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회: 4권 - 2장. 왕명 -->
나는 계속 설명했다.
“오늘날 혼트 제국이 군사강국으로서 힘을 중시 여기는 풍조도 다 베잘리우스 대공의 영향 때문입니다. 혼트 제국 사람이 열광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이죠.”
“그런가?”
“예. 그러니 혹시라도 혼트 제국에서 베잘리우스 대공을 아냐고 물으면 이 이야기를 하면서 칭찬을 해주세요. 그럼 혼트 제국 사람들도 아주 좋아할 겁니다. 워낙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니까요.”
“오오, 알았네. 좋은 상식을 알았군. 나중에 시간이 되면 혼트 제국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봐야겠어.”
랜달도 기사답게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의 군사적 업적에 매료된 모양이었다.
그렇겠지.
전쟁이 무서운 재앙임을 알면서도 그에 흥분하는 것이 남자라는 족속들이니까.
혼트 제국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베잘리우스 대공의 건강 문제만 아니었더라면 대륙을 정복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지금의 혼트 제국 황실은 이사벨라 여왕과 베잘리우스 대공의 후손들.
선조의 못 다한 위업을 이루겠다고 혼트 황실이 벼르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의 어린 황제 역시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훗날 정복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고.
하지만 정말 베잘리우스 대공이 정말로 건강이 악화된 탓에 대륙 정복을 하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베잘리우스 대공은 그저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고 오리엔을 격파하고 대제국을 세웠을 뿐이다. 나라의 기틀이 세워지자 더는 전쟁을 지속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설사 그가 병으로 몸져누웠다 하더라도, 그의 반려인 이사벨라 여왕 역시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설 만한 역량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륙 정복은 너무나 많은 재앙만을 불러올 뿐인 허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 그 이름은 아주 중요한 키워드였다. 현 혼트 제국 황제의 심중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역시 상인이라서 그런가? 자네는 혼트 제국에 대한 상식을 많이 아는군. 또 내가 알아두면 좋은 게 있으면 말해보게.”
랜달은 할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어린 손자처럼 보챘다.
“예. 혼트 제국에 이르면 망토로 몸을 감싸서 무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세요.”
“엑! 그건 왜? 설마 신분 불문하고 전원 무기 소지가 금지되어 있는 건가?”
“아뇨.”
“그럼 왜?”
“혼트 제국에서는 무기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행위는 싸우자는, 혹은 싸우러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허어.”
“혼트 제국 황제를 알현하러 가면서 무기를 드러내놓고 다니면 흡사 선전포고라도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랜달은 급히 망토로 몸을 빙빙 둘러 허리춤의 검을 감췄다.
“또! 다른 것도 말해보게!”
“상대가 남자면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할 때도 절대 고개를 숙이지 마세요.”
“그건 왜? 고개 숙이는 행위가 ‘난 당신 안면에 박치기를 할 겁니다!’ 쯤 되는 것인가?”
“아뇨. 겁쟁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적에게 항복할 때만 고개를 숙이죠.”
“제기랄, 지나치게 극단적인 족속들이군. 정말 이번 협상 괜찮은 건가?”
“글쎄요.”
이제 댁이 모시는 국왕이 내게 얼마나 힘든 임무를 맡겼는지 슬슬 감이 와?
* * *
혼트 제국은 기존의 혼트 왕국인과 남부지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통합되어 탄생한 대제국이었다.
그러나 혼트 제국에 편입된 후에도 유목민들은 부족 단위로 뭉쳐 떠돌아다니는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았고, 그들에게 혼트 제국의 율법도 별 효력이 없었다.
때문에 혼트 제국은 나라 전체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하는 유목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자신들의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한 채 제국령이면 어디든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족은 때때로 화적떼나 다름없이 포악했기 때문이다.
늘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유목민들은 마을이나 영지를 지날 때마다 종종 약탈을 벌였다.
게다가 말을 타며 검을 휘두르는 유목민들은 화적떼보다 훨씬 무섭고 잔혹한 무장집단이었다.
그런 유목민들의 나쁜 습성은 황실로서도 통제가 불가능했고, 결국 영지는 유목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무력을 갖춰야 했다.
극악할 정도로 불안정한 치안 수준 때문에 혼트 제국의 사내라면 누구나 무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했다. 이는 혼트 제국을 군사강국이라 부를 정도로 전투적 성향이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혼트 제국은 강도 천국이다.
양떼를 몰고 지나가던 유목민들도, 농사짓던 마을 주민들도 필요하면 언제든 강도단이 된다.
“정말 미친 나라로군.”
랜달은 혀를 내둘렀다.
“혼트 제국에서는 약한 것이 죄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미친…… 힘이 도덕적 기준이 된다니. 이런 나라에서는 절대로 살고 싶지 않네.”
기사로서 명예를 숭상하는 랜달로서는 혼트인의 치졸한 행태가 비열하고 야만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혼트 제국을 야만인들의 나라라고 부르는 게 아닌가.
“이들도 처음부터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겠죠. 결국은 황실이 유목민들을 통제하지 못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서너 시간 전, 우리는 혼트 제국의 수도로 향하던 길에 잠깐 한 농촌 마을에 들렀다.
그런데 마을의 농부 사내들은 귀족임이 분명한 우리의 행색을 보자마자, 각자 집에서 무기를 들고 와 가진 걸 다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순식간에 농부에서 산적으로 업종을 전환한 그들의 행태에 우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물론 가진 걸 내놓는 대신 싸움을 택했다.
오러 엑스퍼트 상급의 강자인 랜달 스페이 백작이 중급 정령사인 나의 콤비 플레이는 농촌 마을의 사내들 백여 명이서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20여 명을 사살하고 마차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갔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 이상의 살상을 피하고 싶어서였다.
“오늘은 좀 지붕 아래에서 편안하게 쉬나 싶었더니만. 간만에 포도주도 실컷 마시고 싶었는데. 쳇!”
랜달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동네라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고, 그 탓에 많이 날카로워진 랜달이었다.
나?
나는 귀여운 정령들과 노닥거리며 들끓는 짜증을 다스리고 있었다.
보름간 내리 야영만 해봐라. 짜증이 안 나나.
아무튼 온갖 고초 끝에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혼트 제국의 수도, 황도 티베리우스.
혼트 제국의 건국 시조 티베리우스 혼트의 이름을 딴 이 대도시야말로 우리의 목적지였다.
성벽이 높고 해자가 깊어 난공불락의 요새를 방불케 했다. 정말인지 20만 대군이 밤낮으로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 같았다.
“드디어 도착했군.”
랜달은 치 떨린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는 혼트 제국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결심한 듯했다.
성문을 통과하면서 병사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헉!”
병사들은 깜짝 놀랐다.
그것은 레던 왕실을 대표해서 왔음을 증명하는 신분증이었다.
레던 왕국과 혼트 제국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놀란 것이었다.
병사들 중 최고 책임자로 보이는 장교가 말을 타고 달렸다. 아마도 황궁으로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는 것이겠지.
“이만 통과해도 되겠나?”
나는 병사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흠칫 놀라 길을 비켜주었다.
“예! 지나가십시오.”
우리는 성안으로 진입했다.
“자, 이제 그 황제라는 작자의 낯짝이나 구경하자고.”
랜달은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거리를 둘러보며 활기차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