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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29화 (29/529)

<-- 29 회: 2권 - 1장. 팔거나 혹은 애태우거나 -->

굶어 죽은 시체가 황야에 쓰러져 있었고, 그런 시체를 몬스터들이 파먹는 것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얼마나 끔찍한 풍경이던지!

이번에는 그런 비극을 막아야 한다.

최소한 우리 영지만이라도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이 없어야 한다.

다른 영지까지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겠지.

“쿤트 성으로 가거라.”

나는 울고 있는 영지민들에게 말했다.

“예?”

“영주님이 사시는 곳으로요?”

주민들이 의아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아버님께서 임시로 살 거처를 마련해주실 것이다. 힘들겠지만 올해만 그렇게 버티면 내년부터는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제야 주민들의 울음소리가 멎어들었다. 내가 가진 4만 포대의 밀도 있으니, 아버지는 순순히 영지민들을 받아 주시겠지.

“먹을 건 어떡합니까요?”

“일단 최대한 가지고 있는 식량을 전부 챙겨가라.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다 챙겨라. 다들 가을 추수기까지 먹고 살 식량은 있을 테지?”

주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이후로 먹을 게 부족해지면 내가 해결해주겠다. 일단은 이 길밖에 없으니 살고 싶다면 쿤트 성으로 가라.”

일단은 이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이렇게 강한 정책을 펼쳤다.

“알겠습니다요.”

“감사합니다, 공자님!”

“흐흑, 감사합니다!”

감격한 주민들이 나에게 엎드려 감사를 표했다.

이럴 땐 밀 4만 포대 사놓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지나 빈민들이 몰려와도 먹여줄 식량이 있으니까.

“자, 그럼 다음 마을로 떠나볼까.”

나는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아직 가뭄은 한창이고 영지를 전부 돌려면 갈 길이 멀다!

***

말을 타고 반나절을 달리던 한센은 기진맥진하여 멈춰 섰다. 내려와 땅바닥에 벌렁 누운 한센이 투덜거렸다.

“이러다 허리랑 엉덩이가 부러지겠네. 귀족들은 어떻게 웬 종일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거야?”

병 치료에 필요한 귀한 약재를 급히 사올 때만 말을 이용하던 한센이었다.

평소에 말 탈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도무지 익숙하지가 않았다.

“단주님은 어디 계시는 거야.”

지덴 마을에 들렀을 때 주민들로부터 카록에 대한 칭송의 말과 함께 남쪽으로 떠났다는 말만 들었다.

남쪽으로 길을 따라 도착한 브란 마을에서도 카록에 대한 열렬한 찬사와 함께 남서쪽으로 떠났단 정보를 들었다.

그렇게 계속 묻고 물어서 사흘간 카록의 행적을 더듬던 한센은 기진맥진해버렸다.

국왕 폐하게 기다린단 말에 오금이 저려서 잠시도 쉬질 못했던 것이다.

“구, 국왕 폐하!”

그 사실을 떠올린 한센은 다시금 벌떡 일어났다.

다시 말을 타고 길을 질주하는데, 얼마 안 가서 한센은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다.

“어라?”

그것은 피난민들이었다.

식량, 농기구 등 온갖 살림살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아기를 업은 아낙네, 다리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아이들, 무릎이 아파 툭툭 두드리는 노인 등, 보기 안쓰러운 모습들이 보였다.

한센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뭔가?”

멘 앞에서 걷던 중년의 사내가 물었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혹시 이 영지의 삼공자이신 카록 쿤트 공자님을…….”

“오오, 카록 공자님 말인가?”

“카록 공자님?”

“그 훌륭하신 분이 왜?”

카록이란 이름이 나오자 피난을 가던 주민들이 궁금해져서 한 마디씩 묻는다.

한센은 정말로 단주님이 영웅적 정령사로 민담에 남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뺀질거리는 단주님이 영웅이라고!?

한센의 기분이 묘해졌다.

“카록 공자님을 급히 찾아야 하는데 혹시 그분께서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카록 공자님이시라면 사흘 전까지 우리 마을에 계셨지.”

중년 사내는 카록이 마을 주민들에게 피난을 권하며 자신이 먹고 살 길을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다른 주민들도 동조하며 카록 공자의 위대함을 칭송했다.

이야기가 점점 딴 길로 세고 있었지만 한센은 꾹 참고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나자 비로소 듣고 싶었던 말이 나왔다.

“……그러시고는 남쪽으로 길을 떠나셨지. 아직 구제의 손길을 기다리는 영지민들이 있어서 쉴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말야.”

“암! 나는 살아 있는 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야 한다고 사명감을 불태우셨지.”

모두가 칭송하고 있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야.”

‘혹시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고?’

한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단주는 그런 이야기 속의 영웅 같은 위인이 아니었다.

‘이 양반, 정말로 민간설화에 길이 남는 영웅이 되는 거 아냐?’

늘 자신을 괴롭히고 부려먹는 작자가 훌륭한 인물로 기억된다고 생각하니 순간 울컥했다.

세상은 불공평해!

아무튼 카록의 행방은 알아냈다.

“감사합니다!”

한센은 다시 말에 올라 길을 달렸다.

주민들도 다시 피난길에 나섰다.

그리고 인근 수풀에 숨어 있던 두 인물도 은밀하게 이동을 재개했다.

***

“노움아, 운디네야.”

-불렀어?

땅속에서 슝 하고 노움이 튀어나오고 허공에서 물방울이 뭉쳐 운디네가 등장했다.

활기찬 노움과 뺨에 입맞춤을 해주는 운디네를 보니 절로 마음이 흐뭇해진다.

아아. 정령들은 이렇게나 귀여운 존재였구나!

“우리 노움과 운디네랑 놀려고 불렀지.”

노움이 밝게 웃었다.

-나도 주인님이랑 놀래.

운디네도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현재 야영 중이었다.

노움을 시켜서 아담한 흙집을 만들고, 운디네를 시켜서 비어버린 수통에 물을 채웠다.

허공의 수분을 뭉쳐서 수통에 물을 담아주는 운디네의 신통한 재주에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고마워, 운디네.”

운디네는 칭찬을 받자 머리를 슥 내밀었다. 쓰다듬어달라는 뜻이었다.

슥슥 쓰다듬어주니 운디네는 몹시 좋아했다. 유난히 스킨십을 좋아하는 운디네 였다.

노움은 내가 식사를 하고 쉬는 동안 불침번을 대신 서줬다.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생물이라면 결코 노움의 감시를 피할 수 없으니 최고의 불침번이라 할 수 있었다.

설사 오러 마스터라 해도 말이다.

이름 하여 불침번 마스터?

하하하.

노움은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불침번을 계속 서줬다.

노움을 소환하고 있으면 정령친화력이 소모되지만, 잠을 자면서 회복하는 정령친화력이 그보다 더 많아서 자는 동안 노움을 계속 소환하고 있어도 문제없었다.

중급 정령사가 되면서 정령친화력의 회복속도 역시 전보다 훨씬 빨라진 덕분이었다.

역시 정령들이 있으니 끝내주게 삶이 편하다. 난 복 받은 녀석이라니까.

갑자기 어려진 것만 해도 알 수 있잖아? 인생을 두 번 사는 건 보통 일이 아니거든.

화르륵.

치이익.

나는 피워놓은 불에 육포를 구워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움이 말했다.

-주인님, 누가 와. 세 사람이야.

“그래? 누군지 알아볼래?”

-응.

슉 하고 땅속으로 사라진 노움은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주인님. 바보야.

“바보?”

아이고 깜짝이야.

순간 나더러 바보라고 한 줄 알고 식겁했다.

하지만 우리 착하디착한 노움이 날 욕할 리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아, 맞다!

뒤늦게 노움이 말하는 바보가 한센임을 기억해냈다. 그런데 한센이 여긴 웬 일이지?

그리고 한센을 제외한 두 녀석들은 또 누구야?

“그리고 다른 두 명은?”

-몰라. 근데 살금살금 오고 있어.

“바보도 다른 둘의 존재를 모르고?”

-응.

척 봐도 수상한 작자들이로군.

듣자하니 그 수상한 두 명은 한센의 뒤를 몰래 밟고 있는 듯했다.

머리를 굴려보자.

한센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건 날 찾아왔다는 뜻이겠지.

한센의 뒤를 밟는 두 사람의 목적 또한 나라는 결론이 나온다.

날 왜 찾을까?

나는 내 판단력과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결론을 도출했다.

내가 가진 밀 4만 포대.

그럼 그 둘은…….

“노움, 혹시 그 둘이 한 패야?”

하급 정령일 때의 노움이라면 내 말을 못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움은 중급 정령이 되어 내 마음을 읽을 줄 알기 때문에 금방 대답했다.

중급 정령사가 되어서 편한 점이 많아져서 좋다니까.

-아니. 두 사람도 서로를 몰라.

아하!

그럼 국왕 에릭과 육제후가 보낸 사람이겠군.

전생 때도 국왕 에릭과 육제후는 이맘때쯤 식량 확보를 놓고 자금을 대량 출혈하는 경쟁을 벌였다.

승자는 돈이 넘쳐흐르는 육제후였다.

육제후는 확보한 대량의 식량을 토대로 대흉년에 시달리는 영주들을 하나둘 포섭했다.

결국 에릭 국왕은 육제후의 벽을 넘지 못하고 힘없는 왕으로 전락했다.

지혜와 추진력을 갖췄음에도 능력을 발휘 못한 비운의 왕이었지.

아마 에릭 국왕과 육제후가 보낸 사람이 우리 영지에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찾기 위해 한센을 보내놓고, 서로 먼저 나에게 접촉해 거래를 제안하기 위해 미행도 따로 붙였겠지.

그렇다면 나에게도 생각이 있지.

이것들 보세요.

비록 창창한 열여덟, 아니 이제 열아홉 살이지만, 사실 나도 꽤나 능구렁이랍니다.

이제부터 제가 당신들을 깜짝 놀라게 해 드리겠습니다.

으흐흐흐흐.

나는 속으로 웃고는 정령들에게 말했다.

“운디네, 노움.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있어.”

***

에릭 국왕의 명을 받아 한센의 뒤를 미행하던 아덴은 수풀에 숨어 소리 없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한센을 계속 주시했다.

로열나이츠의 훈련 과목 중에는 매복, 기습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기척을 전혀 내지 않고 수풀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아덴은 오른발을 내딛었을 때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발밑이 질척거렸다.

흠칫 놀라 발아래를 바라보니, 어느새 그는 진흙탕을 밟고 있었다.

아니, 늪이었다.

발이 서서히 아래로 잠기고 있었다.

‘이런 제길. 웬 늪이지?’

아덴은 발을 빼지 못했다.

늪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소리를 낼 수밖에 없고, 미행의 대상인 한센에게 들키게 된다.

일단 아덴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늪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는 빠져나와야 했지만, 일단은 기척을 숨기는 게 급선무였다.

‘대상과 2백 미터쯤 떨어지면 빠져나가자.’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

늪에 빠진 건 에반 테일러 남작의 심복 바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망할.’

바든은 한센과 거리가 멀어지면 늪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방심했군. 갑자기 늪이라니.’

아무리 컴컴한 밤이라지만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는 바든이었다.

그 역시 노움과 운디네가 합작으로 만든 늪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역시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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