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회: 4권 - 3장. 황제 카르스 -->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말해주마.
나는 마침내 말했다.
“혹시…….”
“말해라.”
“폐하께서는 폐하 본인이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순간,
“으음!”
오러 마스터인 할슈타인 백작이 크게 동요했다. 놀라움에 부릅뜬 눈으로 날 노려본다.
심지어는 카르스 황제마저도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저 감정이 메마른 카르스 황제가 말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흐르는 침묵만큼이나 나는 긴장했다. 설마 약속을 어기고 화를 내는 건 아니겠지?
카르스 황제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칭찬해주겠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크게 놀랐다. 어머니와 동생이 암살당한 이후로 이렇게 놀라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좋군.”
“어째서…… 놀라신 것입니까?”
“나를 이토록 완전히 꿰뚫어본 것은 네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레던 왕실에서도 등용하고 싶어서 안달할 정도의 인재라더니, 과연 대단한 통찰력이구나.”
그 말에 나도 놀랐다.
레던 왕실에서 몇 번이고 날 등용하려 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니?! 우리 레던 왕국을 상대로 정보 수집·분석을 철저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네 말에 틀린 점이 있다.”
“무엇입니까?”
“나는 내가 크로센트 베잘리우스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진실로 크로센트 베잘리우스의 환생이다. 나는 전생에서 못 다 이룬 대륙 정복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났다.”
역시나…….
카르스 황제의 삶의 원동력은 바로 저 광기였다.
스스로를 수백 년 전의 영웅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열등감을 딛고 일어나 무서울 정도의 역량을 발휘하며 대륙 정복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고대에도 저런 광기를 부린 정복자가 많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여기거나 신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그밖에도 민족 신앙에 근거한 숭상주의를 통해 자기 최면을 건 광기의 영웅들 말이다.
그런 자들은 대부분 크게 파멸하거나 혹은 엄청난 업적을 세웠더랬다.
아무튼 결론이 대충 나왔다.
첫째, 카르스 황제는 완전히 미친놈이다.
둘째, 카르스 황제는 레던 왕국을 반드시 침공할 것이다. 그에게 대륙 정복은 ‘운명’이니까.
“아무튼 나를 즐겁게 했으니 약속대로 상을 줘야겠군.”
카르스 황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말했다.
“상은 생각해보고 내일 주도록 하겠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어라.”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딱 멈췄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뭐 한 거야?!
“자, 잠깐, 아직 황제 폐하를 찾아뵌 목적은 아직……!”
“이제야 용건이 생각났나보군.”
카르스 황제는 히죽 웃었다. 예의 그 인형처럼 이상한 미소였다.
이곳에 온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이제 보니 나, 오늘 완전히 황제에게 휘둘린 셈이잖아?
“본론은 내일 듣겠다. 원래 식사도 할 겸 들어보고 돌려보내려 했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
“나는 너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카르스 황제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슈타인 백작의 호위를 받으며 떠나면서, 카르스 황제는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시녀들이 들어와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안으로 들어온 에르멜 시종장이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랜달과 함께 숙소로 갔다.
하아. 정말 힘든 하루였다.
* * *
이사벨라 궁전 7층의 좌측에 외국 방문단을 위한 객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를 마음에 들어 한 카르스 황제는 잘 대접하라고 한 마디 언급을 남겼고, 그 결과 가장 큰 객실에서 열 명의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인테리어도 야만적인 혼트 제국의 이미지와 걸맞지 않게 놀랍도록 세련되고 화려했다. 옷장, 침대, 의자 등 가구 하나하나가 고급스러운 목재를 잘 다듬은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창밖으로는 원뿔모양의 측백나무가 가득 밀집된 예쁜 풍경이 내려다보여서 운치 있었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예쁘장한 어린 시녀가 활짝 웃으며 물었다.
나는 없다고 손을 저으며 했지만, 랜달이 날 제지하더니 말했다.
“끝내주는 적포도주. 웬만하면 퀸즈 블러드.”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시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포도주를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랜달을 바라보았다.
“스페이 백작님…….”
“자네는 아까 맛있게 마시지 않았나. 그 퀸즈 블러드를 황제랑 둘이서만!”
“그 상황에서 술맛이 났겠습니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사실 뻥이다. 무진장 맛있었다. 역시 적포도주는 퀸즈 블러드더라.
아까의 저녁식사 때가 떠올랐는지 랜달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여기 있습니다.”
예의 예쁘장한 시녀가 적포도주 한 병과 유리잔 두 개를 가져왔다. 센스 있게도 볶은 콩을 벌꿀에 버무린 디저트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시녀가 물러나자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눴다.
“쿤트 남작.”
“예, 스페이 백작님.”
“아까 황제와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자네가 사신으로 지명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자네는 역시 정말 대단하더군. 아무도 자네처럼 그 미친 황제를 상대하지 못했을 것이네.”
“과찬이십니다.”
“아냐. 재상님께서는 자네가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더군. 누가 그처럼 황제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할슈타인 백작이 오러 마스터였다는 사실을 눈치 채겠는가?”
“할슈타인 백작은 노움이 알아보았지만요.”
“아무튼 난 자네에게 아주 감탄했네. 자네는 정녕 우리 왕실에 꼭 필요한 인재야.”
랜달은 내 손을 꼭 붙잡았다.
“폐하께는 자네 같은 인재가 꼭 필요하네. 그러니 왕실의 인물이 되어주게.”
“스페이 백작님…….”
이제 이 양반까지 날 꼬드기네.
내가 답했다.
“이미 듀론 후작 각하로부터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가?”
랜달이 눈을 빛냈다.
“결정은 미뤘습니다. 저는 제가 상술이 아닌 정치에 자질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번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의 성공여부로 가름해볼 생각입니다.”
“쯧, 뭐가 그리 생각이 많은지 모르겠군. 폐하나 재상 각하나 다 자네 능력을 알아봤으니 섭외를 하려는 것인데 그냥 예 알겠습니다, 하면 어디가 덧나나?”
이보쇼.
댁도 나처럼 미래를 알면 그런 소리 못 할걸?
혼트 제국에게 멸망당할 예정인 나라의 왕실에 입관하라니, 너무 어려운 문제가 아니냔 말이다.
포도주를 마시고 디저트로 먹으며 시간을 계속 보냈다.
“그런데 그 황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말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나? 난 그런 인간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세상에 감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
“제 생각에는 카르스 황제는 어릴 때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했고, 그 영향으로 저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쯧쯧, 안 됐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베잘리우스 대공의 환생이라니. 저 정도면 정말 미친 것 아닌가? 이거, 자네 예상과 달리 가만 놔둬도 혼트 제국은 알아서 망할 것 같은데? 황제가 저런 미치광이니까.”
“그냥 단순히 미쳤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지만, 그는 위험하게 미쳤습니다. 대륙 정복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치밀하게 차근차근 준비해나가고 있단 말입니다. 한 예로, 그는 레던 왕실이 저를 등용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레던 왕국에 대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허…… 듣고 보니 그렇군.”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어쩌면 카르스 황제는 우리를 죽이려 할지도 모릅니다.”
“뭣?!”
랜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 * *
“죽이시지요.”
할슈타인 백작이 말했다.
창백하고 퀭한 얼굴을 한 청년 황제는 창문 너머로 밤하늘의 달빛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밝은 달빛은 많은 음유시인에게 영감을 줄 만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글쎄.”
“폐하, 그자는 위험합니다. 고작 한두 시간 만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낼 정도로 무서운 통찰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죽여서 입막음을 하고 싹을 없애자?”
“예. 그자는 마치…….”
할슈타인 백작은 말끝을 흐렸다.
“말해라.”
“……마치 폐하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무명의 노기사로 지내다가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오러 마스터가 된 할슈타인 백작이었다.
무의 극의는 상대를 파악하는 것.
할슈타인 백작은 한 눈에 상대의 무(武)를 낱낱이 파악하는 그런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카르스 황제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눈에 상대의 속마음을 파악해내는 무서운 통찰력은 마치 마스터와 같았다.
그런데…… 레던 왕실의 비공식 사자로 온 일개 청년 남작에게서도 같은 능력이 보인다. 적국에 그런 인재가 있는 것은 오히려 오러 마스터보다 더 위험하다.
“난 그가 좋다.”
카르스 황제의 말에 할슈타인 백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너무 많은 걸 알았습니다.”
그동안 꽁꽁 숨겨왔던 카르스 황제의 야망을 알아챘다. 심지어 비밀로 하고 있던 자신의 정체까지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 레던 왕국은 두려움을 느끼고 침략에 대비하리라. 그땐 대륙 정복의 길이 더 험난해지는 것이다.
“폐하의 숙명을 위해서라도 부디…….”
기어코 그 말을 꺼내자 카르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숙명을 잊은 건 아니다, 할슈타인.”
그는 크로센트 베잘리우스의 환생.
대륙 정복은 반드시 이뤄야 할 그의 숙명이었다.
“송구합니다.”
“카록 쿤트는 처음부터 나에게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카르스 황제는 계속 말했다.
“나는 나에 대한 모든 사항이 알려지지 않게 비밀로 했다. 레던 왕국과 오리엔 왕국은 날 그저 나이어린 황제로만 알고 방심하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카록 쿤트는 처음부터 날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내 야망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상대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은 카록만이 아니었다.
카르스 황제 역시 카록을 살피고 때때로 힘든 질문으로 흔들기도 하며 계속 관찰했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내 야망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언젠가는 침공을 시도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어. 그러니 이제 와서 입막음을 해봐야 늦었다.”
“……그럼 더더욱 죽여야 하잖습니까. 그렇게 위험한 자라면…….”
“싫다.”
“폐하.”
“내일 판단하겠다. 그의 용건이 우리에게도 이익이 될지 들어보고 결단해도 늦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