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회: 3권 - 1장. 혼담 -->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만나고 싶었는데 잘됐구먼. 도대체 자네는 무슨 재주로 밀을 4만 포대나 구입할 생각을 했는가? 그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군. 허허허허.”
흐흐, 내가 말했지?
나중에 속 쓰릴 거라고.
그때 내게 한 포대라도 더 많은 밀을 떠넘기고 싶어서 안달했던 후디니 자작 아닌가. 이젠 내게 대량의 밀을 팔았던 것이 후회될 것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단지 지금껏 농사가 잘 됐으니 이제 안 될 때도 되지 않았나, 싶었죠. 아하하.”
“정말 운이 좋았거나, 겸손하거나 둘 중 하나로군.”
“후자로 해두죠.”
“뭐? 으하하!”
후디니 자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나에게 밀 4만 포대를 팔았던 것이 큰 손해가 되었을 테지만, 별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진 않은 듯했다. 하여간 허영심만 빼면 꽤 괜찮은 사람이다.
“그래, 겸손한 친구. 이제 본론을 얘기함세. 날 약 올리러 온 게 아니라면, 우리의 혼담 제안에 대한 대답을 가져왔을 거라고 생각되네만?”
“여기 있습니다.”
나는 약혼서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올해 가을에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약속이 담긴 서약서에는 우리 쿤트 가문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여기에 후디니 자작가의 인장만 찍히면 약혼이 성사되는 것이다.
이를 읽어본 후디니 자작은 흐뭇하게 웃었다.
“받아들였군. 올해 가을인가.”
“예. 영지전을 막 끝마친 뒤라서 지금으로서는 경황이 없습니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려면 가을이 적합하다 판단되었습니다.”
“하긴. 결혼식에 돈이 한두 푼이 드는 것도 아니니 추수기인 가을이 좋지.”
후디니 자작도 납득했다.
그는 한참동안 약혼서약서를 바라보더니, 문득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쿤트 가문에 혼담을 제안했는지 아는가?”
“우리 가문을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겸손하게 답했다. 사실 그의 의중은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였지만 말이다.
“난 작년 여름에 란즈헬 백작께 대량의 밀을 팔았네. 큰돈을 받고, 육제후와의 관계도 가까워졌지. 이 나라의 돈은 그들이 틀어쥐고 있으니 그들과는 가까워질수록 좋지.”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속 말했다.
“하지만 말일세. 난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었네. 그들이 과연 정말로 강할까?”
“옛?”
놀란 내게 그가 말했다.
“육제후는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레던 왕국에 세를 뻗치고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문이 든단 말일세. 그들은 정말 강할까?”
“…….”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그들이 과연 정면을 돌파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까?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지켜줄 수 있는 자들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이상하게 나는 육제후가 의외로 허약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일세.”
나는 내심 크게 놀랐다.
후디니 자작. 내 전생의 장인.
전생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그는 놀라운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다.
전생 때, 혼트 제국이 침략했을 때 육제후가 한 대처라고는 꼭꼭 틀어박혀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는 일밖에 없었다.
물론 그땐 육제후의 두뇌라 불렸던 볼프강 란즈헬 백작이 죽고 없었던 탓에 현명한 판단을 못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그들의 강력한 자금력에 비하면 허탈할 정도의 허약함이었다.
왜일까?
그것은 바로 그들의 세력 중에 강인한 기사가문이 많지 않았던 탓이었다.
풍부한 자금으로 강력한 군대를 꾸렸음에도 육제후파 중에는 기사 출신들이 없었다. 기사가문은 모두 왕실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왕실에 비하면 육제후는 명분이 없지. 진짜 충성을 바칠 줄 아는 인재를 끌어 모으는 정당성이 왕실에는 있고, 육제후에게는 없네.”
나는 또다시 후디니 자작의 통찰에 놀랐다.
후디니 자작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네. 그 존재만으로 나라의 구심점이 되는 명분을 가진 왕실, 돈줄을 틀어쥔 육제후. 나는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맞춰야겠다고 말일세.”
그래서 그는 왕실파의 일원인 우리 가문에 혼담을 제안한 것이었다.
예전엔 몰랐는데 이제 보니 꽤 현명하잖아, 이 양반?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겠다.
“자작님의 통찰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허허허! 내 말을 듣고 감탄을 했다면, 자네 역시 그리 생각했다는 뜻이로군?”
또다시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는 후디니 자작이었다.
뜨끔하여 아무 대꾸도 안 하는 내게 그가 말했다.
“역시 재작년에 밀을 산 건 우연이 아니었군. 아무리 봐도 아쉽단 말이야.”
“네?”
“난 사실 사윗감으로 자네를 원했거든. 하지만 쿤트 자작의 입장에서도 맏아들인 아서를 제쳐 둘 수 없었을 테니 별 수 없었지만. 하기야 그도 사윗감으로 나쁘지 않고.”
“하, 하하. 전 일개 상인에 불과합니다.”
“글쎄. 그건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자네가 정말 일개 상인에 불과했는지 아니면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과도 같은 사람인지 말일세.”
하하, 웅크리고 있는 드래곤이라니. 이거 부끄러운데.
후디니 자작은 결국 약혼서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그렇게 약혼이 성사된 것이다. 약혼서약서는 그와 내가 한 장씩 나눠 가졌다.
“아무튼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게. 자네의 수행원들에게도 숙소를 마련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있다 저녁식사 때 봄세. 아, 레이라는 뒤뜰의 정원에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나 나눠보게.”
“네.”
그가 떠난 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서 레이라가 있다는 뒤뜰로 향했다.
봄을 맞이하여 각양각색의 꽃이 화사하게 핀 정원에 이르렀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정원은 아름다웠다. 정원 중앙에 동그란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는데, 한 의자에 레이라가 앉아 있었다.
긴 블론드를 내려뜨리고 화사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무척 아름다워 보였다.
반가움과 심란함이 동시에 일었다.
전생의 내 마누라. 이제는 아서 형님의 아내가 되어야 할 여자다. 물론 그녀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없다. 다만 전생 때 나에게 쓰라린 고통을 안겨 주었던 그녀와 또다시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 착잡할 따름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꽃을 구경하며 티타임을 즐기던 레이라가 일어서서 인사했다. 나 역시 고개 숙여 화답했다.
“또 뵙는군요. 후디니 자작 영애 레이라.”
“그러네요.”
“이제 곧 형수님이라 불러야 하겠군요.”
“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허, 저리 귀여운 표정이라니. 정말로 그 여편네 맞나?
2년 전에 처음 봤을 땐 다 가식인 줄 알았는데, 편견에서 벗어나 지금 다시 보니 정말로 그녀는 마음씨가 순수해보였다.
“저기……. 아서 대공자님께서는 어떠신가요?”
레이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해 궁금한 건 당연한 일이리라.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주 좋아서 싱글벙글하고 있죠. 소문난 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니 누군들 좋지 않겠습니까.”
“어마, 카록 남작님도 참.”
레이라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곧 다시 내게 물었다.
“제가 쿤트 가문의 여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언 같은 걸 해주실 수는 없나요?”
“좋습니다. 우리 쿤트 가문의 여인으로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원칙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내 말에 레이라가 눈을 빛냈다. 정말 아서 형님의 부인으로서 잘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다.
“첫째는 근검절약입니다.”
흠칫!
레이라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으흐흐.
나는 내심 음흉하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
“둘째는 근검절약입니다.”
이젠 아예 뜨악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레이라.
“셋째도 넷째도 근검절약입니다.”
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혼란스러워 하던 레이라는 잠시 후 기죽은 얼굴로 물었다.
“……다섯째도 근검절약인가요?”
“아니요.”
“그럼요?”
“가정교육입니다.”
전생의 내 망나니 아들래미를 떠올리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레이라는 내 말에 우울했는지 차만 홀짝거렸다.
역시나.
아직 성격까지 더러워진 건 아니지만, 사치는 그녀의 천성적인 버릇이었던 것 같다.
잠시 후 그녀는 기운을 차렸는지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요. 근검절약과 가정교육에 힘쓰겠어요.”
“괜찮으십니까? 많이 실망하신 듯한데.”
“네.”
그녀는 싱긋 웃었다.
“저택 1층 홀에 있는 몬스터 박제를 보면 아시겠지만, 우리 후디니 가의 식구들은 다들 허영심이 있답니다. 저 역시 예쁜 옷과 장신구로 저를 꾸미는 걸 좋아해요.”
그녀의 솔직한 말에 나는 흥미가 들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근검절약이 쿤트 가문의 철칙이라면 지켜야겠죠. 아쉽지만…… 그래도 이번 혼담이 싫어진 건 아니에요.”
“어째서죠?”
“쿤트 가문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제 남편이 되실 아서 대공자께서는 지금껏 쿤트 자작님 대신 영지를 다스려온 능력 있는 분이라고 들었어요.”
그녀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훌륭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 훌륭한 자식을 키울 수 있다면, 저 자신을 치장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일일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나는 멍해졌다.
“예…… 그렇군요.”
“아서 대공자님께 꼭 전해주세요. 비록 부족하지만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많이 노력하겠다고요.”
“예…….”
그녀와는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눴다.
해가 떨어지고 저녁때가 되자 후디니 자작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나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혼란스러웠다.
후디니 가문의 늙은 집사가 안내해 준 숙소에서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었나.”
아서 형님의 말이 옳았다. 여자는 남자 하기 나름인가 보다. 전생에서 불행했던 나의 가정사는 나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나는 평범한 상인이었다.
특별하기를 원했지만 아무 재능도 없어서 나는 더욱 콤플렉스를 느꼈다.
그녀는 당연히 그런 내가 자랑스러울 리 없었을 것이다.
나의 아내라는 타이틀이 그녀를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더더욱 사치를 부리며 자기를 치장했던 것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누구를 탓할까.
전생의 나는 그녀의 기대치에 충족할 만큼의 역량이 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실망했다.
그저 잘못된 인연이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문득 품속에 넣어두었던 약혼서약서를 꺼내보았다. 거기엔 아서 쿤트와 레이라 후디니의 혼인을 약속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축하합니다, 형님. 축하해, 레이라.”
이번에는 부디 좋은 인연이기를.
***
다음 날, 나는 마차를 타고 영지로 돌아갔다.
약혼이 성사되자 아버지도 아서 형님도 크게 기뻐했다. 나 역시 마지막 한 줌 남은 씁쓸함을 떨쳐버리고 축하해 주었다.
이걸로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