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회: 2권 - 6장. 영지전 -->
우리는 줄리아가 구해놓은 고급스런 마차를 타고 레던 왕성을 떠났다.
사업에 손댔다가 파산한 귀족이 쓰던 마차라서 승차감이 무척 쾌적했다.
앞으로 이걸 타고 다녀야겠군.
작위와 영지를 받고 전도유망한 직원 둘, 그것도 끝내주는 미녀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다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금의환향이로다.
억세고 강인한 줄리아였지만 레던 왕성을 떠나본 적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혹시 몬스터를 만나면 어쩌죠?’ ‘왜 용병을 한 명도 고용하지 않은 거예요!’ ‘산적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요? 절 납치해서 늙은 귀족에게 비싸게 팔 게 틀림없어요!’ 등등 쉬지 않고 걱정을 드러내며 날 괴롭혔다.
그래서 나는 노움과 운디네를 소환했다.
내가 정령사라는 사실을 알고 줄리아는 더 이상 걱정을 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 귀염둥이 정령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어머머!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가!”
-헤헤, 나 귀여워.
“꺄악!”
줄리아는 노움을 와락 끌어안고 비명을 질렀다. 시스도 처음 보는 운디네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나는 정령들에게 두 사람과 놀라고 시켰고, 덕분에 마차 안은 시끌벅적했다.
마차는 고용한 젊은 마부가 끌고 있었는데, 홀로 묵묵히 마차를 모는 마부를 보니 미안해져서 질 좋은 육포 몇 개를 간식거리로 주었다.
밤이 되자 적당한 야영지에서 흙집을 짓고 노움에게 불침번을 서게 했다.
마차 안에서는 시스와 줄리아가 자고 마부와 나는 흙집 안에서 노숙했다.
우리 소중한 시스를 차가운 흙바닥에서 자게 할 수는 없으니까.
어딜 던져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 줄리아라면 모를까.
다음날 아침에는 줄리아가 목욕을 하고 싶다고 또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다.
나는 운디네를 시켜서 모두를 10초 만에 깨끗이 씻겼다. 몸은 물론 옷까지 깨끗이 빨고 수분기도 모조리 빨아들여 뽀송뽀송해졌다.
순식간에 기분 좋은 샤워를 한 기분에 줄리아는 무척 기뻐했다.
그때부터 마차에 오래 앉아 있다가 엉덩이에 땀이 차면 수시로 운디네를 불러달라고 졸라댔다.
하여간 정말 시끄럽고 바라는 게 많은 직원이었다. 매사에 불만이 많을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더니 정말인가보다. 근데 그렇게 살면 행복할 것 같으냐?
그렇게 여드레 동안 이동한 끝에 마침내 쿤트 자작령으로 돌아왔다.
멀리서 보이는 쿤트 성을 보자 새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기쁨이냐고?
천만에.
하루에 네댓 번씩 불평불만을 드러내는 줄리아랑 한 마차를 타고 여행해봐라. 여행 끝나는 날이 감옥에서 출소하는 날만큼 기쁠 테니.
정말 괴로웠다.
내 전생의 마누라가 생각날 정도였다.
“후아! 정말 힘들었어요.”
마차에서 제일 먼저 훌쩍 뛰어내리며 줄리아가 말했다. 울컥한 나는 노움을 시켜서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다. 네가 그런 말 하지 마!
내 정신적 피로가 너 때문이라고!
“그런데 상회 사무실은 어디에요?”
“따라와.”
나는 수고한 마부에게 금화 한 닢을 팁으로 쥐어주며 마차는 ‘맥스의 쉬어가는 집’ 뒤뜰에 세워놓으라고 시켰다. 그리고 두 사람을 데리고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을 본 줄리아는 벙찐 표정이었다.
“레스토랑?”
“하하핫. 레스토랑 건물을 사서 그래도 쓰고 있거든. 어때? 인테리어가 친숙해서 좋지?”
“네. 장식 하나 없이 좀 후진 것만 빼고요.”
요 불만쟁이를 확 그냥!
그때 주방에서 차를 타고 있던 한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단주님, 오셨습니까? 그리고 그 분들은……?”
“인사해. 시스는 알지? 이쪽은 줄리아 로렌. 둘 다 오늘부터 우리 상회의 직원이다.”
“네? 정말요?”
한센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드디어 업무지옥에서 탈출했다는 표정이군.
한센은 이미 안면이 있는 시스에게는 가볍게 인사하고 줄리아에게 인사했다.
“전 한센이라고 합니다. 어릴 땐 약재상 일을 했고 카록 곡물 상회의 직원이 된 지는 1년째입니다.”
“반가워요, 한센. 저는 유서 깊은 로렌 가문의 마지막 후손으로 태어난 줄리아에요. 그래봤자 몰락귀족이니 그냥 편히 대하셔도 좋아요. 얼마 전까지 레던 왕성에서 고급 레스토랑의 오너로 활동했어요. 잘 부탁해요.”
“아, 네…….”
나 참.
유서 깊은 로렌 가문, 귀족, 고급 레스토랑 오너 등등. 줄리아는 은근슬쩍 자랑을 섞어서 기선제압에 나섰다.
한센은…… 뭐, 그냥 기선제압 당했다.
이로서 상회의 2인자는 줄리아로 낙찰이었다.
나는 한센으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상회에 대한 모든 사항을 가르치라고 한 뒤에 사무실을 나섰다.
아버지와 형님께 안부 인사 겸 작위와 영지를 받을 사실을 말씀드려야 했기 때문이다.
***
“예? 전쟁이요?”
소식을 듣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전쟁이라니?
내 전생 때는 혼트 제국이 침공하기 전까지 우리 영지가 영지전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다.
놀란 나의 물음에 아서 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아직은 나의 추측에 불과할 뿐이라서 확신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 쿤트 자작령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페트람 자작령이 인접해 있고, 동쪽으로는 몰스 자작령과 경계를 맞대고 있다.
참고로 내가 새로 하사 받은 영지는 페트람 자작령에서 남쪽으로 더 가면 있다.
아무튼 남쪽과 동쪽에 붙어 있는 두 이웃 영지는 지금 대흉년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멀쩡하고 오히려 외부로부터 유입된 빈민을 모두 수용하여 인구가 늘어났으니 배 아파할 만도 했다.
게다가 전생의 기억도 그들 두 자작은 탐욕이 많은 인물들로 알고 있다.
그들이 손잡고 우리 가문을 침공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충분히 그럴 만한 작자들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내가 비록 미래를 알고 있지만, 역시 나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녀석이구나.
이렇게 될 줄을 미리 예측 했다면 미리 그 두 놈에게 손을 써 두었을 텐데.
여하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겠지.
내가 말했다.
“제 생각도 형님과 같습니다. 우리 쿤트 가문은 지난 내전에서 아버님께서 큰 공을 세우셔서 자작가로 승격되었고 영지도 넓어졌습니다. 게다가 대륙을 강타한 대흉년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성공했으며, 심지어 저까지 작위와 영지를 받았습니다. 누가 봐도 우리 쿤트 가문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얼굴에 뿌듯함과 자부심이 드러났다.
“이렇듯 이웃영지의 급부상은 그들에게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겠죠. 우리가 더 크기 전에 없애고 싶은 심리가 작용했을 겁니다. 우리의 영지와 재산을 빼앗고픈 욕심도 있었을 테고요.”
아버지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깟 놈들, 얼마든지 와보라고 해라. 내 힘을 과신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런 잔챙이 같은 작자들은 아무리 쳐들어와도 두렵지가 않구나.”
아버님, 그게 바로 과신이라는 거랍니다.
아서 형님이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합하면 병력만도 2천을 헤아리니 얕봐서는 안 됩니다. 용병이나 징집병을 합치면 더 많아지겠지요.”
내가 말했다.
“그들의 자금 사정을 생각하면 용병은 많이 고용 못할 테고, 징집병이야 훈련도 안 된 잔챙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2천 병력은 확실히 위협적이군요. 우리 가문의 정규군은 5백 명에 불과한데요.”
병력의 차이가 4배다.
이건 정말 위협적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혼자서 100명분의 몫을 한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대신 우리는 그들보다 자금 사정이 좋으니 용병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다. 약간 불리하지만 해볼 만하겠어.”
“해볼 만하다면 됐다. 전투가 개시되면 내가 득달같이 적진을 돌입해 두 놈의 모가지를 따오마.”
아버지는 오랜만에 투지를 드러냈다. 싸우고 싶어서 근질거리시는 모양이었다.
하긴, 페트람 자작가나 몰스 자작가에는 아버지만 한 실력자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손잡은 것일 테고…….
어라?
가만…….
나는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두 사람은 아버님이 두려워서 손을 잡았을 겁니다. 그렇죠?”
“그야 물론이지. 이 일대에서 아버님을 당할 자가 어디 있느냐?”
아서 형님의 맞장구에 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서 어깨를 으쓱하셨다.
“그럼 그들의 군대가 도중에 합류해서 칩입하겠습니까?”
“흠, 내 생각으로는 아닐 것 같다. 페트람 자작군은 남쪽에서 몰스 자작군은 동쪽에서 양방향으로 공격해오겠지. 우리 군대를 분산시키는 효과도 노리고 한 쪽은 아버님을 피할 수도 있으니까.”
“바로 그겁니다!”
“응?”
아버지와 아서 형님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날 쳐다봤다.
난 웃으며 말했다.
“생각해보십시오. 형님 말씀대로 그들은 각각 남쪽과 동쪽에서 공격해오겠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두 군대의 진군 속도는 어떨까요?”
“응? 그야…….”
대꾸하려던 아서 형님도 뭔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답게 내 말의 요지를 깨달았다.
“그렇군. 그 겁쟁이 같은 놈들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행군할 거야. 먼저 싸우는 쪽이 나와 맞붙게 될 테니까! 서로 먼저 싸우지 않으려고 들 테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그들을 각개격파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겁니다.”
“좋은 생각이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아서 형님도 기뻐했다.
나는 계속 말했다.
“형님, 가문에 전쟁 준비로 쓸 수 있는 자금이 어느 정도입니까?”
“지속적인 식량 구입과 빈민 구제에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면 6천 레디나쯤 여유가 된다.”
“제가 군자금으로 5천 레디나를 더 보테겠습니다. 군마와 갑옷, 랜스를 더 구입해서 기병의 숫자를 증설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이 맞다. 기병의 숫자를 최대한 늘려서 기동속도를 높여야 각개격파에 더 용이하지. 네가 돈을 보테 준다니 당장 정규군 2백 명을 더 모집해서 기병대로 양성할 수 있겠다.”
“마침 일자리가 없는 빈민들이 많이 있고요.”
내 말에 아서 형님도 씨익 웃었다.
“바로 그거다.”
“저는 용병길드에서 용병들 쪽을 알아보겠습니다. 유사시에 기백 명은 곧바로 고용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빈민들을 훈련시킨다고 해도, 정예로 만들기는 어렵다.
그러나 용병들은 다르다.
비싸지만, 그들은 정예이다.
아버지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아. 벌써부터 준비가 척척 잘 되어가는구나. 이 기회에 두 작자들을 박살내놓고 우리 쿤트 가문을 반석 위에 올려놓자꾸나.”
높은 리스크는 언제나 그만큼의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동반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전쟁이다. 여기서 이기면 우리 쿤트 가문은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전쟁이라니…….
전생에는 없던 일이라 나는 긴장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전생에서 이미 겪어봤던 일이라서 아무 문제없었다.
물론 나의 삶은 전생 때와 크게 달라졌지만, 커다란 역사의 흐름은 변함없었다.
이번의 영지전은 나 한 사람이 행한 결과로 일어난 새로운 흐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