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회: 2권 - 1장. 팔거나 혹은 애태우거나 -->
한밤중에 야영할 곳을 찾지 못해 곤란해 하던 한센은 말을 타고 천천히 나아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곤란하네. 아무것도 안 보여.”
몬스터라도 나오면 어떡하나 소심한 한센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바보야.
등 뒤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다.
‘히이익?!’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등 뒤의 누군가가 한센의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들어 바보야.
‘노, 노움?’
비로소 한센은 가까운 곳에 카록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인님이 이 근처 아무데나 야영하래.
고개를 끄덕인 한센은 말에서 내렸다.
말을 나무에 묶어두고 근처를 둘며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와 불을 피웠다.
불로 주위가 밝아지자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어디에 있는지, 노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누가 널 미행하고 있대.
“미행?”
한센은 깜짝 놀랐다.
미행이라니? 설마 강도가 따라붙기라도 했단 말인가!
솜털이 곤두서는 공포가 밀려왔다.
-들키지 말고 대화해야 한대. 내가 주인님 말을 전할 거야.
노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공포와 혼란 속에서도 한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움은 계속 수시로 한센에게 카록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주인님이 ‘국왕과 육제후가 날 찾고 있는 건 알고 있어. 널 미행하는 건 그들이 보낸 자들이야’ 라고 전하래.
‘헉! 귀신이냐?’
한센은 기겁을 했다.
평소에는 정령들과 노닥거리기나 하는 근무태만의 단주 같다가도 이럴 땐 귀신같은 통찰력을 발휘하니 실로 불가사의였다.
하긴 이런 면 때문에 영웅 소리를 듣는 지도 몰랐다.
어쩌면 자신은 대단한 사람을 모시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인님이 ‘내가 지금 돌아가면 꼼짝없이 둘 중 한 사람에게 밀을 팔아야 돼. 국왕과 육제후 측이 양옆에서 압박하는데 어떻게 안 팔고 버티겠어?’ 라고 말하래.
-주인님이 ‘하지만 지금 팔면 비싼 값을 못 받아. 돈 많은 육제후라면 비싼 값을 받겠지만, 아버님 때문에라도 국왕에게 팔아야 하거든’ 이라고 말하래.
-주인님이 ‘국왕은 아버님을 믿고 오히려 싼 값에 사려고 들 거야’ 라고 말하래.
-주인님이 ‘그럴 순 없지. 한 번쯤은 튕겨줘야 국왕도 불안해져서 높은 가격을 부르겠지’ 라고 말하래.
연속적으로 노움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한센은 황당해졌다.
국왕을 상대로 튕기겠다니? 그것만으로도 불충 아닌가.
-주인님이 ‘국왕을 상대로 대놓고 거절은 못해. 아버님이 충성스런 왕실파이니 더더욱. 하지만 불충을 저지르지 않고도 튕기는 방법은 있지’ 라고 말하래.
-주인님이 ‘한센, 잘 들어. 넌 날 발견하지 못한 거야’ 라고 말하래.
‘뭐, 뭐라고?!’
-주인님이 ‘난 잠시 잠적할 테니까 넌 돌아가서 내 행적이 묘연해져서 찾지 못했다고 말해’ 라고 말하래.
“아, 안 돼! 그럼 난 시킨 일을 제대로 수행 못했다고 혼날 거란 말입니다!”
-주인님이 ‘걱정 마. 그렇게만 전하면 다들 알아듣고는 우리 영지를 떠날 거야’ 라고 전하래.
“하, 하지만…….”
-주인님이 ‘이 편지를 형님께 보내주면 혼나지 않을 거야’ 라고 전하래.
그러면서 노움은 편지를 한센에게 건넸다.
편지를 품속에 갈무리한 한센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고생이냐.
취직 잘못 하는 바람에 국왕 폐하를 상대로 거짓말까지 하게 생겼다!
***
-전했어.
“응, 잘했어.”
노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미행자들이 내 존재를 눈치 채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겠군.
“노움, 흙집을 없애고 내 흔적은 전부 지워줘.”
-응.
노움은 잠자리용으로 만들어둔 흙집을 허물었다.
그리고 불을 피우기 위해서 만든 구덩이도 흙을 움직여 다시 파묻어버렸다.
파팟.
모든 것이 완벽히 흙에 묻혀 버렸다.
사방에 널려 있는 발자국도 깨끗이 지우자 내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짐을 모두 챙겨서 말에 올랐다.
노움과 운디네도 내 양쪽 어깨에 폴짝 올라앉았다.
아이고, 귀여운 내 새끼들.
어째서 이렇게 귀엽단 말인가. 예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정령은 전부 이렇게 귀여운 걸까?
아니면 나만 취향이 이런 건가?
그래, 정령사가 한둘은 아니었으니까 취향도 제각각이었겠지. 누군가는 초절정의 섹시한 미녀 정령을 소환할 지도 모르고. 응? 그것도 괜찮은…… 아니야! 귀여운 노움과 운디네를 놔두고 무슨 불순한 생각을!
“운디네, 나와 말의 피로를 회복시켜줄래?”
-응.
파앗.
운디네는 허공에 물을 생성시켜서 나와 말의 몸을 깨끗이 훑고 씻겨주었다.
운디네가 만드는 물은 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치유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치유 능력은 육체적인 면에 한정된 것이지 오러나 마나, 정령친화력 등을 회복시켜주진 않는다.
“푸히히히힝!”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피로가 풀린 말은 더욱 힘차게 내달렸다.
***
한센이 돌아왔을 땐 이미 쿤트 자작가의 저택에는 란즈헬 백작까지 도착해 있는 상황이었다.
정치적으로 암묵적인 대립 관계인 볼프강 란즈헬 백작과 국왕 에릭은 저택 내에서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었다.
누가 카록의 밀을 구입하느냐가 주관심사가 된 상황에서 한센이 돌아온 것이다.
바스크 쿤트 자작, 대공자 아서, 국왕 에릭, 육제후의 1인인 란즈헬 백작과 그의 심복 에반 테일러 남작.
5인의 시선이 집중되자 한센은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꼈다.
한센의 입장에서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쿵! 쿵! 쿵!
그들 앞에서 거짓말을 해야 한다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찌 되었느냐?”
아서의 물음에 한센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게…… 아, 아무리 찾아봐도 행적을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 카록이 실종되기라도 했단 말이냐!”
아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그게…… 예! 어느 정도 뒤를 쫓아보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행적이 사라져 버려서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5인이 빤히 바라보자 한센은 겁을 먹고 한 마디 덧붙였다.
“저, 정말입니다.”
“그런가.”
란즈헬 백작은 피식 냉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적어도 가을이 되기 전까지는 계속 행방불명이겠군. 이만 가봐야겠소.”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에릭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폐하.”
그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예법으로 인사를 했지만, 그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그리 하시오.”
란즈헬 백작이 떠나자 그의 심복인 에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
에반은 한센을 한 번 무섭게 노려보더니 스윽 나가버렸다.
한센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 난 걸까봐 오금이 저렸지만, 꾸욱 참아 내야 했다.
“백작의 말이 맞는 것 같군. 짐도 이만 일어나야겠소.”
“폐, 폐하.”
에릭이 일어나자 바스크와 아서도 벌떡 일어섰다. 에릭은 그들에게 웃어보였다.
“다음에는 짐이 대리인을 보낼 테니 카록 공자에게 그리 전해주시오.”
에릭은 부드럽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예, 폐하!”
에릭은 로열나이츠를 대동하고 떠나버렸다.
그들이 떠날 때 바스크와 아서는 성 바깥까지 마중을 나갔다.
모두 떠나가자 아서는 한센을 따로 불렀다.
“네 이놈!”
“히, 히이익?!”
아서의 호통에 한센이 겁을 집어먹었다.
“감히 폐하께서 보시는 앞에서 거짓말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게냐?”
“그, 그게……!”
“후우, 겁에 질린 얼굴로 말까지 더듬으면서 억지로 거짓말을 하는 걸 보니, 분명 카록이 시킨 것이겠군.”
“마, 맞습니다.”
거의 울 듯 한 얼굴로 한센은 편지를 꺼내 아서에게 바쳤다. 아서는 편지를 펼쳐보았다.
「다들 떠났지요? 한센 얜 원래 바보라서 거짓말도 티 나게 하니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문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하면 왕실에 밀을 파는 게 정답이지만, 그렇다고 싼 값에 넘길 생각도 없습니다. 아마 이것으로 제 의중이 폐하께도 전달되었을 겁니다. 그럼 저는 좀 더 떠돌다가 가을에 돌아오겠습니다.
-사랑스런 막내 카록.」
‘뭐가 사랑스런 막내냐?’
정말인지 확 몇 대 쥐어 패고 싶은 막둥이였다. 아서는 절로 한숨이 푹푹 나오는 걸 느꼈다.
“이놈은 대체 언제부터 이런 능구렁이가 되었단 말이냐.”
자신의 동생이 이런 녀석이었나 싶은 아서였다.
***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에반은 란즈헬 백작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미행을 붙였는데도 놓쳤나봅니다.”
“그렇군. 카록이란 녀석이 정령사라는 얘기는 들었다. 정령을 이용해 미행을 따돌리고 제 부하에게 지시했겠지. 확실히 카록이란 놈이 보통은 아닌 것 같군.”
에반 국왕도 란즈헬 백작도 이미 한센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상태였다.
“가을에 제가 다시 이곳을 방문하여 밀을 손에 넣도록…….”
“됐다. 우리에게 팔 생각도 없는 듯한데.”
“예에?”
에반은 의아해했다.
카록 그가 일부러 나타나지 않은 것은 국왕과 육제후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밀 값을 올리려는 수작이 아닌가?
“쿤트 자작가의 일가를 본 느낌이 어땠느냐?”
“듣던 대로 쿤트 자작은 강인해 보였고, 영지 업무는 대공자인 아서 쿤트가 다 도맡아 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대로 말했다.
“그것 말고, 분위기 말이다.”
“분위기요?”
란즈헬 백작은 마차의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와 맏아들 간에 신뢰가 깊어 보였다. 아마 다른 아들들도 아버지를 잘 따를 것 같더군. 화목한 가정이야.”
“아!”
비로소 에반은 란즈헬 백작의 말뜻을 알아챘다.
“쿤트 자작은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높지. 카록 쿤트가 제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우리에게 밀을 팔 것 같지는 않군.”
“그럼 잠적을 해버린 것은…….”
“국왕을 상대로 협상을 할 요량이겠지. 국왕은 아마 쿤트 자작의 충성심을 이용해서 저렴한 가격에 밀을 받으려 했을 테니까.”
“그럼 그가 가진 밀 4만 포대는 포기합니까?”
“혹시 모르니 포대당 4레디나 까지는 불러봐라. 결국 우리에게는 팔지 않겠지만.”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에반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으므로.
“예.”
그는 충성스럽게 대답했다.
***
로열나이츠와 함께 돌아가면서 에릭은 한숨을 쉬었다. 로열나이츠 중 한 기사가 나서서 말했다.
“폐하, 신이 보기에는 그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얼굴은 겁에 질려 있고 목소리도 긴장으로 떨리는 것으로 보아…….”
기사의 말을 에릭이 손을 들어 막았다.
“짐도 안다.”
“예? 그런데 어째서…….”
“카록 공자의 뜻을 전해 들었으니 그냥 떠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그리 대꾸하고는 에릭은 홀로 생각에 잠겼다.
‘쿤트 자작의 충성심을 이용해 손쉽게 손에 넣으려 했는데,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나.’
무리해서 왕실의 업무를 내팽개치고 왔건만, 소득이 없자 한숨이 나왔다.
쿤트 자작가의 셋째 공자 카록.
올해로 겨우 열아홉 살이라서 대수롭게 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