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회: 2권 - 1장. 팔거나 혹은 애태우거나 -->
바스크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맞소. 밀을 사러 왔소.”
에릭은 한숨을 쉬었다.
국왕의 한숨에는 천금과도 같은 무게가 실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육제후도 짐과 같은 판단을 하고는 닥치는 대로 식량을 사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오.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에 곡물을 닥치는 대로 사고 있지. 일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보 같은 영주들은 좋아라하고 팔 거요.”
얘기를 듣자 아서의 머릿속에 현재의 레던 왕국의 정국이 파악되었다.
식량을 건 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육제후가 식량을 빌미로 레던 왕국에 세를 떨치려 하고 있군요.”
“그렇소. 가을에 대흉년이 가시화되면 영주들은 식량을 가진 자에게 무릎을 꿇을 거요. 문제는 육제후가 왕실의 재정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지.”
‘카록이 밀 4만 포대를 사놓아서 정말 다행이구나!’
아서는 안도하면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마터면 쿤트 자작가 역시 대흉년의 여파에 당할 뻔했다.
작년만 해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심정으로 지원해 준 것에 불과했는데, 이렇게 큰 힘이 될 줄이야!
“그럼 이곳에 오신 건 밀 4만 포대로군요.”
바스크의 물음에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이 직접 올 정도로 중하게 여기는 일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맞소. 짐이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쿤트 자작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오. 밀 4만 포대를 짐에게 팔아주시오.”
“폐하…….”
봄의 내전으로 실추된 왕실의 파워.
이윽고 육제후는 레던 왕국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식량 확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그리 되면 왕실은 육제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런 미래를 막고 싶어 하는 에릭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져 가슴이 미어졌다.
“폐하. 저 또한 폐하께 밀을 팔고 싶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밀을 보유한 것은 상인으로서 독립한 제 아들 카록이지 우리 가문이 아닙니다.”
“카록 공자는 어디에 있소?”
“그것이…….”
바스크는 카록이 정령사이며 가뭄으로부터 영지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에릭의 만면에 수심이 깊어졌다.
“하필이면 지금 부재중이란 말이오?”
“예. 허나 그 아이가 돌아오면 분명히 폐하께 밀을 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쿤트 자작가는 전통적으로 왕실에 충성을 다한 가문, 믿어주십시오.”
바스크의 말에는 충심이 가득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오. 하지만 카록 공자는 이윤을 중시 여기는 상인, 육제후의 제안에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구려.”
에릭은 넌지시 바스크 백작에게 우려를 전하였다.
“제가 그리 되지 않도록 설득하겠습니다.”
바스크의 약속에 에릭은 내심 안도하였다.
그는 확실히 충신이므로, 그가 편을 든다면 밀을 확보하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쿤트 자작을 한 편으로 만들었으니 거래는 거의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군.’
그래도 계약이 채결되기 전에는 완전히 확실할 수 없었다.
되도록 육제후가 이곳에까지 손을 뻗치기 전에 서둘러 카록을 만나 계약을 하고 싶었다.
혹시라도 쿤트 자작가의 밀까지 빼앗긴다면 정말 큰 일이 벌어지고 만다.
그런데 그때, 1층 홀로 하인 하나가 달려왔다.
“영주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무슨 손님이냐?”
바스크의 물음에 하인이 대답했다.
“란즈헬 백작가에서 오셨습니다.”
바스크와 아서의 얼굴에 경악이, 에릭의 얼굴에는 낭패의 기색이 어렸다.
란즈헬 백작가.
육제후 중의 한 가문으로, 당연하지만 막대한 금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그들은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사실상 하나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괜히 제후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의외로 젊은 청년이었다. 긴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날카로운 눈매의 20대 중반의 청년은 고개 숙여 인사했다.
“란즈헬 백작 각하를 모시는 에반 테일러 남작입니다.”
에반 테일러.
육제후의 1인인 볼프강 란즈헬 백작의 수족이라 불리는 남자다.
달리 ‘란즈헬의 청소부’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모든 궂은일은 에반이 모두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에반은 란즈헬 백작의 신임을 받는 심복이었다.
“백작 각하께서도 이쪽으로 오고 계십니다. 먼저 가보라는 명이 있어서 제가 이렇게 먼저 달려왔지요. 과연, 쉬지 않고 달려온 보람이 있군요. 하마터면 국왕 폐하의 존안을 뵙지 못할 뻔했잖습니까. 하하하.”
에반은 에릭에게 예를 표했다. 에릭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에 화답했다.
결국 국왕 에릭이 선수 치는 걸 막기 위해 헐레벌떡 달려왔다는 뜻 아닌가.
란즈헬 백작 자신이 에릭처럼 말 타고 먼 길을 달려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오른팔인 에반 테일러를 먼저 보낸 것이리라.
그들의 정보 전달이 얼마나 빠른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육제후의 힘은 이미 왕실을 능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때문에 에릭은 속으로 긴장을 느끼면서도, 이를 갈았다.
육제후를 무너트리고, 제대로 된 왕권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후디니 자작령에서 카록 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날을 예상하고서 밀을 구입한 것이라면 정말 훌륭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식사에 합류한 에반은 태연자약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큰 이익을 얻게 되었으니, 카록 공자는 상인으로서 대성공을 한 셈이로군요.”
“아직 속단할 수는 없는 문제지요.”
아서의 대꾸였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정도의 수익을 올릴지는 제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반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포대당 3레디나. 후디니 자작가에서 우리 란즈헬 백작가는 그 가격을 불렀습니다. 그러니 카록 공자도 적어도 그 정도는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릭과 바스크, 아서는 얼어붙었다.
포대당 3레디나?
터무니없다.
완전히 미친 가격이다!
작년의 열 배나 되는 가격으로 4만 포대를 사겠다니? 아무리 대흉년이 예상된다지만 3레디나는 심하다.
돈이 넘쳐나는 육제후가 아니면 절대로 부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육제후가 금전적인 이익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뻔했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 내렸고, 등골이 오싹해 졌다.
‘이거 큰일이구나.’
에릭은 내심 긴장했다.
쿤트 자작의 지지를 받긴 했으나 포대 하나에 3레디나는 너무 큰 금액이다.
게다가 상인의 입장에서는 육제후와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육제후가 물류의 중심인 바덴 강을 지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그건 당사자가 판단할 문제구려. 그럼 사람을 불러서 카록 공자를 불러오는 편이 좋겠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를 짐이 계속 기다릴 수는 없으니 말이오.”
에릭의 말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 즉시 사람을 시켜서 돌아오게 하겠습니다.”
아서는 그리 답하고는 하인을 불러 카록 곡물 상회의 직원을 불러오게 했다.
카록은 떠날 때 정확한 행선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카록의 직원이라면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자리에 카록 곡물 상회의 단 한 명뿐인 직원이 불려왔다.
“부, 부, 부, 부르셨습니까.”
바로 한센이었다.
소심한 한센은 높으신 네들(심지어 국왕까지)이 잔뜩 있는 자리에 불려오자 절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아서가 물었다.
“카록이 어디로 떠났는지 알고 있느냐?”
“그, 글쎄요. 동쪽으로 떠난 건 알지만 정확히는…….”
“동쪽? 그럼 지덴 마을이로군.”
잠시 생각한 아서는 계속해서 한센에게 말했다.
“말은 탈 줄 아느냐?”
“예.”
예전에는 승마술은 귀족의 전유물이었지만, 현재는 상업의 발달로 교통량이 많아져서 자연히 일부 평민들도 말을 탈 줄 알게 되었다.
말을 대여해주는 상단까지 생길 정도였다.
약재상 집안에서 자란 한센도 멀리서 구해야 하는 귀한 약재를 급히 사올 때 말을 타고 다녀오곤 했다.
때문에 한센은 능숙한 실력은 못 되지만 말을 타고 먼 길을 다니는 데는 익숙했다.
“말 한 필을 내어줄 테니 지금 당장 가서 카록을 불러와라.”
“예.”
“말해두지만, 급한 일이니 서둘러라.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예, 예!”
한센은 명을 받자마자 후다닥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에반 테일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도 오늘은 이만 씻고 쉬어야겠군요. 폐가 안 된다면 목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에반 테일러 남작의 태도는 오만한 것이 아닌 무척이나 정중한 것이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아서가 공손히 대답했다.
상대가 저리 나오는데, 이쪽에서 불퉁하게 대한다면 명분을 주게 되기 때문이었다.
“짐도 이만 일어나겠소.”
에릭도 식사를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스크도 함께 일어서며 말했다.
“제가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오.”
***
한편, 목욕을 핑계로 물러난 에반은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한센이란 놈이 카록 공자를 찾아갔다. 놈의 뒤를 밟아서 카록 공작에게 이걸 몰래 전해라.”
에반은 함께 데려온 부하에게 쪽지를 건넸다. 부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은밀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한센이라는 카록 공자의 부하 직원을 미행하시오. 그리고 카록 공자를 발견하면 짐의 뜻을 은밀히 전하시오. 아마 에반 테일러 남작도 미행을 붙였을 테니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하오.”
“예, 폐하.”
명을 받은 로열나이츠의 기사는 갑옷을 모두 벗고 평상복에 검 한 자루만 달랑 찬 뒤 떠났다.
***
당연하지만, 모든 곳에 지하수가 매장되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당연히 물이 있는 법.
사람이 살아서 마을이 형성되는 것이니, 당연히 마을이 있다는 건 그 근처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운디네로 물을 찾아냈고, 노움을 시켜 물을 마을까지 끌어왔다.
어떤 마을에서는 인근 야산에 흐르는 시냇물을 끌어왔고, 또 어떤 마을에서는 약간이나마 매장되어 있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작은 저수지를 만들었다.
어떤 곳에서는 계곡의 물을 끌어 와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물을 구했기 때문에 상당히 지쳤지만, 그래도 이제 살았다는 희망을 가지는 영지민을 볼 수 있어서 보람은 있었다.
하지만 정령술을 사용해도 물을 구할 방법이 없는 마을도 있었다.
그럴 땐 마을 주민에게 피난을 권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지민들에게 집과 농토를 버리고 떠나야 한다고 말하는 건 잔인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내가 상급 정령사가 아닌 한 방법이 없는 것을.
“어흐흐흑!”
“아이고 공자님! 저희가 집과 논밭을 버리고 어딜 떠납니까!”
“떠난들 어떻게 삽니까? 엉엉!”
마을 주민들은 목 놓아 울며 하소연을 했다.
나는 그들을 보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전생의 일이 생각난다.
가뭄과 그로 인한 대흉년으로 엄청난 빈민이 발생했더랬다.
지금 내 눈앞의 마을 주민들처럼 살 수가 없어서 떠난 이들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떠돌다가 굶어 죽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