”
[정령술도 마찬가지일세!]
레이몬드 후작의 호통이 음성증폭마법 탓에 쩌렁쩌렁하게 내 고막을 강타했다.
노년에 이른 마법사들은 대부분 성격이 괴팍해지며, 특히나 레이몬드 후작이 유난히 불같다던데, 소문대로였다.
찔끔한 나는 일단 노움에게 생각을 보내서 마차를 지상으로 천천히 내렸다.
마차가 내려오자마자 병사들이 일제히 에워쌌다.
[그만둬라. 침입자가 아니다. 그들의 신원은 내가 보증할 테니 물러들 가거라.]
레이몬드 후작의 말에 병사들은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지상에 착지한 레이몬드 후작은 음성증폭마법을 해제하고 나에게 말했다.
“레던 왕실에서 온 자가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그게, 거리에 인파가 너무 많아서 마차가 지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쯧쯧쯧. 됐네. 그런데 폐하를 알현하고자 왔다고?”
“예.”
“그럼 그 바덴 강 문제이겠군.”
레이몬드 후작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역시나 오리엔 왕국 내에서도 바덴 강 협상 건이 화제인 모양이었다.
음?
그러고 보니 이 영감님, 속을 떠보면 바로 넘어올 것 같은 성격인데. 괴팍한 사람일수록 뭔가를 숨기는 걸 잘 못하니까.
마법사란 작자들은 본래 어떤 분야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똑똑하지만, 인간관계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서투른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시스가 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역시 오리엔 왕국도 바덴 강 통행세 협상 문제에 관심이 높군요?”
“당연하지 않나. 레던 왕국과 혼트 제국과의 무역이 대부분 바덴 강을 통해 이루어지니까. 그쪽의 살인적으로 높은 통행세가 감축되면 그만큼 3국의 이익 아니겠나.”
“그렇지요. 뭐, 그 일과 관련해서 혼트 제국과도 따로 이야기를 나눴을 테니 오리엔 왕국으로서도 가장 중대한 문제가 됐겠군요.”
“그야 물론이…….”
대꾸하다 말고 레이몬드 후작은 멈칫했다. 그리곤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는 실실 웃었다.
곧잘 넘어오는군.
역시나, 혼트 제국과 따로 밀담을 나눴을 것이라는 추측이 사실인 것으로 드러났다.
즉, 함께 연합하여 바덴 강 유역을 공격하자고 카르스 황제로부터 제안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론이 추측한 우려가 현실로 벌어졌다. 과연 제론 데커드, 전생에 ‘오리엔 왕국의 마지막 장벽’이라 불렸던 인재다운 통찰력이었다.
“젊은이가 참 약았구먼! 이제 보니 뱃속에 능구렁이 십여 마리는 키우고 있는 친구였어.”
“그럴 리가요. 알고 보면 제가 얼마나 정식하고 순수한 사람인지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군. 에잉! 이 나이에 되도 않은 실수를 하다니! 앞으로 영원히 자네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군.”
“에이, 전 후작 각하가 좋아지려고 하는데요.”
“입 다물어라! 헬 파이어로 확 구워버리기 전에!”
“아하하.”
“웃지도 마라!”
레이몬드 후작은 괴팍한 성격을 유감없이 드러냈지만, 나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 * *
“폐하. 그자가 오리엔 왕국으로 향했다는 첩보입니다.”
할슈타인 백작이 속삭였다.
황제의 무표정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다.
인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미소 짓듯이 카르스 황제는 괴이하게 웃었다.
“역시나인가.”
“역시 제거하는 편이 옳았습니다, 폐하.”
할슈타인 백작은 우려를 표했다.
카록 쿤트 남작.
행간을 읽고 대응하는 속도가 남달랐다.
이번 오리엔 왕국 행은 혼트 황실과 오리엔 왕실 간의 동맹을 방지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 정도는 해야지.”
카록 쿤트 남작의 행보에 대한 카르스 황제의 평가였다.
“폐하……. 그자에게 너무 관대하십니다.”
“마음에 들었으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의중이신지요.”
할슈타인 백작은 정중하게 물었다.
카르스 황제는 잠시 창밖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대 위로 초대 받았으니 춤을 춰줘야지. 원하는 춤을 춰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
“군대는?”
“바덴 강 유역에 거의 인접해 있습니다. 카슈텔 성과 불과 일주일 거리입니다.”
카슈텔 성은 육제후의 일가인 린델 백작가의 것으로 바덴 강 유역으로 향하는 진로를 지키고 있는 관문 역할을 하는 성이었다.
“할슈타인 백작.”
“예, 폐하.”
“네가 직접 가라.”
“……?”
의아해하는 할슈타인 백작에게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함락시켜라. 그거.”
그 말에 할슈타인 백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카슈텔 성 말씀이십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에게 카르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뭐가 있지?”
“……알겠습니다. 구체적인 작전 지시는 따로 있으신지요?”
“첫날은 일대일 결투로 네 무위를 과시하고 상대는 죽이지 말고 생포해라. 그 후 전 병력으로 한두 차례 총공격을 가하면 적이 전의를 잃을 것이다. 그때 항복을 받아내라.”
“최대한 많은 포로를 잡으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가라.”
“예!”
할슈타인 백작은 즉시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난 후, 홀로 남겨진 카르스 황제는 창밖의 풍경을 감정 없이 바라본다.
“춤을 춰주겠다. 그러니 너희도 춤을 추어라.”
* * *
당연하게도, 일국의 군주는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리엔 국왕은 여러 기관 기찰 및 서류 업무가 잔뜩 쌓여 있었고, 그러므로 나는 접견실에서 알현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결국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현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알현 절차도 혼트 제국보다 까다로웠다.
아마 이쪽 동네 군주는 카르스 황제보다 정상적이기 때문이겠지.
“함께 오신 호위기사 분은 모든 무장이 해제된 상태에서 입장이 가능하십니다.”
직접 국왕을 모시는 늙은 시종장이 말했다.
패트릭은 두 말 없이 바스타드 소드를 소드 벨트에서 풀어놓았다.
심지어는 금속류 갑옷도 무장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갑옷에 작은 숏 소드 같은 흉기가 장착된 경우가 있을뿐더러, 강철 건틀릿을 낀 주먹질에 얻어맞아도 뇌진탕을 입힐 수 있기 때문이란다.
다행히 패트릭은 용병 시절부터 입던 레더 아머 차림이었기 때문에 용납되었다.
또 하나 문제는 나였다.
“카록 쿤트 남작님께서는 정령사이시기 때문에 남작님의 능력을 봉인할 안전 조치가 필요합니다. 마법사라면 마나 봉인구를 장착하면 되지만, 정령사의 경우에는 정령술을 억압할 장치가 없는 탓에…….”
“그래서 어쩌자는 얘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