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회: 4권 - 2장. 왕명 -->
마차를 타고 레던 왕성으로 출발한 지 이틀째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이 솜처럼 사뿐히 대지에 내려앉나 싶더니, 어느새 벌판이 온통 새하얗게 펼쳐져 있었다.
때 묻지 않은 하얀 벌판을 보니 그 위에 멋대로 마차 바퀴 자국을 남기며 지나가기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나는 마부석에 앉아 정령들과 함께 풍경을 감상했다.
마차에 탄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럼 마차는 누가 모냐고?
그야 우리 귀염둥이 노움이 몰고 있지.
정령친화력이 급상승한 뒤로 노움을 비롯한 정령들을 하루 종일 소환해도 여유가 있었다.
마부 놀이에 심취한 노움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놀랍게도 마차를 끄는 말들도 노움을 잘 따랐다.
운디네는 내 머리 위에 앉아서 가끔씩 말들의 피로를 회복시켜주곤 했다.
샐러맨더는 내 무릎 위에 앉아서 난로 역할을 했다. 얘를 안고 있으면 뜨끈뜨끈해서 추위가 느껴지지 않거든. 다만 이 녀석은 눈이 펄펄 내리는 날씨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세 정령은 계속 말을 몰았다. 정령들을 소환해놓는데 소모되는 정령친화력보다는 자면서 회복되는 정령친화력이 더 높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말들은 종일 마차를 몰면서도 운디네에게 피로를 회복 받아서 너끈히 움직였다.
덕분에 아주 빠르게 레던 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빠, 도착했어.
마부가 된 노움이 말했다.
“응.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샐러맨더를 돌려보냈다. 말썽쟁이 샐러맨더가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성문에 이르자 병사들이 신원 확인을 위해 막아섰다.
병사들은 마부석에 앉은 노움을 발견하고는 벙 찐 얼굴이 되었다.
-우리 아빠는 카록 쿤트 남작이야.
열두 살 남짓한 소녀의 형상에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노움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병사들이 황당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마차 안에 있던 나는 신분증을 꺼내서 창밖으로 보여주었다. 이를 확인한 병사들은 황급히 인사를 하며 길을 비켜주었다.
노움은 계속 마차를 몰고 성 안으로 진입했다.
왕궁에 들어갈 때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카록 쿤트 남작이야.
마부석에 앉은 노움의 말에 왕궁수비대 소속의 병사들은 순간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령사로 알려진 나에 대하여 미리 언질을 받은 모양이었다.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폐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접객실에서 기다리십시오.”
-응.
나와 정신이 연결된 노움은 내 대신 대꾸하고는 마차를 몰아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흐흐, 이거 재미있네. 앞으로도 종종 노움을 내 대리인으로 내세워야겠다.
마차에서 내려서 노움과 운디네를 양쪽 어깨에 앉혀놓고는 왕궁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몇 번 드나들었던 터라 접객실에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접객실의 소파에 몸을 뉘이니 잠시 후 시녀들이 들어왔다.
“카록 쿤트 남작님 맞으신가요?”
“응.”
“폐하께서 곧 저녁 정찬을 함께 하자고 하시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목욕 시중을 들어드릴 테니…….”
“아아, 필요 없어.”
“네?”
당혹스러워하는 시녀들을 뒤로하고 나는 운디네에게 말했다.
“운디네. 샤워랑 빨래.”
-응.
운디네는 허공에 커다란 물 덩어리를 만들어 나에게 뒤집어 씌웠다.
촤아아악!
물 덩어리가 한 바탕 회전하며 내 몸을 깨끗이 씻기고 입고 있던 옷 또한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게 만들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시녀들에게 나는 말했다.
“차나 한 잔 갖다 줘. 얼 그레이로.”
“아, 네.”
시녀들은 후다닥 인사하고는 물러났다. 저렇게 놀란 표정들을 한 걸 보니 정령은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에릭 국왕이 나를 저녁 정찬에 초대하다니.
정찬은 왕실 일가가 모두 참석하는 자리인데……. 그러면 에릭 국왕의 왕비와 자식과도 안면을 틀 수 있는 자리가 될 터였다.
아마도 에릭 국왕은 나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날 등용하고 싶어서 본격적으로 작업을 걸 생각인 듯한데, 이거 고민이네. 저렇게 지극정성으로 등용 제의를 해오면 마냥 거절하기도 힘들어진다.
명재상 듀론 후작을 봐라. 에릭 국왕의 끈질긴 러브콜로 결국 저 늙은 나이에 재상 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인재를 얻기 위한 에릭 국왕의 노력은 그만큼 집요했다.
* * *
저녁 정찬은 에릭 국왕의 일가족과 듀론 후작, 그리고 내가 참석했다.
에릭 국왕의 일가족은 22세의 젊은 왕비와 두 살 된 어린 왕자 한 명이 전부였다.
시에나 왕비는 긴 백금발을 늘어뜨렸고 피부가 우유처럼 새하얀 미녀였다. 하얀 드레스는 하얀 피부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시에나 왕비는 옛날부터 레던 왕국 최고의 미녀로 명성 높았다. 전생 때도 아름다운 여인의 대명사로 유명했었지.
성품도 착해서 남을 배려할 줄 알며, 늘 싱그러운 미소를 띠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남자 여럿을 울렸다고 한다. 그녀가 에릭 국왕의 여자가 되었을 때 땅을 치고 울었다는 남자가 두 자릿수였다지 아마?
두 살 된 아들 지렌 왕자를 품에 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실로 아름다워서 나조차도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시스나 줄리아와 비교해도 한 수 위라고 생각될 정도의 미모이니 말 다 한 셈이었다.
말로만 듣던 저 미녀를 실물로 보게 되다니 이거 영광이다.
“조심하십시오, 폐하. 쿤트 남작이 왕비 저하께 눈독 들이는 모양입니다.”
듀론 후작의 짓궂은 농담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이런, 들켰습니까?”
에릭 국왕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부디 참아다오, 쿤트 남작.”
“저를 저녁 정찬에 초대하신 것이 실수이십니다, 폐하.”
우리의 대화에 시에나 왕비는 얼굴을 붉혔다. 역시 참 아름다운 여자다.
하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나를 초대한 저녁 정찬 자리에 듀론 후작도 참석시켰다는 것은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뜻이었다.
더군다나 자리 배치도 눈여겨봐야 한다.
드물게도 둥그런 원형 식탁을 써서 자리 배치를 자유롭게 했다.
에릭 국왕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나와 듀론 후작이 앉았고 왼쪽으로는 시에나 왕비와 지렌 왕자가 위치했다.
그런데 이걸 내 관점에서 본다면?
에릭 국왕과 듀론 후작이 양옆에서 나를 압박하고, 눈이 마주치는 바로 맞은편에서는 시에나 왕비가 포진한 상황. 남자라면 누구나 반하게 된다는 저 왕국 최고의 미녀를 내 정면에 앉혀놓은 것이다.
이 자리 배치가 뭘 뜻하는 걸까?
뭔가 무진장 어려운 부탁을 할 것 같은 태세였다. 양옆에서 채찍질하고 앞에서 어여쁜 시에나 왕비가 당근을 주면서 나를 구슬리는 형국이랄까?
“시에나. 쿤트 남작의 재주를 보고 놀라지 마시오. 오늘은 환상적인 포도주를 맛볼 수 있을 것이오.”
에릭은 시에나 왕비에게 말했다.
“어마, 정말인가요?”
시에나 왕비는 기대 어린 얼굴로 날 바라본다. 마주보는 자리라서 그런지 눈이 다이렉트로 마주쳐버린다.
예쁜 그녀의 얼굴을 맞대고 있노라니 절로 얼굴이 빨개질 지경.
왕국 최고의 기사가 뮤트 공작이라면 왕국 최고의 미녀는 시에나 왕비라는 말까지 있지 않은가.
정말 치명적인 미녀다.
나는 계속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서는 냉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피해, 대신 얼음 통에 담긴 포도주병을 응시했다.
전에도 마셔본 적 있었던 환상의 적포도주 ‘퀸즈 블러드’였다. 어느새 한 병 더 구한 모양이었다.
다들 기대하고 있으니 부응해줘야지.
“운디네.”
허공에서 수분이 뭉쳐 물 덩어리를 이루더니, 뿅 하고 운디네가 나타났다.
운디네는 소환되자마자 방긋 웃으며 다가와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어마.”
“꺄아아.”
시에나 왕비는 운디네의 등장에 놀란 표정을 지었고, 두 살배기 왕자도 눈을 반짝거리며 손을 뻗었다.
“운디네, 부탁해.”
-응.
내 생각을 읽은 운디네는 퀸즈 블러드를 향해 검지를 내민다.
촤라락!
병 안의 붉은 포도주가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회전했다. 침전물이나 맛을 흐리는 미세한 이물질을 모두 제거하고, 회복의 기운을 불어넣는 작업이 이어졌다.
그렇게 퀸즈 블러드의 맛이 업그레이드되는 동안, 듀론 후작이 운디네를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쿤트 남작. 내 기억에 저 정령은 지금보다 더 작았던 것 같네만, 아닌가?”
“아, 네. 알아보시는군요. 얼마 전에 중급 정령으로 진화했습니다.”
“오, 땅의 정령에 이어서 물의 정령도 중급 정령이 된 겐가?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우리의 대화에 에릭 국왕도 놀란 눈치였다.
“그 나이에 중급 정령을 둘이나 거느리다니. 남작 그대는 정령술을 익힌 지 얼마나 되었느냐?”
“이제 2년이 약간 넘었습니다.”
“허어!”
“그게 사실인가요?”
다들 경악한 얼굴이 된다.
그들의 반응을 보니 왠지 부끄러워졌다. 사실 내가 정령술에 쏟은 노력이라고는 우리 귀염둥이들과 뒹굴고 노닥거린 것밖에 없는데…….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니, 이제 보니 정령술의 천재가 아니더냐.”
에릭 국왕의 감탄에 나는 쑥스러워서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정령술이란 분야가 본래 재능이나 노력과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정령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할 뿐이었는데 운좋게 빠른 진전을 얻게 된 겁니다.”
“그러네요.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시에나 왕비는 운디네를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자자.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포도주를 즐겨보시지요. 언제까지 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하핫! 그도 그렇군. 어서 식사를 시작함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