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회: 3권 - 2장. 흑혈병 -->
그런데 그쪽에서 내게 또 아주 피와 살이 되는 고견(高見)을 바란다면 곤란하다. 난 현자가 아니거든.
……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네.
생각해보니 나 정신연령은 92세잖아?
오래 산 사람에게는 ‘늙은이의 지혜’라는 게 있는 법인데, 하물며 나는 미래도 알고 있고 죽음까지 경험해봤잖아?
덕분에 세상 보는 눈도 좀 생겼으니 어쩌면 난 현자…….
“카록.”
망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아서 형님이 불렀다.
“카록, 듣고 있느냐?”
그제야 난 망상에 퍼뜩 깨어났다.
“예? 아, 죄송합니다, 형님. 잠시 딴 생각이 들어서요.”
“쯧, 정신 차리고 잘 들어라! 왕실에서 오는 인물은 엄청난 거물이다. 작년에 이 나라의 재상이 되신 듀론 후작 각하시란 말이다!”
순간 난 내 귀를 의심했다.
“네? 듀론 후작 각하요?”
“그렇다.”
“허…….”
나는 그 이름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듀론 후작이라면 잘 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훌륭한 위인으로서 역사에 길이 남게 된 인물인데!
필립 듀론 후작.
레던 왕국 최후의 명재상!
대표적인 왕실파 명문가인 듀론 후작가의 가주로 현명한 판단력과 신중한 품행으로 존경받던 인물이다.
권력에 욕심이 없는 그는 아들에게 가문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끝내주는 에릭이 그를 찾아가 재상이 되어 왕실 국정을 이끌어 달라고 부탁했다.
에릭의 끈질긴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재상이 된 듀론 후작은 깊은 연륜으로 경험이 부족한 에릭 국왕을 잘 보필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레던 왕국의 마지막 재상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혼트 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이 벌어진 탓이었다.
에릭 국왕은 전쟁 중에 전사하였고 수도 레던 왕성은 혼트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
듀론 후작은 피난을 가지 않고 홀로 왕실을 지켰다. 혼트 제국군이 왕궁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왕궁 재상부에서 묵묵히 집무를 보고 있었다. 병사들이 창칼을 들이대며 붙잡으려 하자 그가 호통을 쳤다.
“나라가 망했어도 백성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나는 일을 해야 한다! 곧 끝나니까 잠자코 기다려라!”
그는 마지막 서류를 작성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저항 없이 포로가 되었다.
그 의연함에 감탄한 혼트 제국의 어린 황제가 그를 등용하려 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는 레던 왕국의 재상이외다. 폐하의 원수인 당신에게는 결코 고개 숙이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그냥 날 죽이시오.”
“흐음, 그건 싫은데? 난 널 그냥 살려줄 거다.”
황제는 듀론 후작의 됨됨이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그냥 풀어주었다. 그러나 왕궁을 나서자마자 듀론 후작은 자결을 함으로써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죗값을 스스로 치렀다.
그의 의기와 충절은 많은 이를 감격케 해 그 뒤에도 미담으로써 널리 알려졌다. 참 대단한 분이시다. 나 같았으면 냉큼 항복하고 혼트 제국의 신하로 변신…… 흠흠!
한마디로 전생 때, 훌륭한 위인으로 역사책에 기록된 그분이 지금 날 만나기 위해 이리로 오고 있단다.
헐…… 이거 무진장 영광이잖아?
“그럼 지금 당장 연회 준비를 해야겠네요?”
“아니다. 후작 각하께서 보낸 서신을 보니, 조용히 방문하다 돌아갈 생각이니 연회를 할 돈으로 영지민을 위해 쓰라고 하시더구나.”
아, 역시 명재상. 존경스러워, 존경스러워!
말로만 듣던 그와 만날 수 있다니 몹시 기대가 되었다.
***
일주일 후.
재상 필립 듀론 후작이 이곳 쿤트 성에 당도했다.
우리는 아버지, 아서 형님, 나 세 식구가 총출동해 듀론 후작을 마중 나왔다.
이 나라의 재상에, 왕실파의 원로 되는 어른에게 이 정도 예우는 당연한 것이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리의 인사에 듀론 후작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이를 이토록 환영해주니 고맙구먼. 자자,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가세나. 오랜만에 먼 길을 여행했더니 힘이 드는군.”
“예.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저택에 후작 각하의 숙소와 식사, 목욕을 모두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에 듀론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타고 편히 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가 60대 후반이라 여행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날 듀론 후작은 목욕을 하고 우리 가족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서는 아버지, 아서 형님과 함께 티타임을 즐기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듀론 후작의 방문 목적은 바로 나였지만, 첫날은 나와 독대를 하지 못했다.
이 영지를 방문해 놓고, 영주인 아버지와 후계자인 아서 형님을 제쳐두고 나와 먼저 독대를 하는 것은 실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대영주에 재상쯤 되는 거물이니 그 정도쯤 사소한 예의는 그냥 무시해도 될 법한데도, 듀론 후작은 겸손과 예의를 끝까지 잃지 않았다. 하여간 그 품성만으로도 그는 존경 받기에 충분했다.
다음 날.
둘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듀론 후작과 나는 독대를 하게 되었다.
함께 포도주나 한 잔 기울이자는 초대를 받고, 나는 기꺼이 그날 저녁 듀론 후작의 숙소를 찾았다.
“드디어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군.”
듀론 후작의 말에 나 역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시며 또한 겸손하시기로 이름이 높으신 후작 각하와 독대를 하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그리 말해주다니 이 늙은이가 헛살지는 않았나 보구먼.”
듀론 후작은 나의 칭찬에 솔직하게 기뻐하였다.
“얼마나 좋은 포도주를 가지고 계시는지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왕실 주류창고에서 좋은 것을 잔뜩 챙겨왔네. 아, 퀸즈 블러드 같은 특급 명주는 폐하와 두 기사가 퍼마시는 바람에 동이 나버렸지만 그에 비견될 정도로 명주일세.”
“하핫!”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두 기사라면 로열나이츠의 단장 그라함 백작과 부단장 랜달 스페이 백작을 뜻하리라.
내가 운디네를 시켜서 맛을 개량해준 포도주들을 그 1년 사이에 다 마셔버린 모양이다.
이윽고 듀론 후작이 선보인 포도주는 백포도주였다.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병의 겉면에는 레이스 브리튼이라고 쓰여 있었다.
“우와, 레이스 브리튼이군요.”
레이스 브리튼은 2백 년 전쯤의 인물로 오리엔 왕국의 명문가 브리튼 공작가의 가주였다. 애주가였던 그는 정치는 뒷전이고 최상의 포도주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인 괴짜였다.
오랜 연구 끝에 그는 최상품이라 할 만한 포도주 주조법을 개발했고 자신의 이름을 포도주명으로 삼았다.
포도주 레이스 브리튼은 대륙적인 명성을 떨쳤고, 덕분에 브리튼 공작가는 덩달아 포도주로 널리 알려져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지금도 브리튼 공작가 하면 이 환상의 백포도주를 떠올리는 것이다.
“한 병이 아닐세.”
듀론 후작은 테이블 아래에 놓인 바구니를 보여주었다. 네모난 바구니에는 포도주 십여 병이 담겨 있었다.
“폐하께서 신신당부를 하시더군. 대체 자네가 포도주에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그러시는가?”
“하하하,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나는 운디네를 소환했다.
허공에 나타난 운디네는 늘 그랬듯 입맞춤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귀여운 운디네의 자태를 보며 듀론 후작은 크게 감탄했다.
“허어, 이게 정령이로군. 만져 봐도 되겠나?”
“예. 안 뭅니다.”
“허허헛!”
내 농담에 너털웃음을 터뜨린 듀론 후작은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디네는 내가 쓰다듬어줄 때처럼 기뻐하진 않았지만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렇게 귀여운 정령을 보게 되다니 기쁘구먼. 나한테는 아들 둘에 손자만 여섯이 있는데 그나마도 전부 커버려서 하나도 귀엽지 않다네. 이런 손녀가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듀론 후작의 말은 진심으로 보였다.
만약 듀론 후작에게 운디네처럼 귀여운 손녀가 있었더라면 은퇴 생활을 포기하고 재상직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의 손자들이 하나도 안 귀여워 다행이구나, 에릭 국왕.
“운디네. 여기 있는 포도주들을 전부 맛있게 해줄래?”
귀여운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스 브리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병에 담긴 백포도주가 회전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바구니에 담긴 십여 병의 포도주 역시도 힘을 발휘해 맛을 개량시켰다. 저걸 갖다 주면 에릭 국왕과 로열나이츠의 두 양반이 무척 좋아하겠지.
-다 됐어.
“고마워, 운디네.”
내 칭찬에 운디네는 자기 머리를 스윽 내민다. 나는 웃으며 쓰다듬어주었다. 그래도 운디네는 아직 부족하다는 얼굴로 날 쳐다본다. 아하! 나는 운디네의 이마에 쪼옥 입맞춤을 해주었다. 그제야 운디네는 크게 기뻐하며 돌아갔다.
“정말 귀엽구먼.”
“제 삶의 낙이죠. 언젠간 은퇴해서 정령들과 노닥거리며 사는 게 제 꿈입니다.”
“허허허.”
듀론 후작은 진심으로 부럽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그 같은 평화로운 은퇴생활은 본래 그가 꿈꾸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네. 과분하게도 재상이 되는 바람에 이리 피곤하게 살고 있네만……. 이 쓸모없는 늙은이를 대신해줄 유능한 젊은이는 얼마든지 있는 것 같은데 말일세.”
듀론 후작은 나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자네처럼 말일세.”
나는 흠칫했다.
역시나 에릭 국왕은 날 등용하고픈 마음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다.
“저 같은 평범한 장사치가 듀론 후작 각하를 대신할 깜냥이나 되겠습니까? 그런 과분한 말씀은 부담스럽습니다.”
“겸양인가 사양인가. 나는 자네의 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네. 특히나 오리엔 왕국과 혼트 제국과 연계하여서 육제후가 장악한 바덴 강의 통행세를 하향동결하자는 자네의 제안에는 크게 놀랐네. 그게 이제 스무 살 된 청년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이라니 기가 찰 정도였지.”
“…….”
“하나 묻겠네. 현재 우리 레던 왕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나는 짐짓 시치미를 뗐다. 술술 떠벌렸다가는 또 희대의 인재니 하며 추켜세워질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내 거짓 태도는 듀론 후작의 날카로운 눈썰미를 피해가지 못했다.
“모르는 체 하지 말게. 그 젊은 폐하께서 죽는 날만 기다리던 이 늙은이를 등용하겠다고 수차례나 찾아온 것을 떠올려 보게.”
“……인재가 부족하죠.”
“바로 그걸세. 폐하께는 믿을 만한 인재가 부족해. 밖으로는 육제후의 일파가 세력을 떨치고 왕실 내부에도 죽은 2왕자의 잔당과 육제후의 끄나풀이 수두룩하네. 폐하의 젊은 나이와 미숙한 경험을 핑계로 텃세를 부리는 자들도 있지.”
이는 에릭 국왕이 아직 왕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그가 왕실을 장악하려면 자신을 따르는 유능한 인재들을 왕실의 요직에 앉혀놓아야 했다. 그래야만이 자유자재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한숨을 쉬며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후작 각하. 저는 두렵습니다.”
“무엇이 말인가?”
“제 능력이 폐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봐, 그리고 권력의 한복판에 섰을 때 사방에서 몰아칠 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두렵습니다. 저는 그저 상인으로서 살고 싶습니다. 돈을 벌고, 그 돈을 좋은 일에 쓰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듀론 후작은 뜬금없이 물었다.
“아무 걱정 없이 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닐세.”
듀론 후작이 말했다.
“그건 행복이 아니라 무료함일세. 아무 걱정 없이 산다는 건 긴장감을 느끼지 못하는 단조로움의 연속이지. 그런 건 허무함만 느껴질 뿐일세.”
“…….”
“죽을 때에 후회를 할 걸세.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았나? 실은 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온 힘을 쏟아 열정을 바쳐서 살았을 때 비로소 자네가 말하는 평안함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전생의 나는 온갖 시행착오를 겪고 문제를 겪으면서도 상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랬기에 늙어서는 후회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나는 착각을 하나 하고 있었나 보다.
지금의 나는 90살을 넘긴 노인네가 아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받은 스무 살 청년이다.
그런데 나는 전생의 젊은 날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지금 내가 떼돈을 벌고 있는 것도 전심전력을 다해 노력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미래를 알고 있기에 간단히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이대로 살다가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냈을 때 나는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단지 내 전생의 경험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듀론 후작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자네는 스스로의 능력에 의심을 품고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오랜 세월 정치를 하며 살아온 내가 자네를 평가해주겠네.”
그 말에 나는 긴장했다.
과연 전생에 명재상으로 불리던 그는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