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회: 3권 - 2장. 흑혈병 -->
“으하핫! 이 몸의 승리이도다! 아싸!”
“끄응…… 이런 무엄한 가신을 보았나.”
몸을 일으키며 에릭은 분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폐하의 실력에 이 랜달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가?”
에릭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어릴 때 랜달이 말을 이었다.
“예. 어떻게 그 2년 사이에 실력이 이렇게까지 녹슬 수 있는지…… 폐하의 검술 스승으로서 한숨이 나옵니다.”
다시 표정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에릭이었다.
그런데 그때 늙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께서는 국정에 충실하셔서 잠시도 쉴 틈이 없으시거늘, 하물며 검을 잡을 틈이 있으시겠는가?”
검을 검집에 넣고 돌아보니 60대 후반쯤 된 보통 체격의 노인이 연무장에 들어와 있었다. 허옇게 수염을 기른 노인을 본 랜달이 급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듀론 후작 각하.”
듀론 후작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화답하고는 에릭 앞에서 예를 갖춰 인사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듀론 후작.”
필립 듀론 후작.
그는 작년에 에릭이 재상으로 발탁한 인물이었다.
본래 왕실파 대가문 듀론 후작가의 가주였던 그는 아들에게 모든 걸 물려주고 은퇴한 상태였다.
젊은 국왕 에릭은 자신의 부족한 국정 경험과 연륜을 대신해줄 사람으로 그를 점찍었고, 수차례 방문하여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그를 등용할 수 있었다.
재상이 된 듀론 후작은 노련한 국정 운영으로 에릭의 사람 볼 줄 아는 안목을 증명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대륙에 흑혈병이 유행하고 있는 듯합니다, 폐하. 아무래도 전 대륙의 인구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라는 무서운 예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허어, 그 정도요?”
에릭은 섬뜩해졌다.
작년의 대흉년에 이어서 대륙적인 전염병이라니.
그 이중적인 악재가 얼마나 끔찍한 악몽을 선사할지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절로 났다.
“다행히 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각종 전염병에 쓸 약초를 대량으로 재배한 덕분에 흑혈병에 쓸 작셀 역시 많이 확보되었습니다. 사전에 흑혈병 환자를 찾아내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왕실 직속의 영지는 큰 피해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구려.”
“폐하의 선견지명에는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듀론 후작의 찬사에 에릭은 쑥스러워서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그걸 예측한 사람은 짐이 아니오.”
“예?”
“작년 여름, 왕실에 밀 3만 5천 포대를 팔았던 카록 쿤트를 아시오?”
“아, 예. 들어보았습니다. 상재가 뛰어나고 정령술도 익힌 청년이라지요. 허어, 그럼 전염병을 예측한 것도 그 청년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듀론 후작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대흉년을 예측해 밀을 대량 확보하고, 전염병까지 미리 예상했을 정도면 실로 대단한 인재가 아니옵니까, 폐하.”
“바로 그렇소.”
“그렇다면 그자를 왕실의 요직에 등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아, 짐이 그 생각을 안 했을 것 같소?”
“하기야 인재 욕심이 많으신 폐하께서 그런 친구를 가만 두셨을 리가 없겠지요.”
“거절하더군. 작위와 함께 하사한 영지도 아직 인계받지 않은 걸 보니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이오. 식견이 참으로 탁월하여 꼭 짐의 곁에 두고 싶거늘.”
“포도주의 맛을 한층 끌어올리는 그 정령술도 그렇고, 실로 탐나는 친구이지요.”
랜달도 입맛을 다시며 맞장구쳤다.
에릭도 그 말에 그때 맛보았던 퀸즈 블러드가 떠올라서 군침이 돌았다.
그때 카록이 맛을 개량시켜준 명주들은 야금야금 마시다 보니 1년도 못 가 동이 나버렸다.
게다가 그 환상의 맛에 길들여진 바람에 이제 다른 포도주는 거들떠도 못 보게 되었다.
‘다시 그의 식견도 들어볼 겸 한 번 불러볼까?’
에릭의 심중을 알아챘는지 듀론 후작이 입을 열었다.
“폐하. 허락하신다면 제가 직접 그 친구를 찾아가보고 싶습니다.”
“후작이 직접?”
“예. 어떤 인물인지 한 번 보고 싶군요.”
“아니오. 짐이 친서를 보내 부르면 될 것을 어찌 연로한 후작이 가시오?”
“폐하, 그 친구는 지금쯤 한창 바쁠 때입니다. 전염병을 사전에 예측한 상인이 지금쯤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 그렇군.”
아마 카록 쿤트는 한창 작셀을 팔아 한몫 챙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 바쁜 시기에 오라고 불렀다가는 귀찮아할 것이 분명했다.
괜히 귀찮게 해서 반감을 살 필요는 없었다.
“그럼 짐이 직접 가겠소.”
에릭은 듀론 후작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그리 말했다. 그만큼 그를 아낀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듀론 후작의 결심은 단호했다.
“이런 때일수록 폐하께서는 왕궁을 지키고 계셔야 합니다. 신이 비록 늙었으나 아직은 정정하니 염려놓으십시오.”
결국 에릭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소. 후작에게 맡기리다. 다만 짐의 부탁을 하나만 들어주시오.”
“말씀하십시오.”
“갈 때 포도주를 몇 병, 아니 수십 병쯤 가져가서…….”
에릭이 넌지시 이르는 말에 랜달도 지당하다는 듯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듀론 후작은 순간 황당했지만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었기에…….’
***
작셀이라는 약초는 봄에 심어서 여름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하게 자랐을 때 잎사귀를 수확한다.
그 잎사귀는 햇볕에 바짝 말렸다가 빻아서 가루로 만든 후에 물에 빚어 동그란 알약으로 만들어서 보관한다. 그 작셀 약 한 알은 흑혈병 환자 한 명을 완치시키는데 충분한 약효가 함유되어 있다.
그렇게 작년에 수확했던 작셀 알약은 커다란 약재 창고 두 개에 한가득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 한센의 어머니에게 관리를 위탁했다.
거기에 올 여름에 이르러 내가 보유한 약초밭에 새로 심은 작셀이 또다시 잘 자랐다. 약초 농부들이 작셀을 수확하여 가공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센을 시켜서 약재창고 두 개를 더 매입한 뒤, 작셀 알약을 보관하게 했다. 무려 약재창고 네 개에 작셀 알약이 꽉 차버린 셈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니 흑혈병이 반가워질 지경이었다.
이제 흑혈병 문제로 온 대륙이 몸살을 앓기 시작했으니, 슬슬 장사를 시작할 시기였다.
흑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이를 이용하여 돈을 벌어들이는 나의 사업은 일면 비열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맹세컨대 내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결코 돈이 아니다.
두 번째 인생을 맞이하여 많은 돈을 벌겠다고 결심했지만, 이는 내 돈으로 내 가족과 영지, 나아가 이 나라와 전 대륙 사람들에게 이롭게 쓰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다른 약재상으로부터 작셀을 대량으로 사재기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약초밭을 잔뜩 사들여서 작셀을 최대한 많이 재배하게 했을 뿐이다.
작셀을 많이 재배해서 다른 이들에게 판매를 하니, 나의 사업 때문에 더 많은 흑혈병 환자가 목숨을 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도의적으로 옳으면 옳았지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뭐, 좋은 일도 하고 돈도 버니 겸사겸사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좋아!
이제 장사 개시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 서신을 한 장 적기 시작했다.
「명예롭고 고귀하신 오리엔 왕국의 국왕 폐하 귀하.
저는 레던 왕국의 쿤트 자작가의 삼남 카록 쿤트라는 일개 상인입니다. 이 서신을 감히 이름 높으신 오리엔 국왕 폐하께 드리는 것은 저의 제안이 오리엔 왕실의 입장에서도 이로울 거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흑혈병이 발발하여 전 대륙이 어지러워진 가운데, 저는 운이 좋게도 작셀을 대량으로 보유하였습니다. 상품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것이 상인의 본분인 바, 저는 흑혈병으로 고통 받는 백성을 우려하는 오리엔 왕실에 제가 가진 작셀을 판매하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물론 상인으로서 저는 이 작셀에 걸맞은 가치 있는 대가를 받고 싶습니다.
만일 저에 대해 아신다면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역시도 현명하신 오리엔 국왕 폐하께서는 아실 거라 믿습니다.
거래가 성사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카록 곡물 상회의 단주 카록 쿤트 남작」
아마 이 서신이 도착하면 흑혈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오리엔 왕실은 눈이 번쩍 뜨일 것이다.
그러면 허둥지둥 나에 대해 조사를 할 테고, 내가 최근에 철광석 광산을 매입하고 초대형 병기점을 설립하는 등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는 사실까지 파악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작셀을 판매한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오리엔 왕실에 바보들만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서신을 누가 전달할 것이냐가 문제인데. 평소 같았으면 한센을 보냈겠지만, 일국의 왕실에 전하는 중요한 서신을 일개 평민인(그것도 몹시 어리바리한) 한센에게 전달하게 할 수는 없다.
으음. 아무래도 아서 형님께 부탁해야겠다. 가문의 기사들 중 한 사람에게 맡겨야 할 것 같아.
나는 서신을 들고 저택으로 향했다.
그런데 때마침 우리 가문의 하인이 멀리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하인은 내게 볼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날 발견하자마자 부리나케 내쪽으로 달려왔다.
“카록 공자, 아니 남작님!”
“무슨 일이야?”
“대공자께서 부르십니다.”
“그래. 마침 나도 저택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서 형님이 있는 집무실로 올라갔다.
“아서 형님, 접니다.”
“그래, 어서 와라.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예. 저도 형님께 볼일이 좀 있어서요.”
“볼일?”
“예. 정확히는 부탁입니다.”
“부탁이라…….”
아서 형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날 쳐다봤다. 왜 내가 뭐 부탁만 하면 그런 표정이 되는 거야?
“오리엔 왕실로 서신을 보내야 하는데 아무나 보낼 수는 없잖습니까. 가문의 기사들 중 한 사람을 시켰으면 좋겠는데.”
“오리엔 왕실에 말이냐?”
놀란 아서 형님에게 내가 말했다.
“물론이죠. 흑혈병도 발발했는데 잔뜩 쌓여있는 작셀을 팔아치워야죠.”
“그런데 왜 하필 오리엔 왕실에…… 아!”
아서 형님도 그제야 내 의중을 깨달은 눈치였다.
“그렇게 되면 일석이조로구나. 영악한 녀석!”
“아하하, 과찬도.”
“알겠다. 서신은 내게 맡겨라.”
나는 서신을 아서 형님에게 건넸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습니까, 형님?”
“아, 그래. 왕실에서 너를 만난다고 사람이 온다는구나.”
“왕실에서요?”
그건 별로 탐탁지 않은 소식인데.
내가 전염병 생긴다고 귀띔해줬으니 작셀이 없어서 나한테 손 뻗는 건 아닐 테고…….
그럼 보나마나 날 등용하려 하거나 또 무슨 조언이라도 얻으려는 것 같았다.
내가 흑혈병 유행을 정확히 예견하자 에릭 국왕도 깜짝 놀랐겠지.
그런데 그 젊은 국왕 양반, 설마 나를 엄청난 현자쯤으로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난 그저 이미 인생을 90년이나 살아봤기 때문에 대흉년과 흑혈병에 대비할 수 있었고, 그 외엔 에릭 국왕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준 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