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68화 (68/529)

<-- 68 회: 3권 - 5장. 크라일 뮤트 공작 -->

-꺄아아악!

“비, 비켜!”

당황한 릭 형님은 훌쩍 뛰어올랐다. 노움의 머리 위를 뛰어 넘는 찰나, 흙의 손들이 오른쪽 어깨를 붙잡았다.

“큭!”

이어서 운디네가 물의 창 열 자루를 만들어 날렸다. 어스 핸드에 오른쪽 어깨를 붙잡힌 릭 형님은 피하지도,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것들이!”

놀랍게도 릭 형님은 오른손에 쥔 검을 놓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쥐더니 폭풍처럼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휘둘러댔다.

파파파팟!

물의 창들이 모두 잘려졌다.

지면에 착지한 릭 형님은 다시 나에게 접근했다.

“어스 월! 트랩!”

흙의 벽이 가로막고 릭 형님의 발아래에 5미터짜리 구덩이 함정을 팠다.

그러나 놀랍게도 릭 형님은 지면의 두께가 매우 얇아서 발을 대기만 해도 무너져 내리는 함정 위를 미끄러지듯이 지나갔다. 마치 깃털이 지나간 것처럼 함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뭐, 뭐야 저게!

이어서 흙벽을 훌쩍 뛰어넘은 릭 형님은 금방이라도 날 일도양단할 태세였다.

“노움 날 집어던져!”

나는 뜬금없이 소리쳤다.

-응!

그러나 노움은 내 생각을 읽고는 어스 핸드로 날 붙잡고 휙 던졌다.

“뭐야 저게?!”

릭 형님은 놀란 얼굴로 멀리 날아가는 날 바라본다.

“운디네, 날 받아줘!”

-……응!

운디네는 물 덩어리를 만들어서 날 받아주었다.

풍덩!

운디네가 만든 물 덩어리 속으로 빠진 나는 무사히 지면에 착지했다. 이어서 운디네는 내 옷이 빨아들인 물기를 모두 회수했다.

노움과 운디네는 내 양옆에 섰다.

나를 놓쳐버린 릭 형님은 허탈해했고, 불에 기름을 끼얹듯 노움의 독설이 시작됐다.

-뭘 봐 멍청아? 또 무식하게 칼질하며 덤벼봐, 야만인.

-야, 야만인!

-아빠한테 뺨맞고 작은 여자아이한테 화풀이하니까 기분 참 좋겠네, 멍청아.

-머, 멍청아!

부들부들 떨던 릭 형님은,

“에이 씨! 나 안 해!”

롱 소드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화를 냈다.

“으하하핫!”

아버지는 세상이 떠나가라 웃음을 터뜨렸고, 뮤트 공작은 혀를 쯧쯧 차며 ‘한심한 녀석’ 하고 나직이 평했다.

사실 노움의 독설은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전해 받고 그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다. 아무렴 우리 착하디착한 정령들이 그런 못된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내 다시는 정령사와 싸우지 않겠다.”

릭 형님은 치를 떨며 다짐했다.

릭 형님에게 너무 큰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나 싶었지만, 뭐 어떠냐. 어쨌든 내가 이겼으니까 됐지. 으흐흐.

***

많은 일이 있었다.

아서 형님은 레이라와 결혼을 올림으로서 총각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아서 형님이 레이라에게 어찌나 잘해주던지 그녀도 행복해보였다. 레이라도 수줍어하면서도 아서 형님을 잘 모시려고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놀라운 일이다. 전생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레이라는 참한 아내가 되어 있었다.

역시 궁합이란 게 따로 있나보다. 그녀가 행복해진 걸 보니 나 역시 기뻤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전생의 나의 망나니 아들 녀석……. 이제는 태어나지도 않게 되어 버린 그 녀석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좋은 아내가 아니었던 레이라가 변했듯 어쩌면 그 녀석도 내가 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내 아들 아닌가.

하지만 훌훌 털어버리기로 했다. 그래, 내 아들놈아. 다른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잘 살렴. 설령 네가 영원히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만은 영원히 널 기억할게.

결혼식의 하객 중에서는 크라일 뮤트 공작이 단연 화제였다.

릭 형님과 단둘이 찾아와 결혼식을 빛내준 뮤트 공작은 우리 가족을 기쁘게 했다.

릭 형님이 뮤트 공작의 애제자라는 게 알려짐으로서 우리 쿤트 가문의 위상도 한층 격상됐다.

뮤트 공작은 떠나기 전에 아버지에게도 큰 선물을 주었다.

아버지가 용기를 내어서 뮤트 공작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실례인 줄을 알면서도 참을 길이 없어 감히 간절히 청합니다. 공작 전하, 제게 가르침을 내려주시지 않겠습니까?”

본래 오러 마스터에게는 대련 신청 자체가 무례한 일이었다.

엑스퍼트와 마스터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오러 엑스퍼트 최상급에 마스터의 경지를 코앞에 둔 기사라 할지라도 마스터의 상대가 못 된다. 마스터는 검술의 모든 오의를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련 신청 자체도 그저 오러 마스터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다행히 뮤트 공작은 아버지의 진심을 알아주었다.

“좋네.”

그리고 시작된 대련.

팟―

너무도 싱겁게 끝나버렸다.

뮤트 공작은 그저 검을 앞으로 내밀었을 뿐인데, 맹렬히 돌격하려던 아버지가 그 검 끝에 스스로 자기 목을 갖다 댄 꼴이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미스릴 롱 소드의 차가운 검 끝이 목에 닿은 것을 느끼며, 아버지가 물었다. 아버지는 허탈함보다는 경외에 찬 얼굴이었다.

“상대를 살핀다.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 눈빛에 담긴 심리, 숨소리, 검의 각도, 피어오르는 오러의 형태와 느낌, 살기. 모든 걸 살펴서 상대를 느끼고 공감한다. 그리 되면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게 된다.”

그것이 검술의 완전한 오의.

더 좋은 검술과 나쁜 검술 같은 건 없다. 모든 건 검을 쥔 사람에 의해 우열이 판가름된다.

상대의 모든 걸 간파하고 그에 적합한 대응을 하는 것이야말로 1만 번 싸워도 1만 번 모두 이길 수 있는 진정한 오의였던 것이다.

그리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한 눈에 상대의 모든 걸 파악하게 되는 경지가 바로 오러 마스터이리라. 92살 먹은 노회한 상인이 한 눈에 상대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에헴!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감격하여 연거푸 인사했다. 뮤트 공작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아버지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검술의 방향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자극 받았는지 릭 형님의 눈빛도 결의에 차 있었다. 아마 돌아가면 릭 형님은 평소보다 훨씬 검술 수련에 몰두하리라.

어쩌면 릭 형님이 전생 때보다 더 강해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뮤트 공작과 릭 형님도 떠나버리자 쿤트 자작령을 다시 조용해졌다.

자, 그럼 이제 나도 슬슬 계획한 일을 시작해볼까?

나는 카록 병기점을 찾아갔다.

땅! 따앙!

“거기 똑바로 좀 잡으랬지!”

“풀무질 좀 힘차게 못해?!”

드넓은 공동 작업장에서는 일반 장인 10인이 30명의 도제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지도했다. 계속 혼나며 배우는 도제들은 바짝 긴장해서 피로를 느낄 겨를도 없어 보였다.

열심히 병기를 생산하는 모습에 나는 오너로서 기분이 좋았다. 음, 음, 열심히 나를 부를 위해 일하고 있군. 힘내라, 노동자들이여.

……이러니까 마치 내가 악덕사장 같은데, 나의 카록 병기점은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체계였다.

도제가 됨으로서 일자리를 얻고 전문기술을 배울 수 있다.

열심히 일해서 일반 장인이 되면 급여가 오르고, 휘하에 도제들을 거느려 보다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실력이 갈고 닦아 숙련 장인이 되면 그전까지처럼 거푸집으로 대량 생산품을 만드는 반복 작업이 아니라, 특별 제작 주문을 받아서 자신의 솜씨를 한껏 발휘한 명품을 만들 수 있다.

숙련 장인들 중 가장 뛰어난 자는 구스 영감처럼 최고 장인이 되어 모든 장인을 총괄하고, 개인 작업장에서 어떤 주문품도 아닌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만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

나이가 들어 망치질을 놓게 되더라도 품질검사관으로 임명되어 생산된 병기의 품질을 관리할 수 있다.

노력하고 또한 원한다면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이 바로 카록 병기점이었다.

나는 구스 영감의 개인 작업장으로 찾아갔다.

따앙! 땅!

여전히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며 망치질을 하는 구스 영감이 보였다. 그 옆에는 반쯤 마신 힐링 포션 한 병이 보였다. 헐, 힐링 포션이 음료수냐?

최고 장인이 되어서 높은 연봉을 받게 되자 복용하는 힐링 포션의 양도 늘어난 모양이다. 구스 영감은 한 200살은 살지 않을까?

“어이쿠, 남작님!”

나를 발견한 구스 영감이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구스 영감, 부탁이 있어서 왔어.”

“부탁 말입니까? 뭐든 이야기하십시오.”

“우리 카록 병기점을 위한 일이야. 대륙 최고의 검을 한 자루 만들어야겠어.”

대륙 최고의 검이란 말에 구스 영감이 눈빛이 변했다.

“오오, 그것 참 제 장인정신을 자극하는 말씀이시군요. 좋습니다! 헌데, 혹시 남작님께서는 대륙 최고의 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씨익 웃었다.

“그야 그 검을 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검이지.”

“역시 남작님이십니다.”

그렇다.

최강의 검술 따위가 존재하지 않듯이, 최고의 검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단단한 검은 있을 수 있어도, 가장 좋은 검은 그 사람이 가장 쓰기 좋은 검이니 100명의 검사가 있으면 100자루의 최고의 검이 있는 것이다.

“검은 변합니다. 강철이 아니라 미스릴이라 하더라도 세월에 걸쳐 점점 변화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아. 검사의 손 모양에 따라 손잡이가 쥐기 편하게 점점 변하고, 검을 휘두르는 방법에 따라 검신의 형태가 미세하게 변하게 되잖아.”

검도 성장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래서 기사는 자신의 검을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손에 익은 유일한 검을 최대한 오래 쓰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기사가문의 분이라서 잘 아시는군요. 바로 그겁니다. 그 미세한 차이를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최고의 장인이 될 수 있지요.”

“구스 영감처럼?”

“허허헛!”

“아하하!”

우리는 신이 나서 웃었다.

구스 영감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 최고의 검을 만들려면 그 검을 쓸 사람이 직접 오거나, 그 사람이 쓰던 검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도 모두가 편히 쓸 만한 범용적인 검도 만들 수는 있지만, 그건 최고가 아니지요.”

“내가 누구야? 그런 것도 생각 못했을까봐?”

나는 노움을 소환했다.

-불렀어?

“내가 전에 보여줬던 검 기억나?”

-응. 미스릴?

“그래그래, 그거. 그 검과 똑같이 생긴 바위 검을 만들어줄래?”

“응, 알았어.”

노움은 바위 하나를 땅속에서 쑥 꺼내더니, 바위를 깎아서 검을 만들기 시작했다.

2분 뒤에 검이 완성됐다.

검, 아니 검 모양으로 깎인 바위는 일전에 봤던 뮤트 공작의 미스릴 롱 소드와 완전히 똑같았다.

“자, 이게 크라일 뮤트 공작의 손에 완전히 익은 검이야. 통짜 미스릴로 만든 롱 소드지.”

“오오! 정령으로 이런 일을 생각해내시다니, 과연 남작님이십니다! 예, 이것만 있으면 최고의 검을 만들 수 있습니다.”

“뮤트 공작 전용의 최고의 검 말이지?”

“그렇지요! 역시 남작님!”

“으하하하!”

서로를 칭찬해주며 유쾌한 대화가 이어진다.

“미스릴은 충분히 있으니 롱 소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가격은 미스릴의 원가와 저의 노력, 그리고 검의 상품적 가치를 모두 따졌을 때 1만 5천 레디나는 족히 받아야겠군요.”

1만 5천 레디나라니!

아마 미스릴 원가는 4천 레디나 정도이고, 나머지 1만 1천 레디나는 구스 영감의 솜씨와 노력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하여간 프라이드가 대단한 구스 영감이었다.

“아아, 미안하지만 그건 그냥 선물해야 해.”

“흐음, 아쉽군요. 대륙 최고의 검을 만들고 돈을 받지 못한다니.”

“그런 소리 말아. 돈보다 훨씬 중요한 것을 얻게 될 테니까. 나만 믿어, 구스 영감. 이번 일이 성공하면 구스 영감 덕분에 카록 병기점이 대륙 최고의 병기점으로 인정받게 될 테니까.”

“호오, 그리 말씀하시니 의욕이 샘솟습니다. 좋습니다! 완성까지는 2개월이 걸릴 겁니다.”

“응, 맡길게.”

내가 뮤트 공작의 검을 5분간 빌렸던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게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곧 알게 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