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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75화 (75/529)

<-- 75 회: 3권 - 8장. 세 번째 정령 계약 -->

연금에서 풀려난 제론은 다시 일선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덕분에 영지의 행정은 원활해졌고, ‘몬스터 맵’의 효과로 숲에 나갔다가 죽는 영지민의 수도 대폭 줄어들어서 영지가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제론에게 영지의 일 대부분을 맡겨놓은 나는 바탄 성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허술한 목책을 강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뭐, 정확히는 우리 귀염둥이 노움이 신나게 삽질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이얍! 얍!

푹푹푹! 콰악! 콱!

어휴, 뉘 집 자식이기에 저렇게 삽질을 예쁘게 잘 할까?

혀로 입술을 핥은 노움은 거의 신들린 듯이 삽질을 했다. 저렇게 즐겁게 삽질을 할 수 있다니, 노동계의 귀감이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삽질을 푹푹 할 때마다, 목책이 박힌 땅이 튼튼하게 굳었다. 이는 목책이 힘에 밀려 쓰러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시키는 작업이었다.

이틀에 걸쳐서 목책을 전부 강화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조금 무리일지라도 목책 앞에 해자처럼 구덩이를 파기로 했다.

깊이는 2미터 정도로 하기로 했다. 트랩처럼 5미터 깊이로 쭉 팠다가는 정령친화력의 소모가 너무 클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방어력이 크게 증강될 터였다.

하지만 글쎄……, 결국 이건 성벽이 아니라 목책이다.

오크들이 침공해오면 방어에 주력한다는 단순한 전술로는 이길 수 있다 하더라도 영지민들의 피해가 너무 클 것 같았다.

또 하나 문제는 이곳 말고도 마을이 두 군데 더 있다는 것이다. 이곳만 방어하고 다른 마을들은 그냥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슬슬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오크 부족도 겨울이 오기 전에 식량을 약탈하러 덤벼들 거다. 이제 슬슬 어떤 전략을 수립할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같은데.

성으로 돌아간 나는 군장과 경비대장, 딘을 불렀다.

“결론은 나온 거야?”

“예, 영주님”

군장이 나서서 말했다.

“상의를 한 결과 두 가지 대책이 나왔습니다. 첫째는 다른 두 마을의 주민들을 이곳으로 피신시킨 뒤 방어에 치중하는 전략입니다. 영주님의 본가인 쿤트 자작가에서 원군을 보내줄 때까지만 버티면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입니다.”

“그렇군. 다른 대책은?”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오크 부족을 선제공격하는 겁니다. 정규군과 딘 용병단, 그리고 자경대 중에 날래고 활을 잘 쏘는 사냥꾼들만 추려서 공격에 나서는 겁니다.”

“그건 조금 과감한데?”

“예. 다만 그냥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숲에 불을 질러서 오크들의 부락까지 태워버리는 전술입니다.”

“불을 지른다고?”

지나치게 과감하잖아?!

“자칫 잘못하면 이곳까지 불이 번지잖아?”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오크들의 부락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합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 개울이 흐르고 있지요.”

“바람은?”

“바람은 북서풍이 불고 있어서 불길은 반대로 번질 겁니다.”

“으음. 그렇다고는 해도 자칫 잘못하면 숲을 홀랑 태워먹겠는데. 우리 영지에는 숲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영지민들이 많잖아?”

“저희도 그게 우려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혹시 영주님께서 계약하신 정령은 몇 명입니까?”

“응?”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야 땅의 정령인 노움이랑 물의 정령인 운디네와 계약했지.”

그러자 다들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가장 중요한, 불이나 바람의 정령은 없군요.”

“혹시나 다른 정령과 계약을 시도해보실 수는 없으신지요?”

경비대장이 재차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시도해 봐야겠는데.”

그러자 잠자코 있던 딘이 말했다.

“사실 남작님께서 바람의 정령이나 불의 정령을 소환하실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가 쉬워집니다. 화공을 써서 불길이 오크들의 부락에 집중되도록 조절할 수 있죠.”

“한 번 시도는 해볼게.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두 명 이상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는 상당히 드물다고 하니까.”

“예.”

회의를 마친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으음.

노움과 운디네.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놔두고 또 다른 정령과 계약해야 한단 말이야?

나야 상관없지만 애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 한번 둘러내서 물어봐야겠다.

“노움, 운디네.”

-불렀어?

슝 하고 활기차게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노움.

허공에서 이슬이 맺히듯이 나타난 운디네도 내 뺨에 입맞춤으로 인사했다.

나는 두 정령을 내 무릎 위에 앉혀놓고 말을 꺼냈다.

“얘들아. 내가 말이야. 너희들의 동생을 새로 하나 계약할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동생? 좋아!

노움은 내 말이면 그저 좋다고 할 따름이었다. 운디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나 언니?

“그럼. 운디네한테도 동생이 생기는 셈이지.”

운디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 주위를 붕붕 날아다녔다. 운디네 역시 찬성인 듯했다.

근데, 이거 뭐 가족계획을 앞두고 딸들한테 의향을 묻는 아버지 같잖아?

하긴, 우리 노움과 운디네는 내 딸이나 다름없지. 어휴, 귀여운 내 딸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노움과 운디네에게 말했다.

“얘들아. 이제부터 날 아빠라고 불러볼래?”

-……아빠?

-아빠가 뭐야?

“응, 세상에서 가장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관계지. 나에게 너희가 가장 소중하다는 뜻이야.”

-응! 할래! 나도 주인님, 아니 아빠가 제일 소중해!

-……아빠.

노움과 운디네가 아빠라고 불러주자 훈훈한 감동이 밀려온다.

“아이고 내 딸들!”

나는 두 정령을 끌어안고 부비부비 뺨을 비벼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아아앗!

운디네의 몸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설마?!

-진화다! 진화한다, 진화!

옆에서 노움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도 노움이 진화할 때 한 번 겪어본 상황이라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처음 계약을 했을 때처럼 운디네는 빛에 휩싸인 채 몸이 자잘한 물방울로 분해되었다. 그리고 분해된 물방울들이 다시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한 그 광경을 나는 그저 넋을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나로 뭉쳐진 커다란 물방울이 진흙처럼 꿈틀꿈틀 형태가 변하더니, 이윽고 열두 살 남짓한 소녀로 변신했다.

푸른빛이 흐르는 몸은 노움과 비슷한 크기였고, 물결치는 것 같은 풍성한 머리칼은 발끝까지 내려왔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에 탱글탱글하니 귀여운 눈망울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운디네!”

-아빠.

중급 정령으로 진화한 운디네는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전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디네는 나에게 날아와 내 이마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리고 운디네의 입술이 닿는 순간,

번쩍!

일순간 머릿속에서 밝은 빛이 가득히 폭발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처음 정령과 계약할 때 서로의 영혼이 이어질 때와 동일한 경험이었다. 난 노움의 진화 때 이미 겪어봤기에 이게 무슨 현상인지 알 수 있었다.

정령사와 정령이 진화하면 서로의 영혼의 교감이 깊어진다.

한마디로 노움처럼 운디네 역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게 됐다는 뜻이었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디네가 진화했듯이 나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머리가 맑아지고 생생한 활력이 샘솟았다.

노움이 말했다.

-주인님, 아니 아빠의 힘이 강해졌어!

“그래?”

운디네가 진화하자 그 영향이 나에게로 이어져 내 정령친화력이 급격히 상승한 모양이었다.

전에도 노움이 중급 정령으로 진화할 때 나 역시 중급 정령사로 발전했었다. 그때와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빠의 힘이 두 배로 늘어난 것 같아.

노움의 말에 나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사랑스러운 노움이랑 운디네랑 더 오래오래 함께 놀 수 있겠네?”

-에헤헤, 나 자랑스러워.

노움이 배시시 웃었다. 운디네도 내 말에 기뻐하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기 같았던 운디네도 노움처럼 열두 살 남짓한 외모로 진화하니, 정말인지 무럭무럭 자라는 딸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좋아. 이 기세를 타서 오늘밤 정령계약을 시도해보자.”

운디네의 진화로 정령친화력까지 급상승하자 나는 자신감이 생겼다.

정령술의 세계에 입문한 지 2년 반이 흐른 시점. 그 짧은 시간에 나는 벌써 거의 상급의 경지를 바라보는 중급 정령사가 되었다.

이제 보니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정령술에 대한 재능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난 누구보다도 내 정령들을 사랑해줄 자신이 있거든.

내 생각을 읽었는지 노움과 운디네도 행복하게 웃으며 내 품에 안겨왔다.

하아. 둘만 있어도 이렇게 행복한데, 한 명 더 생기면 어떻게 될까? 그럼 사랑스러운 딸이 셋…….

상상만 해도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오늘 밤 당장 계약을 시도해봐야겠다. 마침 정령석은 전에 레던 왕성에서 사둔 게 몇 개 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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