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회: 4권 - 5장. 패트릭 콘돌 -->
지금까지는 잠잠했던 탓에 다들 혼트 제국의 위험성을 망각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란즈헬 백작가는 달랐다. 그리고 레던 왕실의 에릭 국왕이나 듀론 후작도 그렇게 어리석은 인물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 그 승냥이 같은 혼트 제국을 끌어들여 위험한 짓을 벌인다니.
그런 모험을 말이다.
“모험 없이는 판도를 뒤집을 수 없지. 젊은 국왕이 대담한 책략가를 두었어. 절대 에릭 국왕이나 듀론 후작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다.”
“그 책략가 말입니다만…….”
“찾았나.”
“아직 확신은 못합니다만, 의심되는 인물은 있습니다.”
“누구냐.”
란즈헬 백작의 눈빛이 매서운 광채를 뿜었다.
“카록 쿤트 남작을 기억하십니까?”
“쿤트 가문의 삼남. 밀 4만 포대. 몰스 자작가, 페트람 자작가와 얽힌 영지전 때 협상을 맡았지.”
“맞습니다. 그가 최근 왕궁에 몇 차례 출입하고 있습니다. 명목상은 지난 흑혈병 때 왕실에 조언한 바가 있어서 국왕이 치하하기 위해 불렀다고 합니다만, 왕실에 자주 접촉하는 새로운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합니다.”
“흑혈병이 발생했을 때, 레던 왕실은 작셀을 대량 보유하고 있었지. 그게 카록 쿤트의 조언 덕분이었나.”
“예. 상인으로서는 수완이 대단한 자입니다.”
“카록 쿤트라…….”
란즈헬 백작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쿤트 가문.
요즘 그 이름이 거슬린다.
약소 가문이라고 가만 놔두었더니, 상승세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바스크 쿤트는 이미 용맹한 기사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첫째 아들 아서는 후디니 자작가를 등에 업었다. 둘째 릭은 뮤트 공작의 총애를 받은 검술의 천재이고, 게다가 막내 카록까지 탁월한 상재와 판단력으로 큰돈을 벌었다.
만약 바덴 강 문제까지 카록 쿤트의 소행이라면…….
눈치 빠른 에반이 물었다.
“제거합니까?”
“쿤트 가문도 이제 슬슬 한 번쯤은 쓴맛을 볼 때가 됐지.”
“다녀오겠습니다.”
란즈헬 백작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에반은 차가운 얼굴로 밖으로 나섰다.
* * *
“돌아가서 푹 쉬게. 가을이 되기 전에 다시 부를 테니, 그동안 충분히 재충전하는 게 좋을 걸세.”
“예, 후작 각하.”
듀론 후작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는 왕궁을 떠났다.
루이가 마중을 나왔다.
“이곳에는 홀로 오셨습니까?”
“응.”
나는 루이에게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자작이 되어서 루이와의 신분 격차가 커진 탓이다. 루이도 내가 하대하는 게 더 편하다고 했다.
“마차는 정령들이 몰면 되거든. 경호원도 필요 없고.”
“그래도 돌아가실 때는 용병들 몇 사람을 고용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째서?”
“고위 관리들은 눈치 하난 빨라서 자작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제후와 한 패니 육제후 역시 자작님을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흐음…… 그건 그렇지.”
생각해보니 그 말에 일리가 있었다.
루이도 내가 바덴 강 문제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추측해냈다.
똑똑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란즈헬 백작과 그 심복 에반 테일러 남작 역시 추측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날 제거하려 들지도 모른다. 경호원 없이 혼자서 다니는 걸 보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니 조심해서 나쁠 것 없겠구나.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럼 조심하십시오.”
루이와 작별한 뒤, 나는 마차에 올라 왕궁을 떠났다. 마차는 노움이 몰기 시작했다.
일단 용병길드로 가서 고용할 만한 용병들을 살펴봐야겠다.
그래.
루이를 발견했듯이, 용병들을 몽땅 살펴보면 훗날 이름을 떨치게 되는 새내기들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겠어?
아직 몸값 싼 풋내기들일 때 종신계약으로 낚는 거야!
미래의 인재를 미리 낚는 것.
이거야말로 미래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장사가 아닌가?
용병길드에 도착하자 그 앞에 무수히 많은 용병이 거지 떼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용병업계는 최악의 불황을 맞이한 상황.
전쟁이 없어 일거리가 줄었는데 대흉년과 흑혈병으로 경제까지 안 좋아진 상황.
간간히 생기는 일거리라고는 자잘한 몬스터 사냥이나 산적으로 업종을 전환한 용병들을 토벌하는 임무뿐이었다.
많은 용병이 먹고살 길이 없어 산적으로 돌변했다. 그럼 일거리가 많아지지 않겠냐고?
천만에.
경제가 어려워서 상행을 다니는 상인들의 숫자가 급감했다. 그러니 용병들은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마차를 발견하자 용병들이 거지 떼처럼 몰려들었다.
“나를 고용해주시오!”
“특별히 싼 값에 모시겠습니다!”
“저를 고용해주십시오!”
“우리는 둘이서 한 사람 값만 받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고 있는 노움에게 말했다.
“노움아. 어스 핸드로 치우면서 가자.”
-응.
노움은 어스 핸드 열 개를 소환해 앞을 막고 있는 용병들을 좌우로 밀쳤다.
거대한 흙의 손들이 튀어나와 밀치자 용병들을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마, 마법인가?”
“아냐! 저건 정령술이야. 봐봐, 마부석에 앉아 있는 저 꼬마 정령이잖아!”
“정령사가 용병길드에는 왜 온 거야?”
용병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난 덕에 마차는 용병길드 건물에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용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나에게 다가왔다.
“저를 고용해주십시오, 정령사님! 목숨 바쳐 모시겠습니다!”
“저, 저도!”
또 다른 용병 하나가 자극을 받았는지 앞으로 나와 소리친다.
그것이 신호였다.
“절 고용해주십시오, 정령사님!”
“친절과 충성으로 모십니다!”
“부르는 게 값!”
용병들이 또다시 나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만 둬! 이러다가 니들한테 압사당해 죽게 생겼거든?!
할 수 없구나.
이런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샐러맨더.”
-크헤헤헤! 소환했다! 나 소환했다!
허공에서 화르르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샐러맨더가 광소를 터뜨리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샐러맨더는 용병들을 스윽 보더니 소리쳤다.
-거지들! 불타는 거지들! 다 태우고 싶다! 크헤헤!
“흐아악!”
“저, 저게 정령이라고?”
“악마잖아?!”
거지 용병들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흐, 흑마법사였어! 정령사가 아냐!”
“속았다! 달아나! 흑마법사가 용병길드를 습격했어!”
“수도방위대에 신고를……!”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진 용병들.
뭐, 악마라는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지. 내 속눈썹을 태워먹은 흉악한 녀석이니까.
나는 여유롭게 용병길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 데스크에 남자 직원 셋이 있었는데 다들 나를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령사이십니까, 아니면 흑마법사이십니까?”
흑마법사라면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겠냐?
“나는 카록 쿤트 남작이다.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하겠다.”
내 말에 직원들은 움찔했다.
“현재 이곳 레던 왕성에 상주하고 있는 모든 용병들의 명단을 얻고 싶다.”
“모든 용병들의 명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좀 오래 걸립니다만…….”
나는 돈주머니에서 금화 세 닢을 던졌다.
그제야 얼굴색이 밝아진 직원들이 말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30분 안에 끝내면 그만큼을 더 주지.”
그리고 나는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직원들 세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록되어 있는 모든 용병의 이름을 체크하고 그중 레던 왕성에 상주하는 자의 목록을 따로 옮겨 적는다.
그동안 나는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가 노는 모습을 구경했다. 요 귀염둥이들은 이제 찻잔을 만들고 있었다.
자그마한 주전자와 찻잔 세 개를 완성한 정령들은 물을 따라 마시며 소꿉놀이를 했다. 샐러맨더는 불의 정령인 주제에 물을 마시더니 치이익! 하고 수증기를 뿜어댔다.
-맛없다! 키히히!
운디네는 자기 찻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마실래?
“물론이지. 고마워.”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운디네는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물을 마시자 시원한 느낌과 함께 청량감과 상쾌함이 들었다. 회복의 기운이 담긴 모양이었다.
“너무너무 맛있네.”
-맛있어?
“응.”
-그럼…….
운디네는 내 머리 주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그래그래.”
나는 운디네를 붙잡고 뽀뽀를 해주었다.
-나도! 나도!
“그래그래, 우리 노움도 해줘야지.”
노움에게도 뽀뽀를 해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샐러맨더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해주랴?”
-퉤!
화르륵!
“…….”
난 말없이 샐러맨더가 뱉은 불꽃을 밟아 껐다.
그렇게 30분이 지나자 기진맥진한 직원들이 나를 불렀다.
“여기 명단입니다. 레던 왕성에 머무르고 있는 모든 용병의 신상이 적혀 있습니다.”
“고맙군.”
나는 금화 여섯 닢을 꺼내 던졌다.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한 사람당 3레디나씩 벌었으니 좋을 수밖에. 뭐, 나한텐 이제 그냥 푼돈이지만.
마차 안에서 나는 명단을 쭉 훑어보았다. 이중에 아는 이름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전생 때도 상인이었다.
72년간 상인 노릇을 했으니 당연히 만나본 사람도 많아지고 인맥도 커졌다.
용병업계는 상행을 다니는 상인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당연히 내 인맥 중에는 알고 지내던 용병들도 있었고, 한 번 고용하려면 천금을 줘야 한다는 특급 용병들의 명성도 많이 들어보았다. 날리는 용병이었다가 결국 대가문의 수석기사로 스카우트된 용병들도 많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