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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73화 (73/529)

<-- 73 회: 3권 - 7장. 제론 데커드 -->

나는 제론이 연금되어 있다는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은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한참동안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날 일 시키고 싶거든 포도주를 한 병 더 가져와라!”

집무실 안쪽에서 젊은 남자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경비병들이 황당해서 대꾸했다.

“아까 점심식사 때도 한 병이나 드셨잖습니까!”

“그 정도로는 취할 수가 없잖아!”

“이익! 취해서 어떻게 일을 하려고……!”

“멘 정신으로 일할 수 있을까보냐?! 술 가져와 술!”

나 참.

경비병은 또 뭐라고 쏘아주려다가 날 발견하고는 퍼뜩 놀랐다.

“여, 영주님!”

영주님이란 말에 집무실 안도 조용해졌다.

“문 열어 봐.”

“예!”

바짝 얼어붙은 경비병들은 즉각 문을 열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연녹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단정한 미남자가 보였다. 상당히 수려한 외모라 놀랄 정도였는데, 나이는 2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언제 진장 피웠냐는 듯이 미남자, 제론 데커드는 잠자코 나를 응시했다.

“왕실 관리인 제론 데커드 준남작이라고 합니다. 카록 쿤트 남작님을 뵙습니다.”

“반가워, 데커드 준남작.”

“그냥 제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 그럼 너도 날 카록이라고 불러.”

“예, 카록님.”

“그동안 바탄 영지를 잘 이끌어왔더군.”

“…….”

제론은 삐친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아주 경탄했어. 앞으로도 나를 도와서 영지를 잘 이끌어줘.”

그 말에 제론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이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카록님께서 오신 이상 저는 왕실로 복귀해서 다음 근무지를 배정받을 테니까요. 이 영지가 위기이긴 하지만 우리 왕국에서 손꼽히는 거상에다가 뛰어난 정령사이기도 하신 카록님이라면 잘 헤쳐나가리라 믿습니다. 혹여나 저를 카록님의 휘하로 등용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봉급을 많이 주셔도 사양합니다!”

“흐응, 그래? 그런데 이를 어쩌나?”

“……?”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제론에게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폐하께 서신을 보냈거든. 너를 계속 내 밑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조만간 이곳 바탄 영지에서 날 보좌하라는 근무명령서가 하달될 거야.”

제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그게 무슨!”

“이래봬도 내가 지금 국왕 폐하랑 좀 친해. 재상이신 듀론 후작 각하와도 친하고. 웬만한 부탁은 다 들어줄걸? 내 밑에서 우리 영지를 위해 계속 일해 주어야겠어. 영지민들도 널 좋아하던데 잘 됐지?”

“그건…… 그,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제론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저더러 얼마나 더 고생을 하라는 겁니까?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대흉년에 흑혈병에 득시글거리는 몬스터에…… 전 그냥 편안한 삶을 만끽하고 싶단 말입니다. 이제야 고생이 끝났나 싶었는데 또 여기서 계속 일하라니요? 아아악! 도저히 못 참겠습니다! 제가 어째서 야반도주를 하려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제론 폴만’이라는 웃기는 가명으로 위조 신분증까지 만들면서까지 말입니다!”

“응?”

“데커드라는 성까지 갈아치우면서까지 도망가려고 했던 이유는 딱 하납니다. 그냥 절 좀 내버려두십시오! 대충대충 해먹으며 살고 싶단 말입니다!”

“아니, 방금 제론 폴만이라고……?”

제론 폴만?

지금 제론 폴만이라고 한 거야?!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왜냐고?

제론 폴만.

훗날 오리엔 왕국의 마지막 장벽이라 불렸던 영주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제론 폴만 자작.

20대 후반의 나이에 오리엔 왕실의 관리로 발탁되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고, 오리엔 국왕의 눈에 들어 자작의 작위와 함께 영지를 하사받았다.

영주가 되자마자 제론 폴만 자작은 군비를 확충하는 등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그때 대륙 정세는 아직 혼트 제국이 잠자코 힘을 모을 때였지만, 제론 폴만 자작은 앞날을 내다보았다.

언젠가 혼트 제국이 일어나 레던 왕국을 치고 기세를 몰아 오리엔 왕국까지 침공할 것을 예측하고 미리 대비한 것이다.

결국 제론 폴만 자작의 예견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혼트 제국의 어린 황제가 괴물 같은 야심을 드러내며 레던 왕국을 단숨에 휩쓸어 버리자, 제론 폴만 자작은 그 식견을 인정받아 오리엔 왕실의 통상부상서에 올랐다.

오리엔 왕국은 후일 혼트 제국의 거센 침공을 맞아 3분의 1에 달하는 영토를 잃었지만, 간신히 나라를 지켜내었다. 그 과정에서 제론 폴만 자작의 공로가 가장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30대 후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통상부상서라는 고위 관직을 내려놓고 하야했다.

곧이어 18살의 젊지만 유능한 귀족 청년 하나를 양자로 받아들이더니, 자신의 영지와 재산을 모두 물려주고는 본인은 얼마쯤의 재산만 갖고 은퇴해버렸다.

그 뒤로는 63세의 나이에 병사할 때까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은퇴생활을 즐겼다. 왕실이나 다른 제후들로부터 등용 제의를 계속 받았지만, 권력욕이 전혀 없는 제론 폴만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한가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제론 폴만이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이라고?

나는 황당해져서 제론 폴만, 아니 제론 데커드 준남작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도망치는데 성공했구나!

전생 때, 그는 데커드란 성을 버리고 달아나 제론 폴만이란 이름으로 오리엔 왕국에서 살았던 것이다.

나는 결심을 했다.

이 녀석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전생의 행적으로 이미 입증되었다.

오리엔 왕국으로 달아나게 놔둘 까보냐?

자, 어떻게 구슬려줄까?

나는 잠시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멋대로 자네의 입장을 결정지은 점은 미안하군, 사과할게.”

“…….”

“그동안 이 척박한 영지를 이만큼이나 지켜온 건 정말 훌륭한 공로야. 그만큼 네가 동분서주하며 힘쓴 덕분이겠지. 그러니 이제 그만 달아나고 싶은 마음도 이해는 돼.”

“추켜세워 주셔도 제 마음을 변함없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 왜 너는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스스로도 지칠 만큼 열심히 일을 해야 했을까?”

“…….”

“그것은 네가 진심으로 이 영지민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옛?”

놀란 제론에게 나는 계속 말했다.

“진심으로 영지민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랐기 때문에 너는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해왔던 것이다. 네가 달아나려 했던 것은 스스로에게 오크 부족으로부터 영지민을 지켜줄 수 있는 힘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런 압박감에 못 이겨 도망치고 싶었겠지. 다 이해해.”

나는 놀라 할 말을 잃은 제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이제 걱정하지 마. 내가 왔다. 내가 올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이 영지에 닥친 모든 위험을 다 제거하겠다. 약속하마.”

“……그래서 저더러 뭘 어쩌란 말입니까?”

“나는 한 가지 약속을 해주겠다. 더 이상 너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힘들어하지 않게 해주겠다고 말이야. 나와 함께라면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아도 돼.”

제론은 크게 마음이 흔들린 듯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좋아, 거의 넘어왔다. 나는 재차 말했다.

“그러니 내게 기회를 줘. 올해 겨울이 지날 때까지만 나와 함께 일을 해줘. 그 뒤에는 달아나든 다른 곳으로 근무지를 옮기든 네 뜻대로 하게 해줄 테니.”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제론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카록님. 올해 겨울까지만 카록님과 함께 일하겠습니다. 당신의 옆에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내는지 똑똑히 지켜보고 판단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잘 부탁드립니다.”

제론과 나는 서로 악수를 했다. 환영한다, 제론 폴만 자작, 아니 제론 데커드.

***

일단 영지는 지금의 체계를 그대로 유지했다.

제론 데커드를 영주 대행으로 임명하여서 영지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고, 군사적인 업무는 군장과 경비대장, 그리고 딘에게 맡겼다. 딘은 용병단의 단장에 불과하지만 풍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일은 다 맡겨뒀으니, 나는 이제 놀아……가 아니지. 나는 나대로 일을 하기로 했다.

부임한 지 이틀째 날 정오,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바로 어제 나에게 촌장 직을 박탈당한 로제 전 촌장과 신임 촌장이 된 타이렌이라는 사내였다.

“타이렌입니다. 직업은 사냥꾼이고 어제 어른들의 천거로 과분하게도 촌장 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과연.

타이렌은 40대 초반의 팔팔한 사내였다. 사냥꾼답게 몸이 튼튼하고 심지도 굳어 보였다. 나도 사람 좀 볼 줄 아는데, 그는 웬만한 위기에도 눈 하나 깜짝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새 촌장을 아주 잘 뽑았군.

나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로제 전 촌장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많이 섭섭하겠군.”

“아, 아닙니다!”

로제 전 촌장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어제는 채찍질을 했으니 오늘은 당근을 줘서 달래줄 차례였다.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인은 노인만의 연륜과 지혜가 있지. 로제 자네가 지금까지 마을을 잘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그대 같은 노인이 촌장으로 제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긴박한 시기지. 위기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을 발휘하기에는 자네는 너무 늙었지.”

“실로 그 말씀이 지당하십니다.”

“사실 어제 매섭게 꾸짖은 것은 기강을 바로 잡는 것 외에도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내 결정을 가혹하다 여기지 말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군. 비록 촌장 직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자네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는 정신적인 지주이니, 때때로 사람들이 두려움에 흔들릴 때 그들을 바로잡아다오.”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 분부를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로제 촌장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어제 당한 한이 모두 풀린 얼굴이었다.

나는 타이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지? 네가 새 촌장이 된 건 나의 순간의 화풀이가 아니라, 현 영지의 상황이 너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여,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타이렌도 감복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준 뒤 돌려보냈다.

두 사람은 마을 주민들에게 나에게 들었던 말을 해줄 것이고, 나에 대한 영지민들의 민심이 좋아질 것이다.

그날 저녁은 제론과 함께 식사를 했다. 나는 그의 능력을 신뢰하기 때문에 되도록 가까이 두고 친분을 다지고 싶었던 것이다.

제론은 줄리아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입만 열면 끊임없이 이런저런 문제점이 튀어나왔다.

“우리 영지의 문제는 비단 오크 부족만이 아닙니다. 오크 부족이 없어지면 이 숲 일대에 다른 몬스터들이 서식하겠지요. 그런데 이 영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사냥꾼이나 약초꾼 같은 숲을 활보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음, 그렇군.”

“몬스터 토벌을 아무리 다녀도 몬스터는 끊임없이 번식을 해대지요. 더욱이 기사도 없으니 강한 몬스터가 나오면 병사들의 피해도 커지고요. 덕분에 숲을 다니며 생활하는 영지민들도 죽어나갑니다. 하여간 이것저것 골치입니다. 자, 카록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렵니까?”

제론은 나에게 퀴즈를 내듯이 물었다.

“사실 나에게는 지금 이 영지에 처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능력은 있어. 돈지랄로 용병들을 잔뜩 고용해 숲 일대를 싹 쓸어버리면 되거든.”

“그럼 그렇게 하시지 그러십니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잖아. 한 번 쓸어버려도 언젠간 몬스터가 다시 번식을 시작할 테고, 그때도 또 거금을 투입할 수는 없어.”

“그럼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씨익 웃었다.

“보여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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