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회: 2권 - 2장. 대박이 터지다 -->
흙집을 30채쯤 지었을 때였다.
“카록!”
바빠 죽겠는데 누구야?
궁시렁거리며 돌아보았더니 아서 형님이었다.
형님은 내가 바쁠 때만 찾아오신 다니까.
“네게 서신들이 왔다.”
아서 형님은 나에게 십여 통이 넘는 서신을 건네주었다.
즉석에서 하나씩 봉인을 뜯고 펼쳐보니 밀을 사고 싶다는 편지들이었다.
이웃 영주들부터 시작해서 어디의 유명한 거상, 레토 교의 대신전 등 발신자는 각양각색이었다.
그래그래. 당신들도 밀을 구하려고 난리겠지.
눈에 띄는 편지는 두 통이었다.
하나는 육제후의 1인인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서신인데, 내 밀을 무려 포대당 4레디나에 사겠다는 제안이었다.
이야. 이거 엄청난데.
4레디나라니…… 오래 산 나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배포였다.
하기야, 돈이 썩어나는 육제후 놈들만이 부를 수 있는 가격이지.
하지만 우리 가문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육제후에게 판매할 수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 때문에 못 판다.
육제후에게 팔았다가는 아버지가 내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리려고 달려드실 것이다. 내가 이 나이에 아버지한테 매를 맞아야겠냐?!
여하튼 나는 다음 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은 레던 왕실의 직인이 찍힌 서신이었다.
읽어보니 랜달 스페이 백작을 밀 매입 교섭을 위한 왕실의 사자로 보낸다는 통보였다.
랜달 스페이 백작?
그거 엄청 유명한 인간 아냐?
이 양반 분명 그 검의 달인이라는 양반이었는데?
“스페이 백작이라면 로열나이츠의 부단장인 그 랜달 말이냐?”
아서 형님도 그 이름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랜달 스페이 백작은 로열나이츠로 복무한 지 25년이나 된 베테랑으로서 오러 엑스퍼트 상급의 실력자였다. 봄의 내전 때도 맹활약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나랑 교섭을 하는데 왜 그런 걸물을 보내는 거야? 거물이 오면 내가 주눅이라도 든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버님이 좋아하시겠구나. 랜달 스페이 백작과는 꼭 한 번 겨루고 싶다고 내전에 참전했을 때도 자주 말씀하셨다.”
호오? 이것 봐라?
이제 보니 젊은 국왕 에릭은 나이에 비해 꽤 능숙한 인물이다.
기사생활로 검술 외길을 달려온 랜달 스페이 백작과 역시나 검술 폐인인 아버지는 죽이 잘 맞을 게 분명하다.
검술 하나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이 더블로 교섭 때 날 압박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충성스런 왕실파이니 더더욱 문제였다.
요거 봐라?
어떻게든 밀을 싸게 사고 싶으시다 이거지?
물론 내 그 마음을 다 알지. 육제후랑 붙으려면 한 푼이라도 더 아껴야 하는 그 마음을 내 어찌 모르겠어?
하지만 나도 내 입장이 있단 말씀이야.
게다가…… 나도 방법이 없진 않지.
“아서 형님, 제가 왕실에 헐값으로 밀을 넘겨야 한다고 보십니까?”
내 물음에 아서 형님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말했다.
“그럴 리야 있겠느냐? 우리 가문이 왕실에 충성한다고는 하나 사업에 있어서는 정당한 값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육제후에게 밀을 넘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왕실을 위한 셈이다.”
“그렇죠? 그럼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부탁이란 말에 아서 형님은 떨떠름한 얼굴로 날 본다.
그 눈빛은 마치 이런 것 같았다.
‘또 무슨 곤란한 부탁을 하려는 거냐?’
형님, 왜 그런 눈빛으로 보세요? 제가 언제 무리한 부탁 한 적 있나요?
아, 있구나.
아서 형님께 모종의 부탁을 한 나는 즉시 말을 타고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바쁘다 바빠.
***
“보고 드립니다. 오늘 오후 1시경에 순찰 도중 로열나이츠 10기의 접근을 포착, 확인 결과 왕실에서 파견한 스페이 백작 각하의 일행임을 확인했습니다.”
병사들의 보고에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왔구나.”
이제 슬슬 카록이 부탁한 일을 실행할 차례였다.
아서는 전용 수련장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아버지 바스크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냐?”
“아버님께서 나서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호오, 뭐냐?”
바스크의 눈빛이 흥미로 물들었다.
이미 영지 일에서 손 놓은 지 오래인 바스크 쿤트 자작. 그가 나서야 할 일이라면 싸울 일밖에 없었다.
‘마침 수련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은 참이었는데 잘됐군.’
내전을 경험한 이후로 실전 경험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진 바스크는 잘됐다 싶었다.
“남쪽으로 하루거리쯤 떨어진 곳에서 처음 보는 괴물이 등장했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괴물? 피해는?”
“아직까지 피해는 없지만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괴물인 걸로 보아 흑마법사가 만든 골렘이 아닐까 의심도 됩니다.”
“흑마법사라…… 내가 가봐야겠구나.”
흑마법은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가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마법 학문이었다.
흑마법사는 발견 즉시 무조건 사살이 원칙이었다.
바스크는 즉시 기사 둘과 기병대 50기를 이끌고 남쪽으로 출진했다.
위풍당당하게 출진하는 아버지 일행을 보며 아서는 내심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지금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카록의 부탁 때문에!
‘카록, 이 녀석!’
살다 살다 아버지를 속여서 며칠간 허탕을 치고 돌아오시게 만드는 날이 올 줄이야!
카록이 점점 괘씸해졌다.
빈민 구제에 큰 공을 세우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벌써 몇 대 쥐어박았을 터였다.
***
아버지를 며칠간 빼돌리기 위한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계속해서 흙집을 지었다.
도대체가 정령친화력이 남아날 겨를이 없었다.
흙집을 짓고서 피곤해지면 곧바로 여관에 돌아가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깨어나면 다시 흙집을 지으러 갔다. 그런 나날이 며칠간 지속되었다.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빈민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는 탓에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나흘째가 되자 비로소 모든 빈민을 수용하고도 남을 만큼 흙집을 완성했다.
유입된 빈민의 숫자는 약 6백여 명.
다행히 이웃영지들이 영지민의 무단 영지 이탈을 막기 시작했기 때문에 빈민 유입은 크게 줄어들었다.
아무튼 그 6백여 명이 모두 모여 사는 새로운 빈민가가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거의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빈민들 사이에서 정령의 성자이니 위대한 정령사이니 하는 칭송이 멈출 줄을 몰랐다.
당연하지, 나 혼자서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만든 격인데!
나를 더욱 우러러 보아도 좋아!
사실 명성 같은 건 중요치 않았지만, 집과 논밭을 버리고 온 그들에게 살 곳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나 기쁘고 보람 찬 일이었다.
게다가 동그란 모양의 아담한 흙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풍경은 일대 장관이었다.
제법 특색 있는 빈민가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작을 완성한 화가의 심정 같은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당분간 저 흙집군은 우리 영지의 명물로 자리 잡을 듯했다.
나중에 위대한 성인 정령사 카록의 발자취. 이렇게 광고를 때려서 관광지로 만들까?
“휴우, 드디어 끝났구나.”
-수고했어, 주인님.
“우리 노움이랑 운디네도 수고 했지. 너희들 덕분에 저렇게 예쁜 집들이 탄생했잖니.”
-에헤헤.
노움과 운디네는 기쁘게 웃었다.
그렇게 흙집군을 보며 뿌듯해하고 있을 때였다.
“이것 참 보기 드문 풍경이군.”
응?
뒤에서 한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로열나이츠의 황금빛 갑옷을 입은 중년의 쾌활한 인상의 사내가 어느 새 내게 접근해 있었다.
“로열나이츠의 기사 분이시군요.”
“아아. 내가 랜달일세. 자네가 카록 쿤트 공자지?”
“예.”
랜달 스페이 백작인가.
드디어 왔구나.
나는 정중히 인사했다.
랜달은 40대 중반쯤의 사내였다.
체격은 아버지와 비슷하게 건장했고, 수염은 듬성듬성 거칠게 나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터프하고 쾌활해보였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는 꽤나 강하고, 또한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게 다 자네가 만든 건가?”
“예. 변변찮은 재주입니다.”
“오오, 천만에. 정말 훌륭해. 검술로는 이 많은 빈민에게 집을 만들어줄 수 없지. 정령술은 대단하군 그래.”
“지난 내전 때 맹활약을 떨치신 스페이 백작 각하만 하겠습니까?”
내 말은 진심이다. 나는 아직 이 사람 보다 약하다.
“나야 뭐 죽이는 일만 실컷 했지 살리는 일은 못하거든.”
“쓰임이 따를 뿐 옳은 뜻을 위한 길인 점은 매한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자네 정말 열여덟 살인가? 나이에 비해 말을 정말 잘 하는데.”
랜달은 감탄하며 내게 말했다.
“이제 열아홉 살입니다.”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백작 각하가 오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님께서 기뻐하시겠군요.”
“오오, 나 또한 그와는 꼭 한 번 겨루고 싶었지. 내전 때 리타 백작의 목을 베어내는 솜씨에 완전히 반했거든.”
“그래도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푹 쉬시지요?”
내 은근한 물음에 랜달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내가 이래 뵈도 오러 엑스퍼트 상급인데 피곤할까봐? 하루라도 빨리 쿤트 자작을 만나고 싶어.”
빨리 아버지와 솜씨를 겨루고 친분을 다지고 싶다 이거지?
요란 벅적하게 싸우고 난 뒤에 ‘자네 제법이군!’ ‘그쪽도 범상치 않은 솜씨로군요’ 하며 의기투합하겠다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있겠지.
사나이의 우정과 라이벌 마인드를 실컷 쌓은 다음에는 ‘사실 우리 왕실 재정이 어쩌고저쩌고…….’ 간만에 맞수를 만나 흥이 난 아버지는 ‘까짓 거 헐값에 넘겨드리지요! 카록은 제가 시키는 대로 잘 따를 겁니다, 암요!’ 하며 통 큰 사나이 정신을 발휘하시겠지.
이미 거기까지 다 예상 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사실 아버님은 여기 안 계십니다.”
“뭐라고?”
랜달은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잠시 볼 일이 있으셔서 떠나셨는데 돌아오시려면 며칠 걸릴 겁니다.”
“그, 그럼…….”
“하지만 백작 각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시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식사도 대접해드릴 겸 밀 거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아니, 나는…….”
“염려 마십시오. 아버님은 늦어도 이틀 뒤에는 돌아오실 테니 아버님과 솜씨를 겨뤄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버지는 수상한 바위 괴물을 퇴치하기 위해 떠나셨거든. 거기가 말 타고 이틀거리쯤 되지 아마?
말을 마친 나는 앞장서서 걸었고, 랜달은 똥 씹은 얼굴로 뒤따랐다.
이제 보람찬 장사를 시작해볼까?
그날 랜달은 쿤트 자작가의 저택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나와 아서 형님, 랜달이 합석하여 식사를 했고, 랜달과 함께 온 로열나이츠를 위한 자리도 따로 마련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