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회: 3권 - 6장. 바탄 영지의 위기 -->
시스는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아이니까 그렇다 쳐도, 줄리아 얘는 대체…… 진짜 날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아, 그래.
생각해보니 줄리아는 우리 상단의 2인자다.
원래 조직의 2인자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일인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알랑방귀를 뀌는 법이지.
분명히 내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애교를 부리는 걸 거야. 암, 그렇고말고.
“얘야, 밥 좀 먹자.”
하며 나는 줄리아를 떼어냈다.
“칫.”
줄리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런데 시스는 여전히 내 품을 떠나지 않는다.
시스는 귀여워서 떼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줄리아가 발끈했다.
“우이 씨! 왜 항상 나만 차별해요?! 시스, 이리 나와. 단주님께서 식사 하신 다잖아.”
줄리아는 시스를 내게서 떼어냈다.
무섭구나, 2인자의 질투심.
***
나의 카록 상단은 두 개의 사업체를 운영한다.
하나는 카록 병기점.
또 하나는 카록 약재 상회.
곡물 장사는 이제 그리 큰돈이 안 되기 때문에 접어버렸다.
카록 병기점은 줄리아에게, 카록 약재 상회는 한센에게 경영을 맡겼다.
한센은 뭐 원래 어리바리했던 녀석이지만 약재상집 아들에 여장부인 어머니도 있으니 그럭저럭 잘 운영하는 듯했다.
그리고 줄리아는…….
걔는 정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카록 병기점을 키워나갔다.
물론 뮤트 공작을 이용해서 홍보효과를 얻은 내 역할이 컸지만, 쏟아지는 주문에 대응해서 장인과 도제를 더 고용하고 생산 설비 확충에 들어가는 등 발 빠르게 움직였다.
회계 담당인 시스는 줄리아에게 붙여주었다.
카록 병기점의 규모가 워낙 커서 사무인력도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스가 줄리아를 돕자 줄리아의 일처리가 더욱 빨라졌다. 다른 건 몰라도 계산 하나는 엄청나게 빠른 시스였다.
나?
논다.
대흉년, 영지전, 흑혈병 등 굵직한 위기는 모두 끝났으니 가문에서도 내 도움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상단은 아랫것들이 알아서 잘 한다.
물론 ‘난 열심히 놀 테니 일은 너희에게 맡긴다!’ 라고 하면 들고 일어날 사람이 몇 있다. 예를 들면 불만쟁이 줄리아라든지.
그래서 나는 새로운 사업 및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저택에서 놀기 시작했다.
2년간 내가 일궈낸 사업적 업적이 상당했기 때문에 다들 아무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다들 내가 혼자서 사업 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난 저택 앞마당의 정원에서 의자에 앉아 한가롭게 책을 읽었다.
노움과 운디네는 흙장난을 치고 놀았다. 노움이 진흙으로 성을 만들고 운디네가 성벽 주위에 물을 졸졸 흘려보내 해자를 만들었다.
아아, 이게 바로 한가롭고 행복한 은퇴 생활인가?
귀염둥이 정령들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나는 계속 책을 읽었다.
‘혼트 제국 기행’이란 책인데 혼트 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고 그림까지 곁들여 있어서 제법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놀던 노움과 운디네가 지겨워졌는지 내 주위로 쪼르르 다가왔다.
-주인님 뭐해?
“책 읽지.”
-재미있어?
“응, 그럭저럭. 하지만 물론 우리 노움과 노는 것보다 재미있지는 않지!”
그러면서 나는 노움을 번쩍 들어서 뽀뽀를 해주었다. 꺄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노움.
운디네가 내 머리 주위를 뱅뱅 돌았다.
“그래그래, 우리 운디네도 좋지!”
운디네 역시 끌어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운디네도 이제 노움과 비슷한 크기로 성장해 있었다.
정령과 정령사는 서로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중급 정령사인 나의 영향을 받아 운디네의 성장 속도로 무척 빨랐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운디네도 중급 정령으로 진화할 듯했다.
어휴, 무럭무럭 자라라, 내 새끼들.
그런데 나의 휴식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작님!”
“왜?”
가문의 병사 하나가 허름한 옷차림을 한 중년 사내와 함께 왔다.
병사는 허름한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이자가 남작님을 찾습니다.”
“누군데?”
“남작님의 영지민이라고 하는데…….”
“내 영지민? 나한테 영지가 어디 있다고…….”
“있잖습니까! 작년에 바탄 영지를 하사받으셨잖습니까! 크흐흑, 잊고 계셨던 겁니까? 저희는 오매불망 영주님이 부임하시기만을 기다렸는데…….”
중년 사내가 뜬금없이 통곡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아참.
나 영지 있었지.
밀 3만 5천 포대를 왕실에 판매한 대가로 받은 작위와 영지. 그 영지가 바로 바탄 영지였다. 인구도 얼마 안 되는 콩알만 한 영지라서 깜빡 잊고 있었다.
“그래그래, 이제 생각났다. 나 영주였지. 그런데 그게 왜?”
“언제 영지에 와주시나 해서…….”
“그래, 너희를 깜빡 잊고 있었던 건 미안하군. 그런데 너희가 오라면 내가 가야 하나?”
내 말에 중년 사내는 흠칫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인계를 받기 전에는 왕실 관리가 계속 관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으니 아무 문제없을 텐데,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와서 날 찾는 거야? 난 여러 가지로 바쁜 몸이다.”
“여, 영주님. 문제가 있으니까 이 미천한 것이 여기까지 찾아왔지요…….”
중년 사내는 울먹거렸다.
사실 정령들과 노닥거리며 한가하게 놀던 참이라 나는 내심 양심에 찔렸다.
“문제?”
“왕실 관리님께서 일을 팽개치고 도주하다가 붙잡혔습니다.”
“……잉?”
뭔 소리야?
영지를 관할하던 왕실 관리가 왜 도망을 치고 누구한테 붙잡혀?
중년 사내가 말했다.
“힘들다고 도망치시는 것을 저희들이 붙잡아서 집무실에 가둬…… 아니, 모셨습니다. 우리를 다스려주시는 분이 없으면 저희는 어찌 살란 말입니까?”
……헐.
***
중년 사내의 이름은 한스였다. 참 평범하고 순박한 이름이다. 딘 용병단 중에도 한스가 있었지.
한스의 설명은 이러했다.
왕실 관리로 파견된 제론 데커드 준남작이라는 인물은 젊은 나이에도 유능해서 지금껏 바탄 영지를 잘 관리해왔다고 한다.
그의 부임 이후 피폐했던 영지가 그나마 살 만해졌다고 하니 꽤 유능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대흉년, 흑혈병 등 잇달아 위기가 닥치면서 과로로 쓰러지는 일이 많아졌고, 틈만 나면 술을 진탕 마시며 ‘곧 끝난다. 영주가 부임하면 다 끝나……’ 하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영주(나)가 1년이 지나도 도무지 영지를 인계 받으러 오질 않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영지에 새로운 위기까지 닥치자 제론은 인내심이 바닥나고 말았다고 한다.
“다 때려치울 거야! 관리고 뭐고 다 때려치울래! 이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짐 싸들고 야반도주하던 제론은 평소에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고 있던 영지민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집무실에 연금된 채 억지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일하기 싫다고 고집 부리자 일을 안 하면 밥을 안 주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재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은 계속 하고 있지만, 나날이 제론의 심신이 피폐해져서 결국 한스가 날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
그 제론 데커드라는 친구에게는 상당히 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통치하기 고생스러운 영지라면 나도 별로 부임하고 싶지 않거든?
“제론 그 친구한테 말이야, 내가 영지의 재정은 마음대로 착복해도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열심히 일하라고 그래. 그럼 의욕이 샘솟아서 열심히 하지 않겠어?”
내 말에 한스는 황당하다는 듯이 날 쳐다본다.
“제론님은 결코 그럴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착복이고 뭐고 영지 사람들이 전부 죽게 생겼는데 그런 걸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응? 다 죽어? 왜?”
“오크 부족이 우리 영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
도망치려 했던 게 이해된다. 나라도 도망치고 싶겠다.
오크 부족이라면 최소한 숫자가 300마리 이상일 텐데 그 작은 영지에서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하다못해 300마리 정도였으면 어떻게든 해봤을 텐데, 무려 1천 마리가 넘는 규모의 대부족이라고 하더군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제론님은 도주를 하다가 붙잡히셨고…….”
정말 답이 안 나온다.
나 그 영지 가기 싫어.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한스를 외면하며 말했다.
“나도 생각 같아선 가고 싶은데, 지금 내가 무진장 바빠서 말이야…….”
“여, 영주님!”
“에이, 아직 영주 아냐. 아직 인계도 안 받았는데.”
“그러지 마시고 제발 저희들 좀 살려주십시오!”
“제론 그 친구가 참 유능한 것 같네. 내가 왕실에 편지를 올려서 승진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열심히 하라고 전해.”
“그러니까! 오크 떼에게 다 죽게 생겼는데 승진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으흐흑!”
아 놔.
나 올해에 참 바쁘게 일하고 다녔거든?
이제 좀 쉬려고 했더니 왜 또 난리야? 나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게다가 오크가 1천 마리?
“사실 내가 지금 건강이 몹시 안 좋아서…….”
“크흐흑! 영주님, 제발!”
아 진짜!
***
결국 나는 너무 착해서 영지민들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오크가 1천 마리라면 용병단이 필요할 듯했다. 그래서 용병길드로 가서 딘 용병단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딘 용병단이 가장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그래, 이 기회에 딘 용병단은 우리 영지에 정착시키는 편도 괜찮겠어.
딘은 상당히 쓸 만한 인재였다. 기사로 임명한 뒤 군대를 관리하게 하면 잘 해낼 것 같았다.
“으흐흐, 그때 떠나는 딘에게 투자비로 돈 몇 푼 쥐어준 건 정말 잘 한 일이야. 이럴 때 써먹을 수 있잖아.”
딘은 그 빚이나 의리 때문에라도 나와 함께 오크 떼가 자리 잡은 바탄 영지로 함께 가줄 것이다.
게다가 제론 데커드라고 했던가?
그 왕실 관리 친구도 꽤 유능한 인재 같던데, 이번 오크 위기만 넘기면 잘 구슬려서 등용시켜야겠다. 제론을 영주 대리로 삼고 딘을 기사로 삼아 군대를 관할하게 하면 두 콤비가 내 영지를 잘 관리해줄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도 훌륭한 콤비라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내가 지난 생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반드시 내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인재가 널리고 널렸고, 나는 아무 재능 없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당연히 인재를 고용해 일을 시키는 것이 효율적인 판단이다.
줄리아 로렌을 봐라!
카록 병기점의 사장 자리에 앉혀 놓으니 얼마나 병기점을 잘 운영하고 있냐. 줄리아가 잘 하면 잘 할수록 내 재산도 불어난다.
나는 내 영지도 카록 병기점처럼 인재들을 이용해 힘 안 들이고 다스릴 생각이었다.
딘 용병단은 일주일 뒤에 찾아왔다.
단장 딘과 부단장 렉스.
그리고 휘하에 단원은 50명,
전원이 장창으로 무기를 통일하고 있으며 제식 훈련도 잘 되어 있어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용병단이었다.
“카록 남작님!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왔습니다.”
“만났으니 일단 술 한 잔 해야죠?”
딘과 렉스가 반가워했다.
나도 반갑게 웃었다.
“그래, 오랜만에 맥스를 또 괴롭혀 볼까?”
“하핫! 그것 좋지요!”
“남작님께서 쏘시는 겁니다. 요즘 돈 많이 벌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돈은 걱정 하지 마. 나 돈 많아!”
나는 호기롭게 외쳤고 렉스가 환호했다.
딘은 단원들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