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회: 4권 - 3장. 황제 카르스 -->
콰르릉!
체드가 오러로 어스 월을 부수자마자, 물의 창 세 자루가 그에게 쏘아져나갔다.
“헛!”
체드는 어스 월이 부서지자마자 갑자기 물의 창들이 날아오자 놀란 듯했다.
“어스 핸드.”
-응.
노움은 흙의 손을 만들었다.
체드가 오러로 물의 창을 잇달아 막아내는 틈을 타, 나는 어스 핸드를 슬그머니 그의 뒤로 이동시켰다.
좋아. 이제 주의를 끌 미끼를 앞에 던져줘야겠군.
“노움, 어스 월.”
체드의 눈앞에 또다시 흙의 장벽이 솟아났다. 나는 계속 지시했다.
“부숴.”
-응!
와르르르!
흙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흙무더기가 체드에게 쏟아졌다.
“큭!”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흙을 뒤집어쓰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체드는 황급히 뒤로 굴러서 피하려 했다. 그 순간,
“기다렸다!”
나는 어스 핸드로 체드의 오른손목을 낚아챘다.
“허억! 무슨?!”
“뭐긴? 운디네! 워터 스피어 10연발!”
-응!
운디네는 나의 정령친화력을 대폭 가져가더니, 물의 창 열 자루를 만들어 체드를 향해 쏘아대기 시작했다.
어스 핸드에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목을 붙잡힌 체드는 물의 창들이 날아들자 하얗게 질렸다.
“으, 으아악!”
“운디네야, 다치게 하진 마렴.”
-응, 아빠.
물의 창은 모두 살짝살짝 빗겨나가 땅바닥에 구멍을 뚫었다. 하마터면 꼬치구이가 될 뻔했던 체드는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오른손목을 잡고 있던 어스 핸드를 없애주자 그제야 패배를 깨달았는지 체드는 만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정령사를 상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당황했소. 그러니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 진 게 아니오!”
자존심이 무척 강한 혼트의 기사답게 한마디는 하는 체드였다.
“다음번엔 더 좋은 승부가 되길 빌죠.”
체드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분명 2대 2 대결이었으니 이제 랜달을 도와줘볼까?
랜달은 실버를 상대로 무서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오러의 충돌이 갈수록 격렬해져서 폭발마법이라도 난사되는 듯한 폭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음, 끼어들면 두 사람 모두 화낼 것 같네. 그냥 구경이나 하자.
그런데 구경하던 기사들 몇 명이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온다.
“심심해 보이는군.”
“우리가 손님 대접을 너무 소홀히 한 모양인데, 원한다면 내가 상대해줄 수도 있소.”
“나는 어떻소?”
마침 나도 싸움이 싱겁게 끝났던 참이라 잘됐다 싶었다. 아직 먹은 게 조금도 소화되지 않았거든.
“좋습니다. 아무나 오십시오.”
그러자 기사들은 자기들끼리 상의를 하다가 그중 한 사내가 나섰다.
나는 이번에는 물 채찍을 만들어서 공격에 나섰다.
촤라락!
물 채찍을 얼굴을 향해 휘두르자 기사는 황급히 검으로 얼굴을 방어했다. 하지만 물 채찍은 제 멋대로 방향을 바꾸며 그의 왼쪽 발목을 휘감았다.
“허억!”
나는 물 채찍을 위로 휘둘러서 기사를 공중에 띄웠다.
“워터 스피어 10연발.”
-응.
운디네는 물의 창 열 자루를 만들어서 허공에 붕 뜬 기사를 향해 날렸다.
“크윽!”
물 채찍에 발목이 휘감겨 허공에 띄워진 기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오러가 실린 검을 급속도로 휘둘러 워터 스피어 7번 막았지만, 다른 세 자루가 그의 허벅지와 옆구리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부상당한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크으윽.”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는 신음을 하며 일어나려고 기를 썼다.
물 채찍은 생각보다 훌륭한 무기였다.
내가 휘두르는 방향과 상관없이 운디네의 컨트롤로 제멋대로 움직이니 예측불허다. 특히나 무기를 다루는데 정통한 기사일수록 이렇듯 상식에서 벗어난 공격에 대응을 못한다.
오러 마스터 뮤트 공작은 상대를 살펴서 동작을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는 것이 검술의 오의라 했다.
하지만 정령술은 다르다.
나를 살핀다고 내 공격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격은 정령들이 하니까.
이런 싸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면 저렇듯 실력과 상관없이 허망하게 패한다.
“제길, 졌소.”
기사는 너무도 간단히 패한 걸 치욕스럽게 여겼다.
“당신 역시 정령술을 처음 겪어봐서 낭패를 당했군요. 다음번에는 보다 좋은 대결이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두고 보시오. 다음번엔 기필코 설욕할 테니.”
다음이 있다면 말이야.
한편, 랜달과 실버의 대결은 여전히 치열했다. 하지만 우열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랜달이 밀리고 있었다.
점점 실버의 공격이 많아졌고, 랜달은 공격보다는 방어를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
랜달도 우리 아버지와 맞먹는 강자인데, 대단하군. 저 실버 타한 자작이라는 인물.
하기야, 군사강국인 이 혼트 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엠페러 나이트의 부단장이다. 당연히 저 정도 실력은 되어야지. 랜달이 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다행히 싸움은 랜달이 낭패를 당하기 전에 끝이 났다.
“이제 그만들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신 일행께서는 황제 폐하와 가질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랜달도 실버도 아쉽다는 듯이 무기를 거두었다.
“쳇. 이번에는 패배를 인정하지.”
랜달은 순순히 자신의 판정패임을 인정하며 투덜거렸다. 실버는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하지만 2대 2 대결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철저하게 우리의 패배라 할 수 있겠소. 이쪽은 정령술에 얼간이처럼 당해버렸으니까.”
“그럼 피차 설욕전을 기대해야겠군,”
“그때 가서 내빼지나 마시오.”
그 설욕전은 전장에서 이루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 웃으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 남자들의 세계인지도 몰랐다.
실버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 부하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시켜준 보답으로, 한 가지 충고를 해주지.”
“경청하지요.”
“황제 폐하와 대면하거든, 절대 거짓말하거나 감정을 숨기지 마시오. 그것이 설령 예의에 어긋나더라도 무조건 솔직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소.”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알게 될 거요.”
그리고 실버는 등 돌려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시작했다.
랜달과 나는 에르멜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수련장을 나섰다.
안내를 해주면서 에르멜 시종장이 말했다.
“저녁식사에는 두 분 다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단, 발언권은 레던 왕실의 사신이신 카록 쿤트 남작님만이 가집니다. 스페이 백작께서는 결코 한 마디도 하지 마십시오.”
“까다롭군.”
랜달은 입맛을 다셨다. 댁이 자유분방한 거거든?
저녁식사 때가 되기 전까지 우리는 에르멜 시종장에게 여러 가지 충고를 들었다.
혼트 제국 황실의 예법에 대한 설명이 거의 한 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설명을 모두 끝냈을 때, 에르멜 시종장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
“……하지만 이 모든 예법을 지키든 말든 사실 황제 폐하께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십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냐?
“아까 실버 타한 자작님께서 해주셨던 충고 기억나십니까?”
“아아, 뭐…….”
“그것만 명심하시면 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여기까지로군요.”
솔직한 태도.
그것만이 그 황제의 마음에 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군.
그래, 생각해 보니 전생 때 아버지도 황제와 대면했을 때 무례할지언정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셨지. 그랬더니 황제는 도리어 마음에 들어 하며 호의를 베풀었고.
미치겠군.
황제를 설득해야 하는데 무조건 솔직해지라니.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이 세상에 양심 있는 상인은 있어도 솔직한 상인은 없잖아?
혹시 실버나 에르멜 시종장이나 날 속이고 있는 거 아닐까? 잘 생각해 보면, 그들이 외국의 비공식 사신인 나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해줄 이유가 없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일단 부딪쳐보자.
시간이 되자 에르멜 시종장이 우리를 안내했다.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뒤따르던 랜달이 뭔가 생각났는지 질문했다.
“황제를 만나러 가는데 내 검을 따로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건가?”
“상관없습니다.”
에르멜 시종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며 답했다. 랜달은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이사벨라 궁전 3층 홀.
입구에서 에르멜 시종장은 더 이상 안내해주지 않고 우리에게 들어가라고 손짓만 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랜달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혼트 제국의 어린 황제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뚜벅…….
바닥에 마법이 설치됐는지 우리의 발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마도 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직사각형의 길쭉한 식탁.
그 끝의 상석에 한 청년이 앉아 있다.
그리고 청년의 등 뒤에 왜소한 체구의 장년 사내가 서 있다.
왜소한 장년 사내는 나이가 4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어떤 무장도 없이 편안한 평상복 차림이었지만 허리춤에 레이피어가 걸려 있었다. 덤덤한 표정이지만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 상석에 앉은 청년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년을 보고서 나는 내심 놀랐다.
병약한 청년.
체격은 작고 말랐다. 얼굴빛은 창백하고 초췌했다. 얼굴은 감정 하나 없는, 마치 석고상을 연상케 하는 무표정이었다.
카르스 혼트!
저 중병에 걸린 듯한 19세의 청년이 바로 그 악명을 떨치게 되는 혼트 제국의 황제다!
“어서 와라.”
무감정한 목소리로 나를 반기며 청년 황제, 카르스는 웃는다. 무감정한 얼굴표정과 완전히 따로 노는 이상한 미소였다.
그제야 퍼뜩 제정신을 차린 나는 인사를 했다.
“호, 혼트 제국의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앉아라.”
“예.”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랜달은 내 등 뒤에 섰다.
카르스 황제는 대뜸 물었다.
“왜 당황했느냐.”
이,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는 생각 끝에 솔직히 말했다.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보이셔서 놀랐습니다.”
“그렇군.”
카르스 황제의 한쪽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그러나 여전히 전체적인 얼굴 표정과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어색한 미소였다. 마치 인형이 인간을 흉내 내고 있는 듯 하달까?
“어릴 적부터 독이 든 음식을 많이 먹으면 이렇게 되지.”
카르스 황제의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렇게 끔찍한 과거를 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누구나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아픈 기억은 입 밖으로 잘 내뱉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왜 또 놀라느냐?”
카르스 황제는 또 날 보며 물었다. 내 감정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는 황제였다.
그래. 이런 뜻이었구나. 다소 무례해도 좋으니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충고는.
“아픈 과거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하셔서 놀랐습니다.”
“아파? 음……. 별로 아프지는 않다. 독을 선물한 사람은 남김없이 죽였거든.”
그래. 카르스 황제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형제들을 처자식까지 전부 죽였다고 했지. 악몽 같은 유년기를 겪게 한 원한을 철저하게 앙갚음한 것이다.
그런데,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복수를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던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