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회: 5권 - 3장. 오리엔 왕국으로 -->
혼트 제국의 10만 대군이 다가오는 상황이니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즉시 오리엔 왕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수행원은 오직 패트릭 한 사람뿐. 이번에도 비공식 사절로 비밀리 다녀오는 셈이었다.
아무튼 카르스 황제! 그놈의 정신병자 때문에 초조해서 똥줄이 탈 지경이다.
그 야망이 단지 망상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전생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그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만약에 그 일이 다시 재현된다면…….
결국 전쟁이 터진다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수단을 써야지.”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상급 정령사의 경지에 오른 걸 비밀로 한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카르스 황제 암살!
극단적인 순간이 되면, 할슈타인 백작이 전투에 참가해 곁에 없는 틈을 노려서 카르스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정령술은 기사들이 잘 대응하지 못한다는 장점이 있으니 성공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릭 형님과 우리 가문의 안위가 지켜질 수 있다면, 전쟁이라는 더 큰 재앙이 비켜갈 수만 있다면 난 할 것이다.
그게 비록 다소 치졸한 행위라 할지라도 말이다.
“뭐, 최후의 수단일 뿐이지만.”
“예?”
내 혼잣말에 패트릭이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휘휘 손을 내저었다.
우리는 현재 오리엔 왕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이제 노련한 마부가 된 노움이 끌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패트릭, 네가 오리엔 왕국 출신이었지?”
“아, 예…….”
패트릭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용병왕 패트릭 콘돌.
전생 시절에 들었던 소문에 의하면 용병왕 콘돌은 반역죄로 멸문당한 오리엔 왕국의 어느 가문 출신이라고 했다.
그걸 이제야 기억해낸 것이다.
“괜찮겠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오리엔 왕국 출신이냐고 물었을 때 네 안색이 불편해지는 걸 봤거든. 오리엔 왕국에 대해 무언가 좋지 않은 과거라도 있는 것 같아서.”
패트릭은 질린 얼굴로 날 보더니 이윽고 한숨을 쉬었다.
“남작님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전부 말해 봐. 이제 우린 한 식구잖아?”
주군과 기사 사이에는 비밀이 없어야 하는 법.
패트릭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현 오리엔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20년 전의 발트 공작의 반란이 큰 역할을 했다.
발트 공작은 선대 국왕의 동생으로 왕위 찬탈을 기도했다.
그 반란을 진압한 것이 당시 태자였던 현 오리엔 국왕이다.
오리엔 국왕은 발트 공작가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반란에 참여한 역적들을 차례로 숙청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정적인 2왕자의 세력까지도 반역죄로 싸잡아 숙청했다.
패트릭의 가문 역시 그렇게 억울하게 숙청된 희생양 중 하나였다.
다행히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패트릭의 일가족은 대신 영지와 재산을 모두 잃고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늘 쫓겨 다녀야 하는 고단한 삶에 하나둘 병과 굶주림으로 스러졌고, 결국 패트릭만이 홀로 고아가 된 채 세상에 남겨졌다.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었던 패트릭은 먹고 살기 위해 용병이 되었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정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어디 한둘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패트릭의 불운한 과거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럼 오리엔 왕국은 네겐 복수의 대상이겠군.”
패트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복수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 거대한 존재이지요. 하지만 오리엔 국왕을 좋게 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만약에 제게 오리엔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그러할 겁니다. 억울한 반역죄로 힘겨운 생활을 해야 했던 부모님을 봤으니 원한은 지울 수 없습니다.”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전생 때, 패트릭 콘돌은 오리엔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
고난 끝에 굴지의 용병왕이 된 패트릭은 혼트 제국에 가담하여 오리엔 왕국의 침공에 크게 일조한 것이다.
궁지에 몰린 오리엔 왕국은 그에게 막대한 돈으로 회유하려 했지만 패트릭은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나는 용병이며 의뢰인에게 받은 돈만큼의 일을 할 것이다. 이미 수행하고 있는 의뢰를 그만두고 다른 의뢰를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의 신뢰성을 깎는 짓이며, 그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오리엔 왕국에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도 않다. 혼트 제국에 고용된 기간은 2년이다. 2년이 끝난 후에 다시 날 찾아온다면 생각은 해보겠다.”
그러나 2년 뒤에도 그는 오리엔 왕국의 의뢰를 받지 않고 혼트 제국과의 계약을 연장했다.
오리엔 왕국이 용병왕 콘돌을 고용할 수만 있었더라면 영토의 절반을 빼앗길 정도로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오리엔 국왕으로서는 뼈아픈 보복을 당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모두 없는 일이 되었다.
패트릭은 용병이 아닌 나의 기사였으며, 그의 과거의 은원이 훗날 어떻게 작용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다 제 개인의 과거사입니다. 저는 오직 저의 주군이신 남작님을 따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문제로 제 소임을 그르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이지. 난 널 믿어, 패트릭.”
패트릭은 내 말에 환히 웃었다.
나 또한 패트릭의 믿음직한 성품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기분이 좋았다.
용병왕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던 데에는 오러 마스터의 실력 이외에도 저런 신의 있는 성품이 있어서였다.
단지 강하기만 한 용병이었다면 전장의 악마, 피의 용병쯤 되는 무서운 별명으로 불리며 두려움과 경외만 살뿐, 존경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혹시 네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럴 리는 없습니다. 숙청 당시 저는 막 태어났을 뿐이니까요. 제 가문이 그리 널리 알려진 명문도 아니니 지금쯤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럼 뭐 하러 레던 왕국으로 도망친 거야?”
“과거의 일을 잊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렇구나.”
나는 더 이상 캐묻지 않기로 했다.
불편한 과거사를 자꾸 들춰봐야 패트릭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잘 하면 소원 성취 하겠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리엔 왕실로 가는데 잘 하면 오러 마스터로 이름난 조엘 브리튼 공작도 만날 수 있지 않겠어?”
“아! 그렇군요!”
그제야 패트릭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조엘 브리튼 공작.
오리엔 왕국의 최대 명문가인 브리튼 공작가의 가주이자,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로 명성 높은 기사였다.
게다가 브리튼 공작가는 대표적인 오리엔 왕실의 지지 가문이었다.
참고로 ‘레이스 브리튼’이라는 환상의 백포도주를 생산하는 가문으로 더 유명했다.
브리튼 하면 굴지의 오러 마스터인 조엘 브리튼보다도 백포도주 ‘레이스 브리튼’을 먼저 떠올릴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었다.
“정말 만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중요한 일인데 국왕의 측근인 그 역시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오러 마스터가 어떤 존재인지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의 경지를 벗어난 초인이라던데 사실일까요?”
“글쎄. 제대로 실력발휘 하는 걸 보지 못해서. 겉보기엔 그냥 사람이던데.”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오리엔 왕국으로 가는 길은 순조롭지 않았다.
별달리 큰 문제는 없었지만 도로 정비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마차가 쉴 새 없이 덜컹거렸고, 하루가 멀다 하고 몬스터들이 출몰했다.
왜 물류가 남쪽의 바덴 강에 집중되어 있는지 알게 해주는 모습이었다.
출현하는 몬스터 대부분은 패트릭에게 맡겨놓았다.
내가 처리해버리는 게 훨씬 빠르지만,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몬스터 무리와 마주친 횟수만큼이나 패트릭의 오러 컨트롤도 좋아졌다.
이제는 자유롭게 오러를 검에 싣고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러 엑스퍼트 초급인 패트릭의 솜씨로도 처리할 수 없는 몬스터도 있었다.
“크어어어!”
정말 오랜만이군.
오우거였다.
“나, 남작님.”
패트릭의 목소리가 떨렸다.
용병 출신인 그는 오우거와 맞닥뜨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재앙인지 귀가 따갑게 들어봤을 터였다.
하지만 무려 상급 정령사인 이 몸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될 수 없는 놈이지. 에헴.
“어때? 좋은 경험 한다 셈치고 한 번 싸워볼래? 위험하면 내가 도와줄게.”
“으음, 한 번 해보겠습니다.”
패트릭은 용기를 내어 바스타드 소드를 뽑고 앞으로 나섰다.
사실 나는 되도록 패트릭에게 많은 실전 경험을 심어주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패트릭은 용병왕이라 불렸다.
용병으로서 험난한 전장을 수도 없이 해쳐오며 실력을 갈고 닦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 기사가 되었다. 일평생 용병으로 살았던 전생처럼 많은 실전을 겪어보지 못한다.
전생과 달리 경험 부족으로 오러 마스터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아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엄청난 인재를 괜히 내 욕심 때문에 망쳐버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노움, 알지?”
-응. 쟤가 위험하면 도와줄게.
그렇게 나는 노움과 함께 패트릭 대 오우거의 대결을 구경하기로 했다.
“크어어!”
오우거는 고함을 지르며 대뜸 주먹을 휘둘렀다. 철탑 같은 팔이 쑤욱 뻗어왔다. 과연 악명 높은 몬스터답게 화끈한 주먹질이었다.
“큭!”
패트릭은 재빨리 뒤로 피했다.
피했음에도 권풍에 머리가 찰랑거리니, 맞으면 그냥 골로 가는 거다.
뒤로 물러났던 패트릭은 다시 재빠르게 앞으로 쏘아지듯이 나아가 찌르기를 했다.
콰직!
오우거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몸을 비틀었다. 그 때문에 아쉽게도 회심의 찌르기는 옆구리를 살짝 긁는 데 그쳤다.
하지만 패트릭의 반격은 내가 봐도 정말 날카롭고 감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