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 회: 5권 - 1장. 상급 정령술 -->
인간은 그냥 지나치는 사소한 것에서도 정령들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최상의 적포도주인 퀸즈 블러드를 생각해보자. 정말 끝내주는 포도주다.
운디네가 맛을 개량시키면 세상에 다시없는 맛을 선사한다.
하지만 포도주를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이 퀸즈 블러드를 마셔도 똑같이 맛있다고 감탄할까?
아니다.
포도주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약간 달짝지근하거나 톡 쏘고 씁쓰레한 맛밖에 모른다.
포도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마셔야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다.
갇힌 인간의 평범한 시각과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정령의 감각의 차이도 이와 같았다.
상급 정령사가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바는 거의 없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상급 정령사는 정령과 감각을 공유할 줄 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굳이 부귀영화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열심히 욕망을 채우며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알기 때문이다.
10초가 지나고 노움과의 감각 공유가 끝났다.
나는 나의 정령들을 찬찬이 훑어보았다.
오늘처럼 절실하게 깨달아본 적이 없었다.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
내 정령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아이들인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소중한 선물을 받았는지를 말이다.
“고마워.”
나는 정령들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그때,
파아아앗!
뜬금없이 샐러맨더의 몸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엑! 진화?!”
갑작스런 현상에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 정령술이 거의 상급에 다다랐으니, 아직 하급 정령인 샐러맨더가 내 영향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래, 계약한 지 반년이 넘었으니 진화할 때도 됐지.
붉은 빛과 함께 샐러맨더가 폭발하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나 싶었다.
그러다가 다시금 뜨거운 열기가 한 곳에 집중되면서, 화르륵하고 커다란 불덩어리가 생성되었다.
커다란 불덩어리는 꿈틀거리며 모양이 변하였다.
팔다리가 돋아나고 머리가 쑤욱 튀어나왔다.
팔다리와 머리를 갖추자 이목구비 같은 보다 더 세밀한 외양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전생의 내 망나니 아들놈의 열두 살 때 모습으로 변했다.
정령의 진화는 정령사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샐러맨더의 진화로 인해 나 역시 변화를 맞이했다.
노움이 진화했을 때 나 역시 중급 정령사가 되었고, 운디네가 진화했을 때 내 정령친화력이 급격히 늘었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나는 정신적으로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만한 느낌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정령친화력이 급상승하는 현상이다!
마치 머릿속에 밝은 빛이 가득 차는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그런데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파아앗!
“노움?!”
놀랍게도 노움까지도 황금빛에 휩싸여서 진화를 시작했다.
이것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기연이었다.
나나 노움이나 상급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 상태에서 샐러맨더의 진화로 내 정령친화력이 대폭 상승했고, 그 영향으로 노움까지도 진화를 하는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얼떨떨함을 느꼈다.
노움은 수백 가닥의 황금빛 빛줄기로 마구 풀어졌다.
그렇게 흩어지나 싶었던 빛줄기들은 다시 털실 뭉치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진흙으로 인형을 빚듯이 꿈틀거리며 사람의 모양을 형성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완성된 모습은 14살쯤의 소녀의 형상을 띈 노움이었다.
아직 앳된 소녀티가 팍팍 풍기는 어린아이.
안전모와 커다란 삽, 그리고 큼지막한 눈동자는 여전히 귀여웠다.
사춘기에 들어서기 직전의 시기의 모습이라고 할까?
-아빠, 나 진화했어.
-크헤헤! 진화다!
노움은 날 보며 활짝 웃었고, 샐러맨더는 자신의 진화를 기뻐하며 기분 나쁘게 웃어댔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아빠도 진화할 것 같아.”
이윽고 나는 상급 정령으로 진화한 노움의 영향으로 정령친화력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머릿속에 밝은 빛이 가득 차오르는 듯한 충만감이었다. 크나큰 정신적인 만족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어둠 속에서 햇볕이 쏟아지듯, 밝은 빛이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신적인 쾌감에 휩싸여 나는 의식의 끈을 놓고 말았다.
* * *
음.
좀 이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기절할 정도로 좋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샐러맨더에 이어 노움까지 진화하는 바람에 나는 단숨에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
두 번 연속으로 정령친화력이 급증하는 탓에 정신적으로 큰 쾌감을 느꼈고, 그로 인해 정신까지 잃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줄리아와 시스가 저택 정원에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고 한다.
나는 몹시 기분 좋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고, 그 주위를 세 정령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정령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줄리아와 시스는 일단 날 침실로 옮겨놓고 이 소식을 쿤트 가문에 알렸다.
안 봐도 뻔하다.
내가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 집안은 한 바탕 난리가 났겠지.
덕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 줄리아와 시스는 물론이고 아버지와 아서 형님의 얼굴도 보였다.
“다들 웬일이세요?”
“웬일은! 줄리아에게 얘기는 들었다. 정말로…… 상급 정령사가 된 거냐?”
“예, 형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탄성을 터뜨렸다.
“벌써 상급 정령사라니! 아무리 천재라도 어찌 3년도 안 됐는데 벌써 저 경지에……!”
아버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검을 쥐고 사신 아버지였지만 아직도 꿈에도 그리던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순식간에 그에 준하는 경지라고 평가되는 상급 정령사가 되다니 황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령술은 검술과 단순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강해지기 위해 탄생된 검술과는 목적 자체가 다르니까.
“아무튼 정말 다행이에요! 쓰러져 있는 걸 처음 봤을 때는 뭔가 잘못되셨나 싶어서 놀랐다고요.”
줄리아의 말에 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날 걱정해준 거야?”
“당연하죠!”
내 물음에 줄리아가 대꾸했다.
순간 뜬금없이 의식 잃은 환자 놀이를 했을 때 줄리아가 내게 입맞춤을 하던 게 생각났다.
그래, 그런 건가.
나는 피식 웃고는 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착하네. 걱정해줘서 고마워.”
“처, 천만에요!”
줄리아는 얼굴을 붉히고는 대꾸했다.
그때 시스가 스윽 머리를 내밀었고, 나는 시스의 머리도 쓰다듬어줘야 했다.
그런 시스를 얄밉다는 듯이 쏘아보는 줄리아였다. 귀여운 것들.
그때 아서 형님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네가 상급 정령사가 되었다니 기쁜 일이구나. 생각 같아서는 이 사실을 널리 알려서 우리 쿤트 가문의 명성을 떨치고 싶지만, 네 생각은 어떠하냐?”
“으음. 저도 그게 고민입니다, 형님. 아예 성대한 파티를 열어서 이 사실을 널리 알리면 가문의 위명도 높아지고 그만큼 정치적으로도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만에 하나의 경우를 대비해 비밀로 해두는 편이 전략적으로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아서 형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혼트 제국의 카르스 황제가 오러 마스터인 할슈타인 백작을 비장의 카드로 숨겼던 것을 본받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하기야 네가 상급 정령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들 너를 경계하겠지. 가뜩이나 지금도 육제후의 표적이 되어서 암살 시도까지 당하지 않았느냐.”
두 가지 다 장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아버지가 내렸다.
“비밀로 해라. 우리 쿤트 가문은 지금도 충분히 명성을 떨치고 있지 않으냐. 거기다가 가문의 위명과 정치적 입지보다 중요한 것은 왕실의 안위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그 사실을 숨겨라. 상급 정령술이 아니어도 카록 너는 충분히 인정 받고 있지 않으냐.”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서 형님과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상급의 정령술을 터득했는데 전과는 어떻게 달라진 것이냐?”
아버지가 물었다.
“저도 아직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것은 바로, 노움!”
나는 노움을 불렀다.
-불렀어?
바닥에서 쏘옥 얼굴을 내미는 귀염둥이 노움. 나는 그런 노움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노움이 더 예뻐졌습니다.”
-헤헤, 나 예뻐.
노움도 배시시 웃으며 내 품에 안겨왔다. 몸집을 커졌어도 귀여운 건 여전한 노움이었다.
“…….”
“…….”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저런 놈이 상급 정령사냐는 눈초리였다.
그때, 나는 문득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버님, 제 성취를 확인하고 싶은데 한 번 겨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내 제안에 아버지는 흠칫했다.
“흐음! 다, 다음 기회에 하자꾸나. 요즘은 내가 기사들을 가르치느라 바쁘다. 네 기사인 패트릭도 이 애비가 지도하고 있지 않으냐.”
“저도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당황한 아버지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애비도 네가 상급 정령사가 됐다니 무인으로서 피가 끓는구나.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대련을 하자꾸나.”
아버지는 ‘다음’을 강조했다.
“지금이 그 기회가 아닐까요?”
“아직 훈련 시간인데 너무 지체했구나. 아서야, 가자!”
“예, 아버님.”
아버지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아서 형님과 함께 떠나버렸다. 주먹을 쥔 아버지의 팔뚝에 솟은 힘줄을 보고 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구나. 마침내 아버지의 폭력에서 해방인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