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회: 4권 - 2장. 왕명 -->
그런데 듀론 후작은 그런 나를 높이 평가한다.
전생에서는 역사의 방관자로서 살았던 나를, 역사의 무대 위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것도 역사를 움직일 수 있는 차기 재상에 말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웠다.
막상 나 자신이 그 험악한 역사의 격류 위에 놓인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격류에 떠밀려 맥없이 휩쓸리지 않을까?
최선을 다해 살고 싶어도, 계속 도전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걸 어떡하느냔 말이다!
듀론 후작은 정말로 내가 그것을 감당할 만한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긴 고민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저의 어떤 면을 보시고 높이 평가해주신 겁니까?”
“세 가지를 들을 수 있겠군.”
듀론 후작은 잠시도 주저함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첫째로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이 대단했지.”
그야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내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둘째로 자네를 사람을 판단할 줄 알고 다룰 줄도 알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듀론 후작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계속 말했다.
“자네는 비전을 제시할 줄 알지. 일전에 레던 왕실이 부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 기억나는가?”
“예.”
“그때 자네는 거침없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보였지. 자네의 판단이 옳았느냐 틀렸느냐는 나중의 문제일세. 중요한 건 나에게 믿음을 심어주었다는 것이지.”
앞날을 예측한 것 말고도 두 가지나 더 장점이 나오다니, 나조차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그럼 정리를 해봄세. 앞을 볼 줄 알고 사람을 다룰 줄 알며 비전을 제시할 줄 알지. 재상이 되기에 충분한 덕목이 아닌가.”
“제가…… 정말로 그런 사람입니까?”
“실패할까봐 두려워하지 말게. 설사 자네가 능력 부족으로 일을 그르쳐서 세간의 비난을 받거든 이렇게 말하게. 이 필립 듀론에게 실패해도 괜찮다고 허락을 받았다고 말일세.”
순간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저 명재상 필립 듀론 후작이 날 이렇게 신뢰해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아니라, 그냥 나 카록 쿤트 자체를 말이다.
“그럼 좋은 답변을 기대하겠네.”
그리 말하고 듀론 후작은 떠나갔다.
나는 홀로 침대에 누워 많은 생각을 했다.
듀론 후작의 말이 뇌리에 박혀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실패해도 괜찮다, 라…….
잠시 후, 나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실패해도 괜찮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이 나라는 망한다.
내가 듀론 후작의 후계자가 되어 나라를 말아먹든 볶아먹든 어차피 본전 아니냐!
한 번 해보자.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는 이번 일로 판가름해보는 거다.
혼트 제국 황제를 설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말이다.
* * *
다음날.
결국 나는 임무를 받아들였다.
일단 하기로 결심을 하니 혼트 제국 황제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훗날 이 나라는 물론이고 대륙의 절반을 잡아먹어버리는 예비 정복자님의 낯짝을 미리 확인해 보는 것은 뜻 깊은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 듀론 후작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 외에도, 내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무가 있었다.
바로 뮤트 공작의 제자로서 검술을 연마하고 있는 릭 형님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에릭 국왕의 등용 제의를 받아들여 왕실을 위해 일하게 된다면, 그것은 쿤트 가문을 지키고 릭 형님의 죽음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혼트 제국의 어린 황제를 확인해봐야겠다.
적을 알아야 이기는 법 아닌가.
아무튼 혼트 제국으로 떠나기 전에는 몇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준비가 뭐냐고?
당연히 혼트 제국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바덴 강 통행세 협상도 해냈을 때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혼트 제국!
야만적인 군사국가라는 이미지가 매우 크고, 실제로도 그렇게 불릴 수밖에 없는 문화적 환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혼트 제국은 매우 큰 나라다.
땅도 넓고 인구도 많다. 그리고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이 늘 부족하다.
바덴 강 통행세 협상이 타결되면 혼트 제국으로의 시장 진출도 탄력을 받을 게 분명하다.
지금부터 미리 물량을 잔뜩 확보해뒀다가 그때 수출하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 정보를 아는 상인은 나 말고는 없을 테니까.
물론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미리 확보했던 물량이 모두 불필요한 재고가 되어서 날 압박할 테지만, 내가 보기에 이번 일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혼트 제국의 입장에서도 바덴 강의 통행세가 인하되면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다만 걸리는 점은 딱 하나.
혼트 제국의 황제.
그는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인물이라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좋은 돈벌이 기회니까 빨리 움직여야겠어.
나는 깃펜을 들어 종이에 서신을 빠르게 써내려갔다.
「줄리아에게.
돈은 열심히 벌고 있니? 너야 언제나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직원들을 너무 쪼지는 말렴.
본론을 말하자면, 혼트 제국으로 수출할 식량 및 생필품류를 확보해두도록 해. (이건 비밀이지만)조만간 혼트 제국으로 진출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자금은 2만 레디나 정도를 투입하는 게 좋겠다.
아무튼 포인트는 식량과 생필품이야.
그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둘 만한 상품이 얼마든지 있다는 건 알지만(군수품, 사치품 등), 그래도 무조건 식량과 생필품이다. 이유는 차차 알게 될 거야.
한센에게도 혼트 제국에 수출할 약재를 확보하라고 전해.
추신: 나 먼 데 다녀온다. 그동안 네가 우리 시스 좀 잘 챙겨주렴. 우리 시스는 소중하니까.
-네가 매우 존경하는 위대한 카록 단주님.」
음, 좋아. 명문이로다.
나는 사람을 시켜서 이 서신을 쿤트 자작령으로 보냈다.
그날 오후에 정식으로 레던 왕실의 사자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바덴 강 문제 자체가 비밀리 진행되는 프로젝트인지라, 나 역시도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다.
때문에 수행원은 경호원 한 명으로 한정했다. 수행원이 많아지면 남들의 이목을 끌어 육제후에게도 이 일이 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왕실 내부에도 육제후의 세력이 침투해서 에릭 국왕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아닌가.
대신 나를 수행하며 경호해주기로 한 인물은 바로 로열나이츠의 부단장인 랜달 스페이 백작이었다.
“여어, 오랜만이군. 전에는 나만 쏙 빼놓고 퀸즈 블러드를 잘 마셨다지? 맛있었나?”
“말해 뭐합니까? 아주 죽였죠.”
“크윽! 왜 난 안 불렀느냔 말이다!”
랜달은 내 목을 조를 태세로 광분하였다.
“그건 폐하께 항의하시지요.”
“항의했다! 씨알도 안 먹혔지만 말이야! 그래서 폐하와 오랜만에 대련을 할 때 충분히 앙갚음을 했지만!”
괜찮은 거냐. 이 나라 왕실의 권위.
마차는 60대 초반의 늙은 마부가 몰기로 했다. 입이 무겁고 경험도 많아 야영에 익숙한 노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쪽으로, 군사강국 혼트 제국을 향해 출발했다.
* * *
전생 시절, 나는 반평생을 혼트 제국 국적의 상인으로서 지냈다.
혼트 제국이 우리 왕국을 비롯해서 대륙의 절반을 싹쓸이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혼트 제국에게 복속된 뒤에도 레던 왕국은 총독부가 설치되어 통치를 받았을 뿐, 여전히 혼트 제국과는 별도의 땅으로서 인식되었다. 공식적으로는 혼트 제국령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레던 왕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완전히 융합되기에는 혼트 제국과의 문화적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문화적 차이가 확연한 땅을 억지로 흡수하려 들었다가는 현지인의 반발도 커진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는지, 똑똑한 혼트 제국 황제는 총독부에 의한 간접 통지로 방향을 잡았더랬다.
뭐,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 혼트 제국에 복속된 체제에서 살다 보니, 자연히 상인으로 활동하면서 혼트 제국에 대한 상식도 많이 주워들었다.
현재 레던 왕국에서는 혼트 제국이 야만인들의 미지의 땅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난 혼트 제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잘 안다. 어쩌면 나는 혼트 제국에 파견될 사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혼트 제국으로 가는 길은 매우, 정말 매우 심심했기 때문에 나는 랜달에게 내가 알고 있는 토막 상식을 들려주었다. 랜달도 호기심이 들었는지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혼트 제국은 본래 북서지방의 약소국이었죠. 당시는 오리엔 왕국이 대제국으로 중서부 일대를 지배하던 시절이고 우리 레던 왕국은 존재하지도 않던 시기죠.”
“아아, 그건 들어봤지. 그러다가 무슨 여왕이 등장해서 당시 대제국이었던 오리엔 왕국을 발라버리고 패권을 차지하지 않았나. 그거 듣고 여자가 참 당차구나 싶었다니까.”
“예. 그 여왕의 이름이 이사벨라 혼트였죠.”
“응? 이사벨라? 그 이사벨라 여왕 말인가?”
눈이 휘둥그레진 랜달에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퀸즈 블러드의 주인공인 그 이사벨라 여왕입니다. 신하가 술을 끊을 것을 권하자 차라리 내 피를 뽑아가라고 했던 그 애주가요.”
“오오! 역시, 술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큰 인물이라니까.”
은근슬쩍 자신을 큰 인물의 범주에 끼워 넣는 랜달 스페이 백작이었다.
“그리고 술을 끊으라고 권했던 신하가 바로 혼트 제국을 지금의 강대국으로 만들어놓은 전쟁의 신,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입니다.”
“베잘리우스 대공? 그 양반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당연히 알겠지.
기사가문에서 용병술과 전쟁사를 공부할 때 당연하게 등장하는 이름이니까.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은 본래 약소한 가문 출신으로, 운 좋게 이사벨라 여왕의 부마가 되어 출세한 남자입니다.”
“호오, 여자를 잘 만나서 벼락출세한 케이스군. 간혹 그런 친구가 있지.”
“예. 하지만 역사에는 이사벨라 여왕이 남자를 잘 만나서 불멸의 여제가 되었다고 기억되었지요. 전쟁터에 나서서 남부의 유목민족들을 복속시키고 오리엔의 대군을 격파해서 지금의 혼트 제국을 만든 대단한 남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