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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86화 (86/529)

<-- 86 회: 4권 - 3장. 황제 카르스 -->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하는 카르스 황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마치 감정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처럼. 마법사가 인간처럼 정교하게 만든 골렘처럼 말이다.

악몽, 원한, 앙갚음…….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이런 단어들은 저 카르스 황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무슨 표정이지?”

“예?”

카르스 황제의 질문에 나는 또다시 당혹해졌다.

그는 몹시 관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방금은 어떤 생각을 한 것이냐? 표정을 읽을 수가 없군.”

“…….”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말해라.”

카르스 황제가 재촉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죄를 묻지 않겠다. 말해라.”

제기랄, 하는 수 없다. 나는 저 제정신 같지 않은 황제가 너무나 무서워졌다.

나는 겨우내 입을 열었다.

“폐하께 원한과 복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째서냐?”

“폐하께서는…….”

정말 이래도 되는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거냐?!

제기랄. 누가 나 좀 구해줘. 이 가시방석에서 날 데리고 나가달란 말이야!

“말해라.”

또다시 재촉.

나는 말했다.

“폐하께서는 감정을 못 느끼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등 뒤에서 랜달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황제는…….

히죽.

처음으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것은 진짜 웃음이었다.

“맞았다.”

“……?!”

솔직히 시인하자 도리어 내가 놀라버렸다.

“놀라움을 느끼게 하다니. 이 감정은 오랜만이다. 칭찬해주마. 한눈에 날 파악한 건 네가 처음이다.”

칭찬받았다.

허, 나 참.

“상을 주마. 오늘 이 자리에서 나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건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며, 네가 레던 왕실의 사자로서 가져온 용무에도 영향이 가지 않을 것이다. 설령 반말을 하거나 암살을 시도해도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이제 부담이 좀 줄었나?”

“예…….”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완벽한 면죄부를 받은 것이다.

황제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우왕좌왕하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딱―

카르스 황제가 손가락을 튕겼다.

바깥에서 시녀들이 갖가지 요리를 갖고 들어왔다. 직사각형의 넓은 식탁에 요리가 성대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황제에게 말했다.

“실은 아까 많이 먹어서 식욕은 별로 없습니다. 그보다 좋은 포도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 대담무쌍한 요구에 시녀들이 놀라서 얼어붙은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카르스 황제의 등 뒤에 서 있는 장년의 검사는 재미있다는 듯이 날 응시한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퀸즈 블러드를 가져와라.”

이번에는 내 등 뒤에서 랜달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난다. 그러고 보니 퀸즈 블러드의 원산지가 여기였지.

시녀 하나가 퀸즈 블러드 한 병을 가져와 유리잔에 따라주었다.

“운디네.”

-응.

허공에서 운디네가 나타났다. 면죄부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마음대로 정령을 소환하기로 했다.

내가 운디네를 소환했음에도 카르스 황제도 등 뒤의 장년 검사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술맛을 좋게 해줘.”

-응.

운디네는 퀸즈 블러드의 맛을 개량시켰다.

카르스 황제가 운디네를 빤히 바라봤다.

“저게 정령이군.”

“예.”

“노움도 불러봐라.”

어라? 내가 노움과도 계약한 걸 아는군. 수련장에서 기사들과 대련한 이야기를 벌써 전해 들었나?

“노움.”

-불렀어?

땅바닥에서 노움이 슉 튀어나왔다.

큼직한 눈망울을 말똥말똥하게 뜬 노움을 보니 불안감이 싹 가시고 훈훈한 기분에 휩싸인다. 아이고, 이 귀여운 것!

황제는 노움을 빤히 바라봤다.

노움도 황제를 빤히 본다.

노움이 물었다.

-아빠. 쟤가 황제야?

“쿨럭!”

랜달이 놀라 기침을 했다.

카르스 황제는 아무 감흥도 없는 눈길로 노움을 보며 말했다.

“네 정령들은 마음에 드는군. 얼굴에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당연하지.

우리 정령들은 착하고 순진해서 숨김이 없거든.

그런데 노움은 카르스 황제의 등 뒤에 있는 장년 검사를 보더니 다시 말했다.

-아빠. 저런 인간을 오러 마스터라고 하는 거야?

“……뭐?”

나는 놀라 되물었다.

노움이 말했다.

-몸 안의 힘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바위처럼 단단해. 전에 본 뮤트 공작이라는 인간하고 똑같아. 저런 인간을 오러 마스터라고 하는 거잖아. 그치?

“그, 그렇구나.”

그렇게 대꾸는 했지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어쩐지 범상치 않더라니, 오러 마스터였나. 노움에게 이런 눈썰미가 있을 줄은 몰랐다.

“오러 마스터…….”

랜달도 놀랐는지 중얼거렸다.

이제야 랜달의 무기 소지를 허용한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오러 마스터가 황제를 경호하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열 명의 랜달이 암살을 시도해도 저 초강력 경호를 뚫지 못할 것이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이건 한 방 먹었다고 해야 하나. 할슈타인 백작이 오러 마스터라는 사실은 비밀이었는데 알아차리다니. 정령에게 그런 통찰력이 있었군.”

저 장년 검사의 이름이 바로 할슈타인 백작인 모양이다.

오러 마스터라면 겉보기와 달리 나이가 예순도 넘었을 것이다. 아마 말년에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서 카르스 황제의 비장의 카드로 취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을 알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혼트 제국의 오러 마스터는 두 명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전생 때도 혼트 제국에 오러 마스터가 한 명 더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진 바 없었다.

정복전쟁 때도 철저하게 비밀로 하면서 은밀한 작전에 써먹었던 것이리라.

이제 보니 레던 왕국이나 오리엔 왕국이 혼트 제국군과 싸우면서 의외로 맥없이 패한 경우도 종종 있었는데, 이제 보니 저 숨겨진 오러 마스터의 존재 탓이었던 듯했다.

섬뜩하다.

끝까지 비밀로 하면서 숨겨진 비수 역할을 하다니.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고픈 명예욕을 억누르고 그런 일을 해낸 저 할슈타인 백작에게 경외감이 들었다.

할슈타인 백작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비밀로 하려 했던 게 들통 났으니 짜증날 만도 하지.

“그럼 네 정령이 어떤 재주를 부렸는지 포도주를 마셔봐야겠군.”

자신의 비장의 카드를 들켰지만, 카르스 황제는 개의치 않은 듯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나도 운디네와 노움을 돌려보낸 뒤, 술잔을 들었다.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역시 최고의 맛이었다.

한 번 맛을 보고 난 후에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맛이 더 좋아졌군. 몸도 편안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물의 정령이 가진 회복의 힘이 함유됐나.”

“그렇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지 자신의 몸의 반응에 매우 민감한 카르스 황제였다.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카르스 황제의 남은 수명은 앞으로 25년 정도다. 전생의 기억대로라면 한 8,9년쯤 후에 전쟁을 일으켜서 정복 전쟁을 이끌다가 병으로 죽는다. 마흔이 약간 넘어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긴 전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죽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래 몸이 마흔을 넘기는 것도 기적일 정도로 안 좋았던 모양이다.

저런 몸으로 대륙의 절반을 장악하다니……. 카르스 황제가 건강했더라면 대륙을 완전히 정복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니 마치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이 연상되는군. 그 선조에 그 후손이라 이건가.

……응? 가만.

나는 흠칫 놀랐다.

이제 보니 카르스 황제와 베잘리우스 대공은 공통점이 무척 많았다.

병약한 몸. 뛰어난 군사적 재능. 그리고 건강 탓에 대륙 일통을 이루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아쉬움까지 똑같다.

하지만 베잘리우스 대공은 이사벨라 여왕의 반려로 혼트 제국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

반면, 지금의 카르스 황제는 어릴 때부터 많은 독살시도로 건강이 크게 좋지 않고,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오른 인물일 뿐이다. 게다가 감정까지 느끼지 못하는 정신이상자다.

감정이 없는 것은 큰 괴로움이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화나지도 즐겁지도 않는 삶은 끝없는 공허함뿐이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문제점을 가진 카르스 황제는 크게 열등감을 느꼈을 것이다. 스스로가 싫어질 정도의 열등감을 말이다.

그런 괴로움을 카르스 황제는 어떻게 극복해냈을까? 어떻게 이겨내고 황제가 되어 대륙 정복에 나설 수 있었을까?

……설마!

나는 문득 한 가지 짚이는 바가 있어서 무서워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카르스 황제가 내 얼굴을 살펴보며 물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까?”

“말해라.”

“대답하기 싫습니다.”

“말해라.”

“대답하기 싫습니다.”

갑자기 홀 내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와 황제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카르스 황제는 처음으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런 반응을 보니 감정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카르스 황제가 말했다.

“나는 분명 네가 뭘 해도 용서한다고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감히 폐하의 안전에서 이렇듯 무례할 수 있는 것이지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용서할 것이다. 그러니 말해보아라.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척 궁금하다.”

나는 그런 카르스 황제를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보면서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거짓말을 하거나 감정을 숨기는 자를 싫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자신이 감정이 없어서, 타인이 거짓말하거나 숨기면 알아차리기가 힘든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 지금의 무서울 정도의 통찰력이 생겼으리라.

“어떤 말이든 용서하며 마음에 담아두지도 않겠다. 만약 날 즐겁게 한다면 상도 주겠다. 말해라.”

카르스 황제는 집요하게 나를 구슬리고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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