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회: 3권 - 3장. 순조로운 사업 -->
올해 여름은 폭풍 같았던 시기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명재상 듀론 후작을 비롯하여 수많은 거물과 만나고, 3만여 개나 되는 작셀을 팔아서 총 6만 레디나의 수입을 올렸으며, 군납 거래도 십여 건이나 따냈다.
남들은 평생을 바쳐도 하기 힘든 일을 나는 여름에 싹 해치워버린 것이다.
작셀 판매를 마무리한 나는 초대형 병기점 설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직 병기점은 공사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군납 거래를 십여 건이나 계약하다니, 나란 녀석도 참 인생 한 번 더 살더니 추진력이 대단해졌다.
건축업자 라반이 초대형 병기점의 설계도를 완성하자 본격적으로 공사에 들어갔다.
초대형 병기점에 대한 투자는 나와 아서 형님이 6대 4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4200레디나를, 아서 형님이 가문의 자금 2800레디나를 투입했다.
“설계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라반이 완성된 설계도를 내밀었다. 나와 줄리아, 구스 영감은 설계도를 살펴보았다.
“흐음, 구스 영감. 어때 보여?”
내가 묻자 구스 영감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한 설계입니다, 남작님. 장인들이 일하기에 편한 구조로 되어 있군요.”
“호오, 그래?”
“많은 것을 고려해서 심혈을 기울였습죠.”
라반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줄리아도 설계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작업장과 사무실이 두 건물로 따로 떨어져 있네요. 작업장에서 나는 소음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다행이에요.”
“오,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저도 그걸 고려해서 건물을 두 개로 따로 만들었고, 그 사이에 목책을 설치해서 소음을 차단할 생각입니다.”
과연 라반은 노련한 건축업자답게 솜씨가 뛰어난 듯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시작해볼까? 노움!”
-불렀어?
언제나처럼 땅속에서 슉 튀어나온 노움.
열두 살 남짓한 소녀의 형상에 자기 덩치보다 더 큰 삽을 들고 있는 노움은 언제 봐도 귀여웠다. 줄리아도 노움이 귀여운지 자꾸만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나는 노움에게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노움. 이걸 만들어야 돼.”
-이게 뭐야?
“이건 설계도라는 거야. 건물을 만들기 전에 미리 그림으로 그려본 거야.”
-이게 그림이야?
노움은 흥미가 가득한 얼굴로 설계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령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노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님, 잘 모르겠어. 이게 뭐야?
그 물음에 라반이 대신 대답했다.
“정령…… 아니, 노움 님. 이건 기둥이고 그 옆에 쓰여 있는 숫자는 사이즈를 나타낸…….”
라반은 설계도를 조목조목 짚으며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그가 노움을 존대하는 게 조금 웃겼다.
하지만 설계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노움이 설계도를 한 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라반의 설명에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움을 보며 나는 고민 끝에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노움아, 우리 진흙놀이 할까?”
-진흙놀이? 응, 나 주인님이랑 놀래!
뭔지는 몰라도 아무튼 노는 건 다 좋다는 노움이었다.
“진흙으로 이 건물을 작은 크기로 만들어보는 거야.”
“아, 좋은 생각입니다. 모형을 미리 만들어보고 잘못된 점은 제가 지적하겠습니다. 몇 번 연습하면 되겠군요.”
라반도 내 의견에 찬성했다.
나는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는 소환되자마자 내 뺨에 입맞춤을 했다.
“운디네, 땅에 물을 뿌려서 진흙을 만들어줘.”
-……응.
운디네는 물웅덩이를 만들어서 진흙탕을 만들었다. 그리고 노움이 앙증맞은 두 손으로 진흙을 만지작거리며 아담한 크기의 건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운디네도 호기심이 생겼는지 노움이 하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언니…… 뭐해?
-진흙놀이. 저 설계도라는 그림이랑 똑같은 거 만들어야 돼.
-나도…….
운디네도 끼고 싶었던 모양이다.
노움은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알았어. 너도 시켜줄게. 운디네는 진흙이 마르지 않게 계속 물을 뿌려.
-……응.
그렇게 오순도순 진흙놀이를 하는 두 정령이 어찌나 귀여운지, 우리는 몹시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아, 저 예쁜 것들!
노움은 금세 건물을 완성했다.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병기점의 설계대로였다.
그걸 유심히 살펴보던 라반이 몇 가지 지적을 했다.
“이쪽 기둥은 좀 더 굵게 해야 하고, 지붕은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아치형으로…… 아, 아치형이 뭔지는 아십니까, 노움님?”
그렇게 라반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움은 진흙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10분쯤 지나자 초미니 사이즈의 병기점이 완성됐다.
“예. 완벽합니다.”
라반은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토록 빨리 배울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나는 노움을 쓰다듬어주었다.
“어휴, 우리 노움 정말 잘했네. 정말 천재 같아.”
-나 천재야?
“그럼!”
-헤헤헤, 나 천재야.
노움은 우쭐거리며 좋아했다. 그러자 운디네가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자기도 칭찬해달라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그래그래, 운디네도 잘했어.”
-……응!
나는 운디네도 칭찬해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워밍업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건물을 짓기로 했다.
“노움, 이번에는 설계도에 나와 있는 크기로 지어야 해. 그리고 진흙이 아니라 돌로 된 건물을 만들어야 하고.”
-주인님이 힘들어.
노움은 날 걱정해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아무리 중급 정령사에다가 정령친화력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큰 건물을 한 번에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노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괜찮아. 한 번에 다 만드는 게 아니라, 며칠에 걸쳐서 완성시키면 돼.”
-응, 알았어.
노움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삽을 꼬나 쥐자 나는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정령친화력이 단숨에 소모되어 골이 띵~해지는 고통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꼼짝없이 드러누워야겠구나.
마침내 노움이 삽으로 땅을 푹 찍었다.
쿠구구구구구궁!
대지에서 거대한 바위의 벽이 솟아오르는 광경은 실로 엄청난 장관이었다.
“세, 세상에!”
“저게 정령술의 위력……!”
그야말로 신의 이적과도 같은 광경! 줄리아도 구스 영감도 라반도 떠억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봤다.
하지만 막상 힘을 쓰는 당사자인 나는 죽을 맛이었다.
“크으윽!”
정령친화력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은 실로 괴로웠다. 표현하자면,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고막이 찢어지고 머리가 울리는 것 같은 고통이랄까?
밑 빠진 항아리에서 물이 콸콸 새는 것처럼 정령친화력이 소모되었다.
노움이 초대형 병기점 건물을 30%가량 완성했을 때쯤, 나는 탈진으로 비틀거렸다.
그제야 노움은 작업을 멈췄다.
-주인님, 괜찮아?
노움과 운디네는 비틀거리는 나를 걱정스레 쳐다봤다.
“응. 좀 피곤할 뿐이야. 내일 또 부를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렴.”
-응.
노움과 운디네는 그렇게 돌아가 버렸다.
나는 휘청거리며 구스 영감에게 말했다.
“구스 영감, 나 좀 부축해줘.”
“네엣!”
씩씩하게 외치며 날 덥석 끌어안은 건 구스 영감이 아니라 줄리아였다.
날 부축하려 했던 구스 영감은 흠칫하여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남작님을 모실 겁니까?”
벌써 줄리아를 사장님이라 부르는 구스 영감이었다. 줄리아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최고 장인님. 제게 맡겨줘요. 우리 단주님은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아니, 얘가 뭘 잘못 먹었나. 그리고 언제부터 ‘우리’ 단주님이야?
“……얘야.”
“네, 단주님~.”
“부축하려면 좀 똑바로 해줄래? 끌어안지 말고.”
“우히히, 알았어요.”
줄리아는 날 부축하면서도 아주 가까이 몸을 밀착시켰다. 찰싹 달라붙은 줄리아의 부축에 오히려 걷기가 더 불편해졌다. 게다가 그녀의 젖가슴이 내 옆구리에 닿아서 민망하기도 했다.
“조, 좀 똑바로 하라니까?”
“알았다고요, 헤헤.”
“안되겠다. 어이, 구스 영…….”
“자자, 어서 가요!”
줄리아는 날 질질 끌고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배로 피곤해진 나는 여관 객실에 도착하자마자 뻗어버렸다.
워낙 피곤했기 때문에 나는 다음 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나는 깨자마자 노움을 불러내 초대형 병기점의 건물을 만드는 작업을 또다시 시작했고, 정령친화력을 소진하자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나흘간 폐인 같은 짓을 반복한 끝에 간신히 건물 외관이 완성되었다.
“허어……. 정말 정령사가 많았다면 저 같은 건축업자는 다 굶어 죽었겠군요.”
라반은 불과 나흘 만에 완성된 건물을 보면서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우리의 눈앞에는 초대형 병기점이 우뚝 서 있었다. 그건 작업장과 사무실,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그걸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문, 창문, 창틀, 지붕 등이 전혀 없이 오직 바위로 된 건물 외골격만 완성된 형태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 혼자서 거의 절반 이상의 건축 작업을 나흘 만에 해낸 것이다.
나는 라반에게 물었다.
“이제 병기점이 완공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건물은 거의 다 완공됐으니, 기타 자잘한 공사를 해서 마무리를 하는 데는 보름이면 충분합죠. 하지만 풀무와 화로, 거푸집 등의 설비를 작업실마다 설치하려면 시일이 더 걸립니다. 사실 예산 7천 레디나도 대부분 그런 설비를 만드는데 쓰이는 돈이고요.”
“가을까지 완성하면 돼.”
“알겠습니다. 서두르지요.”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줄리아를 따로 불렀다.
“줄리아. 이제 병기점의 사장은 너야. 뭘 해야 하는지는 알지?”
“네. 일반 장인 열 명과 도제 30명, 사무실 직원 10명을 채용하고 병기점이 완공되는 대로 납품할 병기를 생산하기 시작할게요.”
“잘 알고 있구나. 자, 그럼 남은 일은 네게 맡긴다.”
나는 품속에서 1만 레디나짜리 레던 왕실 어음을 줄리아에게 건네주었다.
“꺄악! 일만이야!”
줄리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쯧쯧, 1만 레디나라고 표기된 어음은 처음 만져봤겠지.
그런데 얘 눈이 뒤집힌 걸 보니 약간 불안하네. 설마 저 어음 들고 튀지는 않겠지?
순간 내 머릿속에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다.
내가 준 1만 레디나짜리 어음을 들고 튄 줄리아 로렌. 그걸 자본금 삼아 상단을 일으켜서 상재를 발휘하며 ‘황금의 여인’이라 불리며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아하하. 설마.
그런데 너무 리얼한 상상이라서 덜컥 겁이 난다.
“주, 줄리아야.”
“네, 단주님.”
“흠흠. 그거 들고 튀면 안 된다?”
“뭐라고요?!”
버럭 화를 내는 줄리아.
“지금 절 못 믿는 거예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정말 너무해요!”
줄리아는 짐짓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헉. 얘 왜 이래.
놀란 나는 쩔쩔 매며 그녀를 달래주어야 했다.
“그, 그냥 농담 삼아 해본 소리야.”
“…….”
줄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알았어, 내가 미안해. 응?”
“……그럼 선물 사줘요.”
“엥?”
“시스에게는 전에 선물 사줬었잖아요. 저도 사줘요.”
전에 레던 왕성에서 시스와 재회했을 때 푸른색의 여름용 로브를 사준 것을 말하는 듯했다.
“알았어, 사줄게.”
“진짜죠?”
줄리아는 언제 상처 입었냐는 듯 우히히 웃기 시작했다. 그 얄미운 웃음에 비로소 나는 그녀에게 속았다는 걸 깨달았다.
“너, 너!”
“히히히. 단주님. 단주님은요, 사업할 땐 굉장히 노련한 거상처럼 수완을 발휘하시는데, 여자한테는 쩔쩔 매는 것 같아요.”
“……끄응.”
그래.
내가 한때 결혼 잘못해서 쓴맛을 봐서 그렇단다.
속긴 했지만 약속했으니 선물은 사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될 때 적당한 걸로 사줘야지. 에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