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55화 (55/529)

<-- 55 회: 3권 - 1장. 혼담 -->

“아무래도 대흉년의 여파 탓에 경기가 죽어서…….”

“흙집군에 일하고 싶어서 환장한 빈민들이 무척 많아. 그들을 고용하면 싼값에 인부를 모집할 수 있겠군?”

“예…… 그야 그렇습죠.”

“얼마 전의 영지전도 공성전 없이 끝나서 성을 보수하는 일거리도 없을 거예요. 당분간 건축업계는 계속 불황이겠네요.”

줄리아도 잽싸게 한마디 했다. 역시 센스가 있다니까.

“새로 짓는 것보다는 제가 운영하던 기존의 병기점을 개조하면 더 비용이 싸지지 않겠습니까?”

구스 영감까지 의견을 제시한다.

당황한 라반이 말했다.

“다, 다시 생각해보니 1만 3천 레디나라면 충분할 듯싶습니다, 카록 남작님.”

2천 레디나나 깎았지만 그래도 비싸다.

“7천 레디나로 하자.”

“옛? 나, 남작님! 그 예산 갖고는 도저히……!”

울상이 된 라반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정령술로 도와주겠다. 노움에게 부탁해서 석재 건물을 지으면 돼. 그럼 석재와 인력 소요가 대폭 줄어드니 7천 레디나로 충분할 거야.”

“아! 그럼 7천 레디나로 충분합니다.”

정령술로써 수백 명의 빈민이 살 흙집군을 만들어낸 나의 위업은 라반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우리 귀염둥이 노움은 센스가 아주 훌륭하다.

노움이 만든 흙집을 보라. 생김새가 단순하긴 해도 아주 튼튼하고 아담해서 보기도 좋다.

나와 노움이 실력 발휘를 하면 초대형 병기점의 건축기간이 크게 단축될 것이다.

“그럼 저는 설계도를 작성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라반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라반이 떠난 후에도 나는 줄리아와 구스 영감과 함께 병기점 운영 방식 등을 놓고 많은 상의를 했다.

“최고 장인, 숙련 장인, 일반 장인, 그리고 도제. 이렇게 네 등급으로 장인들을 구분할 생각이야. 최고 장인은 밑의 장인들을 모두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데 당연히 구스 영감이 그 역할을 해야지. 숙련 장인은 개인 작업장에서 특별히 주문 받은 고급 병기 제작을 맡고, 일반 장인은 휘하의 도제들과 함께 군납용 병기를 대량 제작하는 일을 할 거야.”

내 말에 구스 영감이 찬성했다.

“좋군요. 일반 장인은 군납용 병기를 만들면서 도제들도 가르치고 실력을 키우고, 실력이 뛰어난 숙련 장인 이상은 개인 작업장에서 마음껏 혼신을 다한 명품을 만드는데 몰두할 수 있겠군요.”

그때, 줄리아가 입을 열었다.

“구스 최고 장인님, 혹시 연세가 들어서 은퇴한 장인 분들은 없나요?”

“그야 물론 있지요. 열정은 가득했지만 망치질할 기운이 없어 은퇴한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럼 그 분들을 품질감독관으로 채용하면 어떨까요? 일반 장인들과 도제들이 만들어낸 제품의 품질을 검토해서 불량품을 추려내는 역할을 맡는 거예요. 불량품을 없애고 품질을 높이면 그만큼 우리 병기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질 거예요.”

줄리아의 의견에 나는 박수를 쳤다.

“정말 좋은 생각이야!”

“헤헤, 그렇죠?”

“응. 역시 황금의…….”

“예?”

“흠흠! 아니, 아무것도 아냐. 너 예쁘다고.”

하마터면 ‘역시 황금의 여인!’ 하고 외칠 뻔했던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우히히.”

그런데 내 말에 줄리아는 두 뺨을 발갛게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불만쟁이답지 않게 몹시도 귀여운 표정이었다. 얘도 예쁘단 칭찬은 좋은 모양이다.

내 칭찬에 신이 났는지 줄리아는 계속해서 의견을 제시했다.

“정보 수집 단체를 조직해서 각국에 파견해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건 어떨까요? 돈은 좀 들더라도 빠르게 돈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분명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될 거예요.”

나는 또 다시 줄리아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그녀를 직원으로 채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그래, 그것도 좋겠네. 그럼 정보단체를 따로 조직해서 각국의 모든 소식을 수집하면 좋을 것 같아. 다만 문제는 수집한 그 수많은 소식 중에서 돈이 될 만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캐치하는 건데…….”

“그것도 제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

줄리아는 의욕을 불태우며 나섰다.

“네가?”

“네. 병기점 운영이랑 충분히 병행할 수 있어요. 제게 맡겨주시면 돈 될 만한 소식만 쏙쏙 골라서 단주님께 알려드릴게요.”

그것은 나 역시 원하던 바였다.

줄리아 정도의 능력자라면 어떤 정보가 돈 될 만한 정보인지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상재만 따지면 나보다 더 뛰어난 그녀이니까.

“그래, 그렇게 해. 다만 지금은 돈이 나갈 일이 너무 많으니까 정보단체 조직 건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네.”

초대형 병기점에 정보단체까지 맡으면 줄리아의 권한이 막강해진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난 줄리아를 장차 내 상회의 2인자로 만들 생각이니까.

전생에서도 황금의 여인이라 불릴 정도로 나보다 훨씬 상인으로써 성공했던 그녀였다.

그렇게 상재가 철철 넘쳐흐르는 애를 놔둬서 뭐해?

부단주로 앉혀놓고서 나대신 상회의 경영을 도맡게 하면 만사형통인데.

나는 그저 단주로써 중요한 의사결정만 하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한 조직의 수장이라고 다 아서 형님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라는 법은 없잖아.

함께 논의하면서 초대형 병기점의 조직도가 디테일하게 짜여졌다.

그렇게 열심히 상회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낼 때, 어느 날 가문의 하인 하나가 날 찾아왔다. 아버지가 부른다는 것이었다.

날 왜 부르지?

그날 오후에 나는 저택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났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네가 해줘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뭐든 말씀해보세요.”

“후디니 자작가로 가서 혼담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하여라.”

그 말에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그래. 후디니 자작가와 사돈을 맺기로 했다. 아, 그리고 이것도 전해라.”

아버지는 봉인된 서류를 내게 건넸다.

“약혼서약서다. 지금 당장은 바빠서 결혼식을 치를 수 없으니 가을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약혼부터 성사시키자꾸나.”

“예, 저도 그게 좋다고 봅니다.”

지금은 영지전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게다가 여름에는 전염병이 돌 것이다. 그러니 가을에 혼인하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합했다.

다만 그 사이에 상대방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 약혼서약을 채결해서 혼인을 확정짓자는 것이다.

마침 잘됐다.

나도 한 번 레이라를 만나보고 싶었던 참이다.

조금은 반성적인 시각으로 전생의 나의 아내였던 그녀를 살펴보고 싶다.

정말 그녀는 처음부터 사치스럽고 허영 많은 표독한 여자였을까?

아니면 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을까?

“제게 맡겨주세요. 약혼을 성사시키고 오겠습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세 명의 용병이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제 용병길드에 경험 많고 일처리가 능숙한 용병 세 명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이들이 날 찾아왔다.

이름은 각각 톰, 로크, 빌리. 다들 40대 초중반의 중년인이었는데, 셋 다 용병 경력만 20년이 넘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우리 영지전에도 참전했다고 한다.

나는 그들을 후디니 자작령에 왕복하는 동안 호위로 쓰기로 했다.

어차피 중급 정령사인 나는 예전처럼 오우거라도 만나지 않는 한 위험할 일은 거의 없었다.

밤에 잘 때도 노움에게 불침번을 부탁하면 된다.

하지만 우선 마차를 몰아줄 마부가 필요했다.

게다가 불 피우고 요리하는 등의 야영 준비라든지 몬스터를 격퇴하고 난 뒤에 뒤처리를 시킬 사람이 있으면 편리하지 않은가.

사실상 그들은 경호보다는 잡일을 시키려고 고용한 용병들인 셈이다.

나는 사두마차에 올랐다.

톰과 로크가 마부석에 앉았고, 빌리는 마차 천장 위에 올라탔다.

톰이 채찍질을 하자 네 마리의 말이 마차를 끌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는 길은 순탄했다.

몬스터나 산적과 맞닥뜨리지도 않았고, 마차 역시 레던 왕성에서 구입했던 고급스런 사두마차라서 그런지 고장이 발생하지도 않았다.

낮에는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노움과 운디네를 불러서 하루 종일 노닥거리며 놀았고, 밤에는 밖에서 야영할 용병들을 위해 흙집 한 채를 지어주고 나는 마차의 쿠션 위에서 안락하게 잠을 청했다.

그런데 사흘째.

마차를 타고 길을 가는데, 문득 운디네와 소꿉놀이를 하던 노움이 퍼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주인님. 147미터 앞에 오크 11마리가 숨어 있어.

“오크?”

-응.

오크 11마리라. 보통 병사 15명이 있으면 싸워볼 만한 숫자였다.

우리는 나와 용병들까지 네 명.

수적으로는 크게 불리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중급 정령사인 이 몸이지.

나는 마차의 창문을 열고 용병들에게 말했다.

“100미터쯤 앞에 오크 11마리가 매복해 있다.”

내 말에 용병들은 화들짝 놀랐다. 11마리라면 숫자가 너무 많았던 까닭이었다.

오크는 사람과 평균키는 비슷하지만 근육질에다 집단전에 능숙하기 때문에 숙련된 용병과 전투력이 맞먹는다.

나는 긴장한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재차 말했다.

“내가 처리할 테니 너희는 오크들이 내게 접근 못하게 견제만 하면 된다.”

그제야 용병들은 안심했다.

“알겠습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70미터쯤 더 갔을 때 마차를 멈춰 세웠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려 전투태세를 갖췄다.

미련한 오크들은 아직 우리가 자기들의 매복을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 그럼 이쪽에서 쓴맛을 보여줘야겠군.

“노움. 트랩으로 숨어 있는 녀석들을 파묻어버려.”

-응!

노움이 슝 날아갔다. 이윽고 정령친화력이 약간 소모되는 느낌과 함께 ‘취이익!’ ‘취익!’ 하는 오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잠시 후 노움이 커다란 삽을 어깨에 맨 채 돌아와서 해맑은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 네 마리나 묻어버렸어. 나 잘했어?

오크 네 마리를 생매장시켜버리고는 순진무구하게 자랑하는 노움. 좀 섬뜩하다만, 요 귀염둥이 같으니!

“응, 우리 노움 너무 잘했네.”

-에헤헤.

날 보호하기 위해 삼각대형으로 선 톰, 로크, 빌리는 우리의 대화를 듣곤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비로소 오크들이 수풀 뒤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세 마리가 생매장 당했으니 남은 건 8마리였다.

“취이익! 마법사!”

“마법사부터 죽인다, 취익!”

“제일 먼저 찢어 죽인다!”

오크들은 날 마법사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기야, 녀석들이 마법사는 봤어도 정령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겠지.

아무튼 동료애만큼은 투철한지 오크들은 불타는 분노로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죽여라!”

“취이익!”

오크들은 제각각 돌도끼나 나무창 등을 꼬나 쥐고 우르르 덤벼들었다.

“트랩.”

나는 노움을 시켜서 녀석들 앞에 트랩을 설치했다. 이윽고 쿠르릉! 하고 땅바닥이 무너지면서 오크 세 마리가 구덩이로 다이빙을 했다.

“취이이익!”

“취이익!”

아무리 힘세고 날랜 오크라도 5미터 깊이의 구덩이에서는 빠져나올 수 없겠지.

그러나 뒤따르던 다른 오크들은 침착하게 점프를 해서 구덩이를 건너뛰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스 핸드.”

나는 흙의 손 두 개를 만들어 오크들을 휙 떠밀었다.

“취익!”

“마법! ㅤㅊㅟㄱ!”

구덩이를 건너뛰는 오크들을 친절하게 떠밀어주니, 녀석들은 줄줄이 구덩이로 추락했다.

“노움, 이제 묻어버리렴.”

-응.

노움이 삽으로 땅을 푹 찍자 오크들이 떨어진 구덩이가 흙으로 매워졌다. 안에서 오크들의 비명이 잠시 들렸지만 완전히 파묻힘과 동시에 멎어들었다.

“취, 취이익!”

“이상한 마법!”

남은 세 마리의 오크는 공포에 질려 주춤거렸다. 좋아, 이제 슬슬 마무리해볼까.

이번에는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워터 스피어로 저 못생긴 것들을 찔러 죽이자.”

-……응.

운디네는 휙 날아올라 오크들에게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물 덩어리가 생성되더니 세 자루의 창 모양으로 변했다.

촤좌좍― 콰지직! 콰악!

“취익!”

“ㅤㅊㅟㄱ!”

물의 창이 순식간에 오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정확하게 네 마리 모두의 심장으로. 원 샷 원 킬의 정확도였다.

물은 흙보다 가볍고 잘 변화하기 때문에 이런 공격스킬은 노움보다는 운디네에게 시키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노움, 땅에 묻은 오크들이 죽었으면 다 꺼내놔.”

-응!

뒤처리는 용병들에게 맡기고 나는 사두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실력발휘를 해보니 기분이 좋았다. 오크 11마리를 순식간에 처리하다니. 내 실력도 이쯤이면 상당한 수준이잖아? 으흐흐흐.

용병들은 오크들의 머리를 잘라서 챙긴 뒤 마차에 타고 출발했다. 오크는 인근의 영주나 왕실 관청에 갖다 주면 상금을 주기 때문에 돈이 된다.

그 뒤로 날 바라보는 용병들의 눈빛에 존경이 가득해졌다. 코앞에서 오크 11마리를 순식간에 처치하는 걸 보고 반한 모양이다.

훗, 명예가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아는데도 사람들이 알아서 존경을 해주니, 나란 녀석은 너무 잘나서 탈이라니까.

***

별 탈 없이 후디니 자작령에 도착한 나는 곧장 후디니 자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저택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신분을 확인받고는 용병들에게 사두마차와 함께 대기할 것을 명한 뒤에 안으로 들어섰다.

안내를 받으며 1층 홀에 도착했다.

몬스터 박제가 사방에 장식된 악취미적인 홀에서 나는 후디니 자작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고 보니 한쪽에 내가 3천 레디나를 받고 팔아치운 오우거도 박제되어 있었다. 새삼 그때의 치열한 싸움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중급 정령사에 운디네까지 있고 유술까지 익힌 지금이라면 그때보다 더 잘 싸울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오랜만이네, 카록 공자. 아니, 이젠 남작이라 불러야겠군. 하하하.”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후디니 자작, 바로 내 전생의 장인어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흉년 때 돈 좀 만져서인지 신수가 훤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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