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7화 (37/529)

<-- 37 회: 2권 - 3장. 알현 -->

에이 설마.

“알게 될 걸세.”

잠시 후 ‘그들’이 나타났다.

황금빛의 갑옷으로 무장한 로열나이츠 두 명.

그중 한 명은 낯이 익었는데, 바로 랜달 스페어 백작이었다. 랜달은 웃음 띤 얼굴로 날 보았다.

또 한 사람은 덥수룩한 수염을 한 거구의 중년 사내였는데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었다.

“로열나이츠 단장 크로넬 그라함 백작과 부단장 랜달 스페어 백작, 어명을 받고 왔습니다.”

크로넬 그라함 백작?!

그는 오러 엑스퍼트 최상급의 실력자로 레던 왕국 내에서는 오러 마스터인 크로넬 뮤트 공작 다음으로 강하다고 알려진 기사였다. 언젠간 마스터의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기대되는 강자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랜달의 손에 들린 물건에 주목했다.

어라, 저건?

랜달이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퀸즈 블러드 한 병과 유리잔 네 개가 있었다.

에릭이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참으로 무엄한지고. 감히 포도주 애호가인 짐을 제쳐두고 자기들끼리만 환상의 포도주를 맛보았다고 자랑을 하니, 어찌 짐이 노하지 않겠는가?”

“하, 하하하…….”

나는 황당해졌다. 포도주 때문에 불렸냐?!

하긴.

애주가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충분한 맛이었지. 나도 퀸즈 블러드를 다시 맛볼 수 있다니 입에 침이 고였다.

로열나이츠 단장 그라함 백작과 랜달이 양옆에 도란도란 앉았다.

그라함 백작도 애주가였는지 거대한 덩치에 안 맞게 기대어린 눈길로 퀸즈 블러드 병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저러다가 병에 구멍 나겠다.

“운디네.”

허공에 운디네가 소환되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머리칼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귀여운 운디네는 나타나자마자 늘 그랬듯 내 뺨에 입맞춤을 하며 인사했다.

“저 술을 맛있게 만들어줄래?”

운디네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디네가 퀸즈 블러드에 정화와 치유의 힘을 불어넣는 동안, 에릭은 운디네에게 깊은 관심을 보였다.

“과연, 저게 바로 물의 정령 운디네로군. 정령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구나.”

“카록 공자는 땅의 정령 노움과도 계약을 한 실력 있는 정령사입니다, 폐하.”

랜달이 맞장구쳐주었다.

“호오 그런가? 그렇다면 노움도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가볍게 대꾸한 나는 노움도 불렀다.

-불렀어?

바닥에서 슉 튀어나온 노움.

그러자 움찔한 그라함 백작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롱 소드에 손을 가져갔다.

“흠흠!”

그라함 백작은 얼굴을 붉히며 롱 소드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덩치에 안 맞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양반이다.

“이게 바로 노움이구나. 그런데 정령이 저렇듯 귀엽게 생겼을 줄은 몰랐구나.”

국왕이 신기하다는 듯이 노움을 바라본다.

“듣기로 정령은 본디 형태가 없어 물질계에 소환될 시 정령사가 원하는 형태로 변한다고 하더군요.”

랜달이 옆에서 말했다.

“그럼 카록 공자가 원하는 정령의 외모는…….”

에릭, 랜달, 그라함 백작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날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운디네, 귀엽게 생긴 열 살 남짓한 소녀.

노움, 깜찍하게 생긴 열두 살 남짓한 소녀.

뭐, 뭐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맛! 누굴 변태 보듯이 보고 있어!

난 나의 명예를 위하여 황급히 대꾸했다.

“폐, 폐하. 이건 제 성적 취향이 아니라 귀여운 딸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형상화된 것으로서…….”

“귀여운 딸을 가져서 무슨 짓을 할 셈인가!”

그라함 백작이 벌컥 화를 낸다.

아니, 이 양반 왜 저래?!

“아무 짓도 안 합니다!”

그럼 딸에게 뭔 짓을 하는 건데!?

“아하하핫!”

에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랜달도 입을 막고 낄낄댔다.

실컷 웃고 난 에릭이 말했다.

“카록 공자가 이해하라. 그라함 백작이 제 목숨처럼 아끼는 딸도 딱 저만한 나이라서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니.”

한마디로 딸 바보라는 뜻.

“이, 이해합니다.”

“흠흠, 내가 경솔했네.”

그라함 백작도 헛기침을 하며 사과했다.

그런데 노움이 문득 에릭을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주인님. 쟤는 누구야?

움찔!

모두가 흠칫 놀랐다.

“노, 노움아. 쟤……, 아니 저분은 이 나라의 국왕 폐하이시란다.”

-국왕 폐하가 뭐야?

“이 나라에서 가장 높고 존귀한 분이라는 뜻이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존귀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안 모양이었다.

노움은 내 머리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와 에릭을 노려봤다.

-싫어. 주인님이 제일 존귀해!

얘, 얘야!

나는 얼어붙어버렸다.

“하하핫!”

젊은 국왕은 폭소를 터뜨린다.

“그래, 짐은 한낱 인간들의 왕이거늘 어찌 정령계의 아름다운 존재 앞에서 권위를 세울 수 있겠느냐. 개의치 말도록 하여라.”

-주인님, 국왕 쟤 착한 거 같아.

“으 응…….”

나는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에릭은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마침내 운디네가 맛을 개량시킨 퀸즈 블러드를 음미할 시간이 왔다.

랜달은 직접 마개를 뽑고 모두의 잔에 조금씩 따랐다.

에릭이 먼저 잔을 들었다.

“작위와 영지를 수여 받을 카록 공자를 축하하며.”

“건배!”

나도 황송하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며 건배에 응했다. 그리고 모두들 한 모금 퀸즈 블러드의 붉은 액체를 머금었다.

아, 맛 죽인다.

나는 눈을 감고 그 환상의 맛에 빠졌다.

그것은 마법처럼 깊고 몽환적인 맛이었다.

이사벨라 여왕이 강 건너에서 손짓하는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랜달도 황홀경에 빠졌다.

그라함 백작은 눈을 부릅뜨고 퀸즈 블러드가 담긴 유리잔을 쳐다본다.

그리고 우리의 국왕 폐하께서는…….

“여봐라! 왕궁 주류고에서 퀸즈 블러드를 있는 대로 가져와라! 아니지, 레드 브레스와 쓰론 블루도 가져와라!”

레드 브레스와 쓰론 블루는 퀸즈 블러드 못잖은 극상품 포도주였다.

특히 쓰론 블루는 특이하게도 푸른 빛깔이 나는 포도주인데 제작과정도 비밀에 붙여지는 대륙 최고의 명주였다.

이윽고 시녀들이 가져온 십여 병의 와인을 가리키며 에릭이 내게 말했다.

“어명이다. 이걸 모두 맛있게 만들어라!”

에릭은 운디네가 솜씨를 부린 퀸즈 블러드의 맛에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어허 이 양반. 상도를 지켜야지!

나는 대답대신 빤히 쓰론 블루를 쳐다봤다.

“저게 바로 쓰론 블루로군요.”

“그, 그렇다.”

에릭은 흠칫 놀라 말을 더듬었다.

“쓰론 블루라면 확실히 왕궁에서 두 병밖에 없다는 희귀한 명주였지요, 단장님?”

랜달의 물음에 그라함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두 병이나 있지.”

“술은 마시라고 있는 거고 말입니다.”

“물론.”

로열나이츠의 단장과 부단장의 대화에 에릭은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

“쓰론 블루는 짐의 보물이다. 그대들이 그런다고 맛이나 보여줄 줄 아는가? 짐 혼자 몰래 맛볼 것이니라.”

그러자 랜달은 나를 쳐다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니, 카록 공자 자네! 몹시 피곤한 얼굴이군? 정령술을 썼더니 무리했나?”

아하!

랜달 아저씨.

굳 잡!

“크윽, 예. 운디네를 시켜서 맛을 좋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서 한동안 정양을 취해야 합니다.”

나도 능청스레 화답해주었다.

에릭이 당황했다.

우후후후. 상도를 지키지 않으시려는 폐하. 저희는 호락호락 하지 않사옵니다.

“무슨 소린가? 겨우 그거 하나 했다고 벌써 힘이 떨어졌을 리가 없지 않으냐. 거짓말 하지 말고 어서 이 포도주들을 맛있게 만들라.”

“폐하, 제가 보기에는 몹시 힘들어 보이는데 강요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그라함 백작마저 엄숙한 표정으로 충언을 하니, 마침내 에릭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왕권이 땅에 떨어졌구나. 나라가 폐망할 징조로다.”

그러면서 친히 쓰론 블루의 마개를 뽑으니 우리는 쌍수를 들고 환호했다.

이야호!

나는 운디네를 시켜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포도주의 맛을 개량시켰다.

그 대가로 퀸즈 블러드는 물론 전생 때도 구경 한 번 못해본 쓰론 블루까지 음미하는 호사를 누렸다.

“하아…… 어째서 레던 왕국은 이런 명주가 나오지 않는 건지…….”

에릭은 경탄과 안타까움이 섞인 애증 어린 목소리로 한탄했다.

절반밖에 남지 않은 쓰론 블루를 보면 누구나 그런 소리가 나오리라.

다른 포도주는 모두 왕궁 주류고로 갖다놓았고, 우리는 퀸즈 블러드와 쓰론 블루만 음미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술은, 특히 극상품 포도주는 신비한 힘을 발휘한다. 왕과 기사들과 상인을 친구처럼 친근하게 만들어준다.

아니.

술의 위력만이 아니다.

이게 이 나라의 젊은 국왕 에릭 레던의 처세법이다.

젊음과 파격을 무기로 금방 상대와 친해지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그만의 용인술이다.

그와 허물없이 친해 보이는 랜달과 그라함 백작 두 기사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확실히 뛰어난 왕이다. 그러나 전생에서 그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일까?

그만큼 육제후의 벽이 두터웠던 탓이리라.

“하나 묻지.”

에릭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밀을 미리 대량 구입할 생각을 했나?”

미래를 알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뺨따구를 맞겠지?

“5년간 흉작이 없었으므로 작년의 밀 값은 바닥이었고, 이때 대량으로 구입해두면 내년에 올랐을 때 이문을 볼 수 있겠다는 단순한 도박이었습니다. 5년간 농사가 잘 됐는데 슬슬 흉년 날 때 안 됐다 하는 단순무식한 생각이었죠. 하하하.”

내가 웃으며 말하자 에릭도 나직이 웃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대는 도박 운이 상당히 좋은 모양이구나.”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하죠.”

사실 운 아니지만.

“초심자라고 하기에는 협상 수완이 무척 뛰어난 것 같던데.”

제가 이래 보여도 전생까지 합하면 80살이 넘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폐하.”

“듣기로 이번에는 약재 사업을 하고 있더군?”

나에 대해 좀 알아봤나 보군.

“예.”

“그것도 도박인가?”

“물론이지요, 폐하.”

어허. 이 양반. 남의 밥상에 숟가락 꽃으려고 하네?

흠. 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이기도 하군.

“듣고 싶군. 무슨 근거로 뛰어든 도박인가?”

나는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만약 내 얘기를 듣고 왕실도 약재 사업에 뛰어든다면?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내가 벌 수 있는 이익이 줄어든다.

하지만 나는 결심을 굳혔다.

돈을 벌기로 했지만, 중요한 건 돈이 아니다.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느냐다.

전염병으로 죽을 사람들을 보다 많이 구할 수 있다면, 내 이익이 줄어드는 건 감수할 수 있다.

요새 느끼는 거지만, 어쩌면 그래서 내가 이렇게 과거로 되돌아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구한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일 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병이란 인간의 건강이 안 좋아졌을 때 찾아옵니다.”

하지만 내가 미래를 안다고 떠벌릴 수는 없으니 적당히 말을 만드는 작업 정도는 해야 한다.

그래서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것을 말해 주었다.

“그렇지.”

“그리고 마법길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잘 씻지 않고 더러울수록 병이 발생할 확률이 높다고 하죠.”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돈 당연한 상식이었다.

그 결과가 발표된 이후로 한 달에 한 번 목욕을 겨우 하던 귀족들도 비로소 매일 씻는 걸 생활화하게 된 게 아닌가.

“가뭄으로 물이 말라 씻지를 못하고 먹을 식량이 없어 몸이 약해졌습니다. 전염병이 발생하기에 딱 좋은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에릭은 흠칫했다.

“이곳 폐하께서 계시는 수도는 양호합니다만, 다른 열악한 영지를 가보면 굶어 죽은 이들의 시체를 쥐들이 파먹습니다. 길거리에 그런 풍경이 흔하게 보입니다. 그걸 보고 저는 약초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

단순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몰라서 전 대륙이 당했다.

막상 눈앞에 닥친 식량문제에 패닉에 빠져 아무도 앞일을 생각 못했다.

대흉년과 전염병 이후 어느 역사학자가 발표했다.

통계적으로 전염병은 흉년 이후에 더 자주 발생했었다는 결과였다.

그 전까지 ‘통계’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탓에 아무도 몰랐던 상식이었다.

똑똑한 듯해 보여도 사실 인간은 굉장히 멍청하다. 똑같은 역사를 계속 반복해놓고도 미래를 알지 못해 계속 쳇바퀴를 돌린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

그저 미래를 알기에 대비해서 행할 뿐이지.

에릭이 말했다.

“타당성 있는 말이지만 보통은 그 정도 근거로 사업을 벌이기가 쉽지 않다. 만약 빗나간다면 실패를 떠안아야 하는 탓에 과감하게 행동할 수 없지. 보다 정확한 정보, 확실한 미래가 보여야 움직일 수 있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을 도박사로 비유했고.”

“예, 폐하.”

“그런데 말이야. 그대를 보고 있노라면 도박사라기보다는, 자신의 예측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여.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순간 나는 흠칫했다.

과연!

역시 에릭 레던은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사람 보는 안목이 노회한 군주처럼 수준급이다.

에릭은 웃으며 말했다.

“그대는 마치 이 나라의 미래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그래. 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이 나라는 10년도 못가 몰락해 반 토막이 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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