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회: 3권 - 8장. 세 번째 정령 계약 -->
그날 밤.
나는 조용한 성의 지하 주류창고에서 계약을 시도했다.
정령석을 사발에 넣고 빻아 가루로 만든 뒤 물에 타서 끈적끈적한 액체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령 계약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벌써 여러 번 해본 일이라 이젠 능숙했다.
노움과 운디네는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하고 있었다.
“룰룰루, 기다려라 얘들아. 이 아빠가 셋째 딸을 만들어줄게.”
-셋째 딸?
-……딸?
노움과 운디네가 묻자 내가 답했다.
“그럼. 첫째랑 둘째가 있으니 이제 곧 새로 계약할 정령은 셋째지. 그럼 이제 우리 운디네도 언니가 되는 거야.”
-나, 언니 돼?
“그럼.”
운디네는 좋아서 안색이 환해지더니 붕붕 공중을 날아다녔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나는 그 정중앙에 서서 주문을 외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자연계의 위대한 정신이여, 나의 영혼의 부름에 응답해다오.”
파앗!
마법진에서 예의 밝은 빛이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새벽녘의 어둠을 찢으며 동이 터 오르는 것 같은 기운 찬 빛이었다.
벌써 세 번째 계약.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어떤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의 정령이 되어줄까?
시간이 흐르자 뿜어지던 빛이 사그라졌다. 나는 잔뜩 기대 어린 마음으로 숨죽여 지켜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반응이 이어지지 않았다.
설마, 실패인가?
조금씩 실망감이 찾아올 때였다.
-아?
운디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노움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왜들 저러지?
그 순간, 나 역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앞에 뜨거운 열기가 집중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끈거리는 열기에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리고…….
화르르륵!
눈앞에 한줌의 불꽃이 화르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순수한 색깔의 불꽃이었다.
“아!”
나는 그 불꽃의 고운 색깔에 매료되어서 멍하니 쳐다보았다.
불꽃은 팔다리를 가진 작은 아이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이구나!
나는 기대 어린 마음에 어린아이의 형상으로 변하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불꽃은 변화를 끝마쳤다. 그 모습은…….
“엥?”
나는 황당해졌다.
말도 안 돼!
불꽃은 열 살 남짓한 ‘소년’의 형상이 되었다. 여자아이가 아닌 것도 기가 막힌데, 더 웃긴 것은…….
-크헤헤.
전생의 내 망할 아들놈과 똑같이 생겨먹은 손바닥만 한 정령이 불꽃을 넘실대며 내게 히죽 웃어 보이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다 태워버릴 거야.
하며 불량하게 웃어젖히는 아니꼬운 사내놈.
영락없이 전생의 내 망나니 아들놈의 열 살 때와 판박이였다. 크기가 손바닥만 하고 온몸이 불덩이로 이루어진 것만 빼면 말이다!
이게…… 이게 뭐야?!
뺀질뺀질하게 생긴 녀석의 히죽대는 기분 나쁜 웃음이 내 전생에 맺힌 한과 울분을 자극했다.
-나 샐러맨더.
“부, 불의 정령인가.”
그제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진정하자. 저건 내 아들 새끼가 아니야. 불의 정령 샐러맨더야.
샐러맨더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불량스럽게 말했다.
-계약하자. 얼른 계약. 빨리.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령신이시여.
정녕 이 아니꼬운 새끼와 계약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안 해? 빨리 해, 계약. 빨리.
샐러맨더는 계속 땡깡을 부리듯이 재촉했다.
나는 마지못해 손을 뻗었다.
-키히히.
샐러맨더도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뻗었다. 서로의 손이 맞닿게 서로의 영혼이 이어지는 기묘한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의 마음.
모든 걸 불사르며 어둠 속에서 강인한 빛을 내는 태양과도 같은 화염의 의지.
그 무한한 열정에 나는 까닭 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계약이 끝났다. 샐러맨더는 나와 계약한 세 번째 정령이 되었다.
“노움, 운디네, 이리 와봐.”
나는 두 정령을 부른 뒤에 샐러맨더에게 말했다.
“자, 이제 네가 동생이고 노움과 운디네를 누나라고 불러야 돼. 알았어?”
-글쎄.
샐러맨더는 딴청을 피웠다.
그때 운디네가 나에게 물었다.
-누나?
“응. 샐러맨더는 남자아이니까 운디네는 이제 누나야.”
-나, 누나야?
“그럼.”
운디네는 기대 어린 눈망울로 샐러맨더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그러나 샐러맨더는 운디네를 아니꼬운 얼굴로 쏘아보았다. 그 반응에 운디네는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아, 안녕?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운디네.
그런데 샐러맨더는 대답 대신,
-꺼억.
하고 트림을 했다. 트림 대신 불꽃이 뿜어져 나와 운디네의 얼굴에 적중했다.
운디네는 울상이 되었다. 이내 훌쩍거리는 운디네를 노움이 토닥거리며 달래주었다.
이 새끼, 가여운 운디네한테 무슨 짓이냐?!
“이 녀석이! 너 누나한테 사과해!”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샐러맨더는 메롱 하고 혀를 날름 내밀고는 후다닥 달아났다.
“거기 서! 이 자식아!”
녀석은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도망가 버렸다. 무슨 놈의 정령이 정령사의 말을 안 듣는단 말인가?!
도로 물려! 이 계약 취소다!
* * *
다음날.
성내의 앞뜰은 아침부터 신나게 노는 정령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크헤헤헤!
샐러맨더는 사방팔방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불꽃을 쏘아댔다.
-하지 마! 하지 마아!
운디네는 샐러맨더의 뒤를 쫓아다니며 여기저기 떨어진 불똥을 물방울로 끄고 다녔다. 말썽쟁이 남동생의 장난을 수습하고 다니는 누나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 착한 노움은 그런 두 동생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묵묵히 진흙으로 성을 만들었다.
그런데 말썽 부리기가 질렸는지 샐러맨더가 노움에게 다가갔다. 샐러맨더는 노움이 빚어 만든 멋진 진흙 성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뭐야?
샐러맨더의 물음에 노움이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이건 성이야.
-성?
샐러맨더는 진흙으로 만든 성을 스윽 보더니,
화르륵!
성을 향해 불을 뿜어버렸다. 진흙 성에 불이 붙어 활활 탔다. 그걸 보며 샐러맨더는 킬킬거렸다.
-불타는 성. 크헤헤!
노움은 진흙으로 빚은 성에 불이 붙은 걸 보고 신기해서 멍하니 쳐다봤다.
-앗!
오히려 운디네가 깜짝 놀라서 진흙 성을 향해 물을 뿜었다.
치이익, 하고 불은 꺼졌지만 오히려 운디네의 물줄기 탓에 성의 모양이 망가져버렸다. 화들짝 놀라 우왕좌왕하던 운디네는 울상이 되어서 노움에게 사과했다.
-언니, 미안…….
-응, 괜찮아.
노움은 운디네의 머리를 스윽스윽 쓰다듬어준다. 맏언니다운 자상함이었다.
-크헤헤! 바보, 바보! 망가뜨렸다! 바보!
옆에서 얄밉게 놀려대는 샐러맨더. 아, 정말 진상이다.
-너! 너어!
저 착하고 순한 운디네도 까불거리는 샐러맨더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혼나!
하며 운디네는 물로 된 회초리를 만들어 휘둘렀다.
촤악!
-크에엑?!
물 회초리에 맞은 샐러맨더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나빠! 혼내줄 거야!
운디네는 물 회초리를 들고 무섭게 샐러맨더를 쏘아보았다.
물과 불은 상극. 거기다 운디네는 중급으로 진화한 정령이었다. 샐러맨더는 그제야 겁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일루 와!
-히이익!
달아나는 샐러맨더와 잔뜩 화가 나서 뒤쫓는 운디네.
운디네가 열심히 쫓아다니며 회초리질을 하자 샐러맨더는 비명을 지르다가 날 발견했다.
잽싸게 샐러맨더는 내 등 뒤에 숨었다.
-일루 와!
운디네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로 내 뒤에 숨은 샐러맨더에게 화를 냈다.
-아빠! 나 때린다! 누나가 나 때린다!
샐러맨더는 나에게 고자질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운디네에게 입을 열었다.
“운디네. 동생에게 그러면 안 돼.”
-크헤헤, 그러면 안 돼! 안 돼!
등 뒤에서 샐러맨더도 맞장구치며 진상을 떨었다.
-아빠…….
운디네는 서운해서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나는 웃으며 운디네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겨우 회초리 갖고 되겠니? 채찍으로 때려줘야 정신이 번쩍 들지 않니.”
-아, 응!
운디네는 활짝 웃었고, 반대로 샐러맨더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운디네는 내가 시키는 대로 물 채찍을 만들었다. 그래, 바로 그거지. 망나니 아들놈은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을 내줘야 정신을 차리거든.
그제야 내가 믿을 만 한 놈이 아니란 걸 깨달은 샐러맨더는 히이익!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거기 서!
운디네는 물 채찍을 사정없이 휘두르며 샐러맨더와 요란 법석한 추격전을 펼쳤다.
나는 흐뭇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여운 두 딸. 그리고 말썽쟁이 막둥이 아들. 다소 시끄럽긴 하지만 평화로운(?) 가족의 풍경이 아닌가. 여기에 토끼같이 예쁜 마누라만 있으면 완벽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운디네에게 손을 비비며 잘못을 빌고 있는 샐러맨더를 쳐다봤다.
저 자식을 볼 때마다 자기 어미와 함께 친정으로 가버린 전생의 친아들이 떠올라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정령은 본디 정령사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서 물질계에 소환된다고 했다.
정령은 거짓말을 안 한다.
그럼 내가 마음 한 구석으로는 내 친아들을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역시 레이라 때문인가.”
이제는 아서 형님의 아내가 되어서 나에겐 형수님이 되어버린 전생의 마누라를 떠올리며 나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서 형님과 레이라의 결혼식 때, 나는 한 가지 심란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전생 때의 내 아들이 이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아무리 밉다 해도 결국은 내 아들 아닌가.
내가 좀 더 가정에 힘쓰고 노력했더라면 그 아들 녀석도 어쩌면 더 착실한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반성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