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53화 (53/529)

<-- 53 회: 3권 - 1장. 혼담 -->

“안 돼!”

나도 모르게 비명 같은 고함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응? 뭐가 안 된다는 게냐?”

아버지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아차.

찔끔한 나는 서둘러 변명을 했다.

“별 게 아니고 레이라 영애는 아서 형님의 배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째서냐?”

뜬금없는 내 말에 아버지가 의문을 표했다.

“제가 알기로 레이라 영애는 씀씀이가 헤프고 허영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여인이 장차 이 영지의 안주인이 될 수는 없잖습니까.”

“그걸 네가 어찌 아느냐?”

그야 전생 때 내 마누라였으니까요!

……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라서 나는 대충 둘러댔다.

“전에 후디니 자작가에서 밀 4만 포대를 매매할 때 우연히 들은 이야기입니다.”

“으음…….”

내 말에 아버지는 잠시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곧 입을 다시 열었다.

“뭐, 어떠냐. 나이도 어리고 예쁜데 그거면 됐지 뭘.”

별거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시는 아버지. 나는 황당해져서 아버지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예쁘면 장땡이냐!

아버지는 내 어깨를 툭툭 때리며 껄껄 웃었다.

“크하핫! 물론 농담이다.”

정말 농담 맞죠? 그렇죠?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벌써 독수공방을 한 지 15년째라는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아서 형님과 릭 형님의 친모 되시는 분과 사별하고서, 첩으로 들인 내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외로운 나날을 지내야 했던 아버지였다.

덕분에 여자 한 명 없는 삭막한 우리 집안.

그러다 보니 아버지도 내심 며느리가 생기는 걸 반기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염려 말거라. 어떤 여자든지 아서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부인에게 휘둘려서 일을 그르칠 녀석이 아니지 않으냐. 게다가 후디니 자작가와 맺어진다면 우리로서는 크나큰 이득이지.”

끄응!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아서 형님은 나와 달리 강인한 심성의 소유자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뚜렷해서 아닌 건 절대로 아닌 사람이 바로 아서 형님이다. 형님이 레이라에게 휘둘릴 것 같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후디니 자작가는 대흉년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 들였다. 그런 가문과 사돈이 되면 우리 가문의 정치적인 입지 역시 크게 상승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그 여편네는 전생 때 나랑 17년을 산 여자다! 내 아들까지 낳았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서 형님과 결혼한다고?

끄아악!

안 돼! 이상해! 기분 나빠!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해야 했다.

물론 전생의 일들이야 지금은 다 없던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해! 내 마음이 용납되지가 않아! 무조건 막아야 한다.

나는 아서 형님을 찾아갔다. 마침 아서 형님과는 철광석 광산 문제 등으로 상의해야 할 안건도 있었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이런 젠장.

아서 형님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아주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업무를 본다. 이제야 결혼을 하게 된 30대 사내. 아주 좋아 죽네, 죽어. 얼마나 좋으면 내가 노크하고 집무실에 들어왔는데도 모를까.

“형님, 저 왔습니다.”

“크헉!”

기습이라도 당한 듯 깜짝 놀란 아서 형님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쪽팔림을 무마했다.

“카, 카록 왔구나.”

“초대형 병기점 설립 건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구스 영감도 기꺼이 받아들였고요.”

“잘됐구나. 가문에서도 투자를 하기로 했으니 필요한 투자비용 견적이 나오는 대로 알려다오.”

“예. 그리고 이제 슬슬 철광석 광산 매입 대금 6만 레디나를 콘월 자작가에 보내야 합니다.”

“그랬지. 돈은 준비됐다.”

“저도 준비됐습니다.”

나는 1만 레디나짜리 왕실 어음 세 장을 꺼냈다. 광산은 나와 가문이 반반씩 투자하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3만 레디나만 내면 된다.

돈이 꽤 크기 때문에 아서 형님이 직접 가문의 기사를 시켜서 콘월 자작가에 전달하기로 했다.

“초대형 병기점 설립에다가 철광석 광산까지 매입하다니, 가뜩이나 영지전을 치르고 난 뒤라서 돈이 부족한데 지출만 계속 커지는구나.”

아서 형님은 한숨을 쉬며 투덜거렸다.

“어려울 때일수록 투자해야죠. 철광석 광산과 초대형 병기점은 서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막대한 이익을 발생시킬 겁니다.”

“그건 네 말이 맞다. 군수품 사업은 항상 큰 이익이 발생하는 법이니까. 올 가을이면 전쟁배상금이 들어오니까 재정 문제도 곧 해결되겠지.”

지금이야 돈 나갈 데가 많아 재정 운영이 어렵겠지만, 올 가을에는 전쟁배상금이 총 9만 레디나가 들어온다. 거기다가 추수기간이니 식량도 풍족해진다.

나는 아서 형님과 더 대화를 나누며 철광석 광산의 운영을 쿤트 가문에 맡기기로 했다.

광산을 운영하려면 총괄할 책임자도 필요하고 광부들도 보호해야 한다.

거기다가 철광석을 운반할 병사들도 필요했다.

일 얘기가 끝나자 나는 넌지시 혼인 문제를 꺼냈다.

“혼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말에 아서 형님이 반색을 했다.

“하하, 너도 들었느냐? 좋은 일 아니냐. 후디니 자작가라면 재력이 풍부한 가문이니까 사돈지간이 되면 정략적으로 매우 이로울 게다.”

그러니까 그런 정략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잖아!

“그리고 신부도 젊고 예쁘고요.”

내 말에 아서 형님은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다. 이런 호색한 형님 같으니.

“헛! 험험. 그, 그런 건 상관 안 한다.”

정말?

“정말요?”

나는 내 심정을 그대로 입으로 내뱉었다.

“그, 그렇고말고.”

아서 형님은 얼굴을 붉힌 채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형님도 남자였다.

저렇게 좋아 죽는 아서 형님을 보니 어떻게 반대 의견을 내야 할지 암담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게 다 아서 형님을 위한 길이다. 그 여편네가 이 영지의 안주인이 되어서는 안 돼!

내 마음의 안식!

그리고 우리 가문의 경제 안녕을 위해서!

마음을 굳게 먹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님, 이런 말씀 드리기에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만…….”

나는 정말 조심히 말했다.

“의견이 있다면 주저 없이 말해보아라.”

“예. 사실 후디니 자작 영애 레이라에 대한 평판은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나는 레이라의 됨됨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서 형님은 내 말에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음, 그랬구나.”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하는 건 아닌지 싶습니다. 우리 가문의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없고 능력도 뛰어나기로 평판이 자자한 형님이신데 보다 더 좋은 배필도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아서 형님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추켜세우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서 형님은 고개를 저었다.

“현 상황에서 후디니 자작가보다 더 좋은 사돈 가문은 없다. 후디니 자작가는 정치적으로 우리 왕실파와 육제후파의 중간에 있는 중립적인 입장이다. 지난번의 밀거래로 육제후파와 가까워졌지. 이번 혼담은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시 재고시킬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으윽.

“그건 그렇습니다만…….”

“게다가 소문만 믿고 레이라 영애를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직접 보고 판단해야지. 게다가 설사 그런 단점이 있다 해도 어디 결점 없는 사람이 있느냐? 장차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녀 또한 달라질 것이다. 그 점은 염려 말아라.”

“아…….”

아서 형님의 말씀은 지극히 지당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다.

기본적으로 타고난 성향은 있겠지만 누구를 만나고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전생의 경험만을 바탕으로 섣불리 판단해버린 것은 아닐까?

게다가 전생에 그녀로 인해 아픈 일을 당한 경험이 그녀를 나쁘게 판단해버린 건 아닐까.

심사가 복잡해져서 더 이상 아서 형님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별 말씀을요.”

***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아서 형님이 내 전 마누라 레이라와 다정하게 서 있었다.

아서 형님이 내게 말했다.

“카록! 축하해다오. 드디어 나도 아빠가 되었다.”

“정말입니까? 축하드립니다, 형님!”

“하하하! 자, 여기 내 아들이다.”

그러자 아서 형님 뒤에 숨어 있던 어린 사내아이가 배꼽이 튀어 나왔다.

아직 어려서 귀엽지만 잔뜩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히죽거리는 불량한 웃음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

저 얼굴을 어찌 잊으랴?

바로 전생의 내 망나니 아들이었다.

“내 아들이다. 장차 우리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이지. 너도 이제 삼촌이 되었구나. 하하하!”

“삼촌.”

하고 망나니 아들내미가 날 보며 히죽거린다.

“으아악! 안 돼!”

나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난 후에도 한동안 헉헉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젠장 맞을, 꿈이었구나.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한밤중이었다.

너무 놀라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운디네를 소환했다.

-주인님…… 아파?

운디네는 귀여운 눈망울을 글썽거리며 날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혼란스런 내 감정이 운디네에게도 전달되었나 보다.

나는 운디네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달랬다.

“아니야, 난 멀쩡해. 안 좋은 꿈을 꾸었을 뿐이야. 그보다 날 좀 씻겨줄래?”

고개를 끄덕인 운디네는 물 덩어리를 소환해서 내 몸을 한바탕 씻겨주었다.

입고 있던 잠옷과 함께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이윽고 운디네가 내 몸과 옷에서 물기를 빠짐없이 흡수했다.

몸이 몹시 개운해지자 착잡했던 마음도 가라앉았다.

“고마워 운디네. 역시 우리 운디네는 정말 예쁘고 착하구나.”

내 칭찬에 몹시 기쁜 얼굴이 된 운디네는 내게 머리를 슥 내밀었다. 쓰다듬어달라는 뜻이었다. 아하하.

“어휴, 우리 귀여운 운디네. 꼭 아기 같아.”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고는 그것도 모자라 꼭 끌어안고 머리에 키스까지 해주었다.

기뻐서 방긋방긋 웃은 운디네는 내가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자 알아서 돌아갔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다시 눈앞에 아서 형님과, 레이라, 그리고 망나니 아들놈의 기이한 조합이 어른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