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회: 5권 - 3장. 오리엔 왕국으로 -->
“10만인가.”
“예. 앞으로 열흘쯤 지나면 바덴 강 유역 인근에 도달한다고 합니다.”
심복 에반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란즈헬 백작은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건 좀 당혹스럽군.”
그 말에 에반은 내심 놀랐다.
늘 냉정한 란즈헬 백작이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굉장히 심각하구나.’
란즈헬 백작이 말했다.
“협상은 가을인가.”
“예. 협상 테이블에 에릭 국왕은 물론 오리엔 왕국과 혼트 제국 측에서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며칠 전, 바덴 강의 높은 통행세에 대해 상의하자며 레던 왕실에서 제안해왔다.
한 바탕 전쟁 같은 협상이 시작되려 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우리를 3국의 공적으로 만들어버렸군. 통행세를 인하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우리를 궁지에 몰았어. 이 일을 꾸민 게 카록 쿤트 남작이라 이거지.”
“예.”
“역시 그놈은 죽였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에반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블루울프 용병단에게 사주하여 암살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에반으로서는 드물게 란즈헬 백작이 내린 임무를 완수해내지 못한 셈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란즈헬 백작이 물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린 에반이 입을 열었다.
“협상은 저희가 불리합니다. 레던 왕실은 물론이고 혼트 제국과 오리엔 왕국의 압박까지 받으면, 결국 불가피하게도 어느 정도 바덴 강의 통행세를 인하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겠지.”
“다만 문제는 얼마나 인하하느냐 입니다. 바덴 강의 통행세는 사실상 우리의 생명줄이기 때문에 인하 폭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협상 카드를 준비해야 합니다.”
“협상 카드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란즈헬 백작이 이내 입을 열었다.
“카드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전쟁 준비를 해라.”
에반은 흠칫 놀랐다.
란즈헬 백작은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가 혼트 제국군 10만과 싸울 각오가 된 걸 보여줘야지. 정말로 전쟁이 벌어지면 에릭 국왕도 곤란할 테니 우리를 아주 몰아세우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첫 번째 카드다.”
말하자면 벼랑 끝 전술인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카드는 혼트 제국 쪽을 겨냥해야지. 내 말 이해했나?”
란즈헬 백작이 물었다.
‘날 시험하시는구나.’
에반은 긴장했다.
종종 란즈헬 백작은 이런 문제를 내며 그의 능력을 시험하곤 했다.
대답을 못하게 되면 쓸모가 없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가차 없이 쳐내는 것이다.
에반 이전에 란즈헬 백작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인물 역시 그런 식으로 은퇴 당했다.
에반은 치열하게 생각한 끝에 란즈헬 백작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예! 혼트 제국의 유목민족들에게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좋다.”
란즈헬 백작은 차갑게 웃으며 그 대답에 만족해했다.
에반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혼트 제국의 약점은 바로 통제 되지 않는 유목민족들.
육제후가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 반란이라도 부추기면, 혼트 제국 입장에서는 성가신 일을 당하게 된다.
“쉽진 않을 겁니다. 폐하.”
란즈헬 백작은 젊은 국왕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했다.
* * *
혼트 제국의 10만 군대는 바덴 강을 향해 진군했고, 육제후 역시 군대를 무장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등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큰 전쟁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전 대륙이 술렁였다.
일부 상인들은 병장기나 식량 등 전쟁 시 시세가 폭등하는 물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
내막을 전혀 모르면서 그저 한 몫 잡아보겠다는 투기꾼들이었다.
물론 내가 보기에는 파산을 향해 전력질주 하는 걸로밖에 안 보였다.
아무튼 그러한 시점에서 나, 제론, 패트릭 세 사람은 레던 왕성에 도착했다.
왕궁에 도착하자마자 에릭 국왕을 배알했다.
“어서 오라, 카록 쿤트 자작.”
에릭 국왕이 날 반겼다.
본래 내 작위는 자작. 혼트 제국 황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공로로 승작했다.
하지만 내가 이번 일의 주도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아직 남작이라고 속이고 있었다.
나는 에릭 국왕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제론과 패트릭도 마찬가지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뒤의 두 사람은 누구냐?”
“왼쪽은 일전에 말씀드렸던 제론 데커드이며, 오른쪽은 제 호위기사인 패트릭 콘돌이라고 합니다.”
“호오, 그런가. 두 사람 다 비범해 보이는구나.”
에릭 국왕은 내 호위 기사라는 패트릭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인재 욕심 많은 에릭 국왕이 미래의 용병왕 패트릭의 재능을 직감적으로 알아본 듯했다.
“과찬이십니다.”
“영광입니다, 폐하.”
제론과 패트릭이 겸양을 했다.
“아무튼 잘 와주었다. 아, 제론 데커드라고 했느냐?”
“예, 폐하.”
제론이 답했다.
“그대는 오늘부로 재상부로 배속되니 그리 알아라.”
“예, 폐하.”
즉석에서 재상부로 배정받아 듀론 후작의 휘하가 된 제론이었다.
사실상 루이와 함께 왕실의 참모가 된 셈이었다.
이렇게 바덴 강 통행세 인하 협상을 성사시키기 위한 팀이 결성되었다.
에릭 국왕, 듀론 후작, 루이, 제론. 그리고 나. 이 정도면 꽤 호화로운 멤버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5인은 오후에 바덴 강 문제로 회의를 가졌다.
제론은 즉시 혼트 제국이 오리엔 왕국과 손잡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에릭 국왕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군. 카르스 황제가 먼저 오리엔 왕국에게 손을 뻗칠 수도 있었어.”
루이도 동의했다.
“신빙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리엔 왕국과 연합한다면 10만 군대로도 충분히 전쟁을 치를 수 있으니까요.”
“으음. 이제 와서 혼트 제국이 이렇게 문제가 될 줄은 몰랐군요.”
듀론 후작은 신음했다.
나 역시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육제후를 상대하다가 뜬금없이 혼트 제국으로 대상이 바뀐 느낌이랄까?
설마 나 때문에 이 나라가 예정보다 일찍 멸망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릭 국왕이 물었다.
“만약 두 나라가 손잡는다면 어떤 식으로 공격해올 것 같은가?”
그 물음에 제론이 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타깃은 분명히 바덴 강 유역이 될 겁니다. 서로 바덴 강 유역을 나눠 갖기로 합의를 보겠지요.”
루이도 거들었다.
“동의합니다. 대륙 정복이 목적이라면, 바덴 강 유역을 먼저 장악해야 물자 보급이 용이해집니다.”
두 사람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전생 때 카르스 황제는 레던 왕실을 멸망시킨 후, 육제후를 쳤다.
바덴 강 유역을 장악한 후에야 비로소 오리엔 왕국 정복에 나섰다.
바덴 강 유역을 점령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덕분에 오리엔 왕국이 충분히 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저 무서운 카르스 황제를 상대로 영토의 절반을 뺏긴 걸로 그쳤지.
그런데 만약에 지금 오리엔 왕국과 손잡고서 바덴 강 유역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그거다!
“오리엔 국왕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다.
“어떻게 말인가?”
“오리엔 왕국은 분명 과거 대제국 시절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을 겁니다. 지난 내전 때 오리엔 왕국이 개입하려 했던 것을 떠올리면 알 수 있지요.”
“그렇지.”
내전 당시를 떠올리는지 에릭 국왕은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오리엔 왕국은 혼트 제국을 두려워할 겁니다. 특히나 카르스 황제가 제 2의 베잘리우스 대공을 꿈꾼다는 걸 알면 더더욱 말입니다.”
그렇다.
오리엔 왕국이 대륙 패권국이었던 시절을 기억한다면, 대제국에서 일개 왕국 규모로 추락하게 된 원인 또한 기억할 터.
바로 이사벨라 여왕의 남편이자 전쟁의 신이라 불렸던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 베잘리우스 대공에 의해 연전연패를 거듭한 끝에 몰락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오리엔 왕국 사람들은 베잘리우스 대공 얘기만 들으면 이를 갈거나 두려워한다.
“그 베잘리우스 대공의 대륙 패권 전략이 바로, 바덴 강을 통해 보급로를 확보해 대륙 중부로 곧바로 진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말에 듀론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바덴 강 유역에 진출하게 되면 우리는 물론이고 오리엔 왕국까지 위기인 셈이야. 그 점을 강조하면 오리엔 국왕이 만에 하나라도 카르스 황제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겠군.”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오리엔 국왕을 만나 설득하는 일은 카록 쿤트 자작, 그대에게 맡기겠다.”
“예.”
이로서 나는 오리엔 왕국에 다녀와야 하는 임무가 생겼다.
카르스 황제에 이어 오리엔 국왕이라니. 이번 두 번째 인생은 너무나 바쁘고 만만치 않다.
“그밖에도 왕실군에 계엄령을 내려서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좋을 것 같군.”
에릭 국왕의 말에 다들 찬성을 표했다.
혼트 제국이 10만 대군을 일으킨 이상 이쪽도 리액션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목표로 하는 통행세 인하치는…….”
우리는 계속 협상 준비를 해나갔다. 뛰어난 인재들이 공급되어서 그런지 더 회의가 원활해졌다.
회의가 끝난 후, 듀론 후작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나직이 말했다.
“정말 고맙네. 루이 콘체른도 그렇고 제론 데커드라는 저 젊은 친구도 식견이 훌륭하군. 폐하도 흐뭇해하시는 눈치였네.”
오랜만에 왕실에 젊은 인재가 들어와서 노재상은 흐뭇해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안목 있는 지도자라면 당연히 제론 데커드의 진가를 알아보아야 한다.
“아하하, 그럼 설마 제가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왔겠습니까?”
“과연 자네의 사람 보는 안목은 정말 탁월하군. 앞으로도 저런 인재가 있으면 알려주게.”
“흐흐, 글쎄요. 저만한 인물이 있으면 제 상단에서 채용해야죠.”
“어허, 내 뒤를 이어 재상이 되면 다 자네 사람들이 될 텐데 아까워하지 말게나.”
“아직 후작 각하의 후계자가 된다고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쯧쯧, 아직도 그 소린가? 고집불통 같으니. 이 늙은이는 절대로 젊은 인재를 놓치지 않네. 특히나 자네는 말이야.”
“아하하.”
나에 대한 듀론 후작의 믿음에는 그저 겸연쩍을 따름이었다.
은근히 나한테 부담을 준다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