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회: 4권 - 4장. 귀국 -->
늙은 마부는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별반 두려워하지 않고 응했다. 병사들은 마차 문을 열어 우리를 확인했다.
“실례지만 신분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랜달 스페이 백작.”
“카록 쿤트 남작.”
우리의 대답에 병사들은 얼굴빛이 변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병사들은 우리의 신분증을 가져가더니 위조인지 아닌지 한참을 확인한 뒤에야 돌려주었다.
“실례 많았습니다.”
“항상 이렇게 검문이 삼엄해?”
내 물음에 책임자로 보이는 장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뮤트 공작 전하의 지시로 언제나 철저한 검문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여러분들께서는 혼트 제국 방향에서 오셨기 때문에 더더욱 철저히 확인해야 했습니다.”
“알았어.”
“릭 쿤트님으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환영합니다.”
그리 말하며 장교는 성문을 열게 했다.
릭 형님에게 내 얘기를 들었나 보군. 일개 장교와도 이런저런 잡담을 나눌 정도로 친한 걸 보면 역시 활발하고 오지랖 넓은 릭 형님다웠다.
예고 없는 방문이어서 뮤트 공작을 만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할 듯했다.
하인에게 물어보니 그는 제자들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점심 식사 후 저녁까지는 꼭 훈련을 한다나?
그 말에 랜달도 몸이 근질거렸는지 수련장으로 향했다. 뮤트 공작의 허락을 받고 함께 훈련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사이 나는 마련된 객실에서 정령들과 노닥거리며 놀기로 했다.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
땅속에서 노움이, 허공에서 운디네와 샐러맨더가 나타났다.
살인적으로 귀여운 노움과 운디네는 나에게 안겼지만, 샐러맨더는 그저 뚱한 표정으로 날 노려볼 뿐이었다.
저 표정…… 내 전생을 떠올리게 한다. 망나니 아들과 똑같은 얼굴로 그런 표정 짓지 말란 말이야!
“넌 뭐가 불만이냐?”
-흥흥! 나 안 불렀다!
샐러맨더는 잔뜩 심통 난 목소리로 외쳤다.
아…….
레던 왕성이나 혼트 제국의 수도인 황도 티베리우스에 있는 동안에는 샐러맨더를 한 번도 소환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무슨 말썽을 피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삐쳤나보군.
“얘야. 그런 아니꼬운 눈으로 노려보지 말고 이 아빠 말 좀 들어보렴.”
나는 샐러맨더를 나직한 목소리로 타이르기 시작했다.
“너도 정령이니 내가 널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리고 네가 말을 안 듣고 마음대로 날뛰며 장난을 칠 때마다 내가 곤란해 한다는 것도 알 거야. 너는 그게 재미있어서 더욱 장난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내가 널 중요한 장소에서는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는 걸 명심해주렴.”
-…….
“이 아빠 말 알아들었지?”
그러자 샐러맨더가 입을 열었다.
-꺼억.
트림 대신 튀어나온 불길이 내 안면을 살짝 그슬렸다.
“으악!”
나는 깜짝 놀라 벌렁 뒤로 넘어갔다.
이, 이 자식이!
“얌마! 정말 맞을래?!”
-크헤헤헤! 불로 구운 얼굴!
나는 황급히 벽에 걸린 거울을 봤다. 다행히 온도조절을 했는지 화상은 안 입었다. 다만…….
“내 속눈썹! 크아악!”
샐러맨더의 트림(?)은 내 속눈썹만 죄다 태웠다. 덕분에 내 눈빛이 아주 요상해졌다. 필요 이상으로 눈이 말똥말똥해졌다고나 할까?!
“안 돼!”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고, 샐러맨더는 좋다고 하늘을 붕붕 날아다녔다.
-혼나!
화난 운디네가 물 채찍을 들고 쫓아오자 샐러맨더는 창밖으로 달아나버렸다.
화낼 기운마저 잃은 나는 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좌절했다.
곧 뮤트 공작을 만나야 한다. 에릭 국왕이나 듀론 후작 등도 조만간 마주쳐야 한다. 이 꼴로!
-괜찮아, 아빠?
노움의 물음에 나는 털썩 침대에 쓰러졌다.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아프단다.”
-내가 위로해줄래.
노움은 내 이마에 쪽 하고 입맞춤을 했다. 나는 노움을 끌어안고 침대를 뒹굴었다.
“어휴, 우리 노움 착하기도 하지.”
-헤헤, 나 착해.
하지만 노움이 아무리 귀여워도 내 속눈썹이 돌아오는 건 아니지……. 힐링포션으로 세수를 해도 소용없을 거야.
뮤트 공작이 내 얼굴을 보고 웃으면 어떡하지? 아아, 과묵한 성격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 대신 릭 형님이 옆에서 미친 듯이 웃겠군.
“하아…….”
나는 시름에 잠겨 낮잠을 청했다.
한 시간쯤 자다가 깨어보니, 정령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노움은 바깥에서 흙을 퍼 와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운디네가 물을 부어서 진흙을 만들자 그걸 치덕치덕 손으로 문대기며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치 도자기 만드는 장인마냥 열심히 그릇을 만드는 노움.
동그랗고 예쁜 그릇이 만들어지자 노움은 샐러맨더에게 손짓했다.
샐러맨더가 후욱 불길을 뿜어 진흙 그릇을 굽기 시작했다.
귀여운 내 새끼들. 이제 별 짓을 다 하며 노는구나.
노움은 샐러맨더의 불길에 그릇을 골고루 구웠다. 그리고 한 번 살펴보더니……,
-이건 아냐.
-응. 아냐.
-엉망진창! 크헤헤!
와장창!
노움은 그릇을 내동댕이쳐서 깨뜨렸다. 묘한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정령들이었다.
정령들이 그릇을 네 개쯤 만들고 그중 세 개를 부쉈을 때쯤, 하인이 찾아왔다.
“쿤트 남작님. 공작 전하께서 저녁 식사 때 보자고 하십니다. 지금 다들 훈련을 끝마치고 씻고 있습니다.”
“스페이 백작님도?”
“예. 그리고 릭 쿤트님도 식사에 참석할 겁니다.”
“알았어.”
* * *
보통 뮤트 공작은 세 끼 식사를 지하의 식당에서 백여 명의 제자와 함께 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단결을 위한 것으로, 전쟁 시 강한 조직력을 내기 위한 전통이라고 한다.
하지만 뮤트 공작의 또 다른 원칙은 시간 낭비 금지.
다른 모든 시간을 아껴서 1분 1초라도 훈련에 더 투자하는 것이 뮤트 공작의 철칙이었다.
때문에 중요한 용무로 손님이 오면, 뒤편의 별관에서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야말로 머릿속에 검과 전쟁으로 꽉 찬 양반이었다.
이런 삭막한 사람이 지난 번 아서 형님 결혼식에는 용케도 왔군. 세삼 릭 형님이 얼마나 뮤트 공작의 총애를 받는지 알 수 있었다.
하인들의 안내를 따라 별채로 움직였다.
별채의 식당에서는 이미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뮤트 공작, 랜달, 그리고 릭 형님이 보였다. 잡담 소리의 근원지는 랜달과 릭 형님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쿤트 자작에게 졌다고?”
“하아, 말도 마십시오. 아직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이가 갈릴 정도로 창피합니다. 범재에 불과한 아버님에게 지다니!”
“내가 보기엔 자네의 반사 신경이나 검을 다루는 본능은 쿤트 자작보다 더 뛰어나네. 이거야 자네 스승이신 공작 전하께서 더욱 잘 아실 테지.”
“당연하지요. 전 천재잖습니까.”
함께 훈련을 하다가 의기투합을 한 듯, 랜달과 릭 형님은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계속 떠들어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역시 경험이지. 목숨이 간당간당한 극단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땐 두뇌회전이 멈춰버리고, 오직 몸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야 하잖나.”
“그렇죠. 이것저것 계산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본능에 따라 움직여야지.”
“바로 거기서 실전경험이 발휘되는 거야. 많은 전쟁을 치러본 쿤트 자작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좋은지 이미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세. 자네는 아니지.”
“크윽, 역시 남자는 전쟁 좀 해봐야 하는군. 전 아직 변변한 전쟁 한 번 참전 못해봤습니다. 남들이 보면 계집애라고 놀릴 거 아닙니까?!”
릭 형님은 분하다는 듯이 이를 갈며 말한다. 뭐냐, 저 인류 평화를 위협하는 마초정신은.
시답잖은 잡담을 무시하고 있던 뮤트 공작은 날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왔군.”
두 마초의 잡담이 뚝 멎었다. 역시 뮤트 공작의 한 마디는 힘이 있었다.
“또 다시 뵙게 되는군요, 뮤트 공작 전하.”
난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릭 형님이 쾌활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어, 나의 사랑스런 동생!”
“그간 잘 계셨습니까, 형님? 스페이 백작님과 많이 친해지신 것 같네요.”
“아아. 아까 대련을 해봤는데 정말 훌륭한 실력을 갖추셨더군. 나만큼은 아니지만.”
“뭐야?!”
릭 형님의 오만한 발언에 랜달은 울컥했다.
“마치 자기가 이겼다는 듯이 말하는군?”
“시간이 좀 더 주어졌으면 제가 이겼을 게 당연하잖습니까. 전 젊어서 팔팔한데.”
“허, 전쟁 한 번 못해본 계집애 주제에.”
“뭡니까?! 비겁하게 남의 아픈 곳을!”
금방이라도 주먹다짐을 할 것 같은 두 사람을 뮤트 공작이 손짓으로 제지했다.
“앉게.”
“예.”
나는 빈자리에 앉았다.
뮤트 공작이 말했다.
“스페이 백작에게 이야기는 들었네. 하지만 과장되거나 추상적인 설명이 많아 알아듣긴 힘들었지.”
랜달은 겸연쩍어 머리를 긁적거렸다.
“말해보게. 황제는 어떤 인간이던가? 바덴 강을 둘러싼 자네의 전략도 설명하게.”
“알겠습니다.”
나는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을 둘러싼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했다.
긴긴 설명이 끝났을 때, 내 이야기를 한참 곱씹던 뮤트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바덴 강 통행세 협상에 왕실과 오리엔 왕국, 혼트 제국이 참여한다는 것이군.”
“네. 세 나라 모두 바덴 강의 높은 통행세로 피해를 입고 있으니까요. 육제후에게 강도 높은 압박을 가하기에 충분할 겁니다.”
“대담한 계획이군.”
“감사합니다.”
“하나만 묻지. 혼트 제국의 황제는 어떻던가. 자네 생각대로 순순히 놀아줄 사람으로 보였나?”
“순순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번 일은 혼트 제국 측도 이득이고…….”
“내가 예를 들어보지.”
뮤트 공작은 내 말을 끊었다.
“생사의 대결을 할 때, 나는 상대를 살피네. 아마 상대가 어떻게 공격해올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을 걸세. 오러 마스터란 검에 관한 한 완전한 존재이니까.”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하는 뮤트 공작의 목소리에는 오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듯했고, 우리도 그가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러 마스터인 뮤트 공작은 그럴 자격이 있었다.
“상대가 공격을 시도하는 순간, 그 타이밍에 맞춰 나 역시 움직이겠지.”
그렇겠지.
아버지조차도 공격도 못해보고 패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 묻지.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알고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피하기만 할까? 아니면 다리를 걸어 자빠뜨릴까? 아니면 검을 목 줄기에 슬쩍 들이대 죽일까?”
“그야 당연히…… 죽이겠지요.”
나는 뮤트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혼트 제국의 카르스 황제가 뭔가 더 위험한 장난질을 치지 않겠느냐는 비유였다.
“내 나이 서른 때 뮤트 가문의 신임가주에 올랐네. 그땐 혼트 제국과 사이가 몹시 악화되어서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때였고, 아버님은 갑자기 병들어서 은퇴하셔야 했지.”
뮤트 공작은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갑작스런 상황이라 당황한 나는 아버님께 물었지.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네. ‘전쟁에 대비해라.’ 내가 또 물었네. ‘전쟁의 위기가 끝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네. ‘전쟁을 대비해라.’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지금껏 전쟁을 대비하며 살아왔네.”
“…….”
“내가 가주가 오른 뒤 지금까지 혼트 제국에 맞서왔지만, 아직까지 대규모의 군사적인 접촉은 없었네. 자잘한 분쟁쯤은 있었지만, 혼트 제국에서는 그것을 신임 군 지휘관의 데뷔전 정도로 여기고 있더군.”
혼트 제국의 거친 성향을 미루어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적과 싸워 용맹을 떨쳐야 진정한 군 지휘관이라고 인식하는 듯했다.
“그런데 자네가 꾸민 이번 일로 혼트 제국은 처음으로 우리를 향해 대규모의 군대를 움직이게 될 걸세.”
“말씀대로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회에 무언가 더 위험한 짓을 하지 않겠는가? 그 똑똑하고 야심이 큰 황제라면 이번 기회를 그냥 넘길 것 같지는 않군.”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