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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27화 (27/529)

<-- 27 회: 2권 - 1장. 팔거나 혹은 애태우거나 -->

지하수를 끌어올려 저수지에 물을 채운 지 이틀이 지났다.

한번 하고 났더니, 몸이 추욱 늘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래서 이틀간 누워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누워 지낸 덕분에 정령친화력도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할 듯했다.

어딜 가냐고?

아서 형님의 부탁(?) 때문이다.

우리 쿤트 자작령의 15개 마을을 모두 돌며 가뭄에 고통 받는 영지민을 구제해야 한다.

어떻게? 나의 정령술을 사용해서.

그렇다. 다른 마을에서도 이렇게 수맥을 찾아내어 물을 퍼 올려야만 했다.

지하수 끌어 올리느라 무리하다가 기절한 지 이틀밖에 안 됐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가뭄으로 작물은 계속 말라 죽고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갓 구운 빵이라 맛있구먼.”

구운 밀빵과 소고기 감자 스튜로 아침 식사를 때우고 떠날 차비를 갖췄다.

하얀 드레스 셔츠에 사슴가죽으로 만든 암갈색 바지를 입고, 검정색 롱부츠를 신었다.

트롤 레더 재킷을 위에 걸친 뒤, 어깨 아래로 길게 자란 머리칼은 끈으로 묶었다.

소고기에 소금 쳐서 햇볕에 말린 육포와 물이 가득 든 수통, 숏 소드, 여분의 속옷과 양말, 냄비와 수저, 포크 등을 여행용 가방에 쑤셔 넣자 준비가 끝났다.

완벽한 용병의 모습이다.

좋아, 가자!

여관 1층 식당에는 한센이 먼 길 떠나는 날 마중 나와 있었다.

역시 한센은 충직 하구나.

나중에 좀 더 잘 대해주어야지. 물론 나중에.

한센은 내 차림새를 훑어보더니 질린 얼굴로 물었다.

“안 더우십니까?”

“더워도 참아야지. 남자는 멋이 생명이거든.”

그렇다. 남자는 멋이 생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장가도 잘 못갈 수가 있다.

물론 나는 장가 가려고 이렇게 멋을 낸 것은 아니다. 이게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예에?”

한센은 무슨 헛소리 하냐는 듯이 의문을 표했다.

“한센아, 한센아. 내가 뭘 하러 가는 것 같니?”

“그야 영지를 돌며 가뭄으로부터 영지민을 구하러 가시죠.”

그렇게 대답하는 한센의 얼굴에는 일말의 존경심이 엿보인다.

“그래. 가뭄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주는 정령사! 딱 민담이나 서사시에 나올 법한 영웅담 아니냐? 훗날 각지의 영지민들 사이에 나의 영웅담이 남겨질 거야. 그럼 때깔 나게 하고 등장해야 훗날에도 내가 생긴 것도 멋진 정령사였다고 하지 않겠니.”

이것이 나의 노림수.

“…….”

한센의 얼굴에서 존경심이 싹 사라졌다. 흥, 건방진 녀석. 지금도 여기선 사람들이 날 칭송하고 있다고!

하여튼 이 녀석은 뭘 몰라요.

고개를 흔들고는 밖으로 나섰다.

나는 여관의 마구간에 메어 있는 백마를 꺼내 올라탔다.

이 하얗고 튼튼한 말은 아버지가 아끼는 녀석이다.

봄의 내전 때 아버지는 이 말을 타고 활약하셨다.

그런 명마를 내게 내어줬으니, 빨리 가서 영지민을 구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도 참.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까봐.

“나 없는 동안 상회 잘 보고 있어. 약초 농사 잘 하고 있나 매일 점검하고.”

“예, 안심하십시오.”

“너한테 상회를 맡겨 놓는데 안심이 되겠니?”

사실은 안심은 하고 있다. 그냥 한번 구박해 본 것 뿐이다.

“…….”

똥 씹은 얼굴을 한 한센을 뒤로 하고 나는 박차를 가해 말을 출발시켰다.

***

카록이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쿤트 자작가에 큰 사건이 벌어졌다.

“보고 드립니다. 제 15 순찰대가 오늘 오전 11시에 21명의 중무장한 무리의 접근을 포착, 레던 왕실의 문장이 갑옷에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왕실? 그래서 구체적인 신분은 확인해봤느냐?”

아서의 물음에 병사가 말했다.

“예! 확인 결과, 국왕 폐하와 로열나이츠로 판명되었습니다. 잠시 후에 이곳에 도착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병사는 침착하게 보고를 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서는 이게 침착하게 들을 수 있는 보고가 아니었다.

“뭣이?!”

덕분에 아서는 너무도 놀라 벌떡 일어났다.

국왕 폐하가 로열나이츠 20명만 대동하고 직접 이리로 오고 있다니?

이 작은 영지에 말이다!

물론 봄의 내전 이후로 작위도 한 단계 상승하고 영지도 늘어났지만, 그래도 구석진 작은 영지라는 타이틀은 벗지 못했다. 국왕이 직접 방문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국왕이 직접 오고 있는 것일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아서는 황급히 하인을 보내 개인 수련장에서 검술을 연마하는 아버지를 불렀다.

소식을 듣고 아버지 바스크도 헐레벌떡 달려왔다.

갑자기 달려온 아버지 바스크는 땀을 한가득이나 흘린 모습이었다.

그가 다급한 어조로 물었다.

“폐하께서 오신다니?”

“곧 도착할 모양입니다. 직접 말을 타고 달려오신 듯해서 일단은 목욕과 식사, 숙소를 준비토록 했습니다.”

“잘했다. 그럼 당장 마중 나가자꾸나.”

“예. 기병 50명과 기사들을 마중 나갈 병력으로 준비시켰습니다.”

“잘했다.”

바스크는 아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뜬금없이 국왕이 직접 말 타고 오는 돌발 상황에서도 착실히 대처하는 자세라니.

역시 맏아들에게 영지의 정사를 맡긴 건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가 은퇴해도 되겠군.’

***

이윽고 바스크와 아서는 병력을 이끌고 출발했다. 이 나라의 국왕이 몸소 방문했다면 마중을 나가봐야 하는 게 당연한 예의였다.

본래 방문 전에 미리 통보를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제대로 맞이하고 대접할 준비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자면 연회같은 것들이 있다. 귀족가에서 누군가 방문 했을 때 연회를 열지 않는 것은 크나큰 모욕이다.

그러나 연회라는 것도 준비 기간이 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면 연회는 당연히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말도 없이 갑자기 등장힌 국왕 때문에 당혹스러운 게 당연했다.

마중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거리는 황금빛 갑옷을 입고 있어서 멀리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국왕이다!

이윽고 에릭 국왕과 로열나이츠 일행이 마중 나온 바스크 일행 앞에서 멈췄다.

바스크 일행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예를 갖췄다.

그것은 극히 극진한 예법이었다.

“국왕 폐하의 존안을 뵙습니다.”

바스크의 진중한 태도는 그가 진심으로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3개월 만이구려, 쿤트 자작. 그리고 대공자 아서.”

국왕은 그런 바스크의 태도에 역시 진중한 모습으로 화답했다.

“예, 폐하.”

바스크와 아서가 고개를 숙여보였다.

“통보도 없이 불쑥 방문해서 미안하오.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소.”

왕이라면 오만할 만도 한데, 그는 자신을 낮추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아닙니다, 폐하. 급한 대로 폐하를 영접할 준비를 했으니 윤허해주신다면 감히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고맙소.”

바스크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고 저택으로 향하였다.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에릭 일행은 우선 목욕부터 했다.

쉬지 않고 달려온 통에 국왕의 체통에 걸맞지 않게 많이 행색이 지저분해진 탓이었다.

하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끝낸 에릭은 의관을 가다듬고 저녁식사에 참석했다.

1층 홀에 갖가지 음식들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국왕이 참석하는 식사치고는 궁색하긴 하지만, 가풍 자체가 검소한 편인 쿤트 자작가의 입장에서는 성대한 편이었다.

사실 국왕 에릭은 그런 사소한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때문에 식사를 하면서 에릭이 곧장 말문을 열었다.

“짐이 직접 이곳까지 급히 달려온 이유가 궁금할 거요.”

“예, 폐하.”

바스크가 답했다.

“쿤트 자작. 그대의 영지는 어떻소? 가뭄으로 피해를 입고 있지는 않소?”

“그렇습니다, 폐하. 가뭄으로 저수지까지 메말라 마실 물도 부족할 지경입니다.”

가뭄.

그것 때문에 전국이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피해가 쿤트 자작가문만 피해 갈 리가 없었다. 지금도 쿤트 자작가는 가뭄의 피해를 보고 있는 중이다.

삼남인 카록이 여기저기에 물을 퍼 올리러 돌아다니고 있지만, 아직 그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대 영지만이 아니오. 왕국 전체가 가뭄에 시달리고 있소. 묻겠소. 가뭄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오?”

바스크는 옆자리의 아서를 쳐다봤다. 이런 일은 아서가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영지 경영은 아서가 다 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서가 입을 열었다.

“우선은 물의 확보를 꾀하여 가뭄으로 인한 작물 피해를 최대한 막고, 가을의 추수기가 되면 타국으로부터 부족한 곡물을 수입합니다.”

에릭은 나직이 웃었다.

“맞소. 그게 정석이오. 우리 왕국이 흉년이라고 모든 나라가 다 흉년은 아니니 곡물 생산량이 많은 나라로부터 수입을 하면 되지.”

에릭은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오. 만약에 가을 추수기에 타국에서도 곡물을 구할 수 없게 되면 어떻소?”

에릭의 말은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옛?”

“우리 레던 왕국뿐만이 아니라 혼트 제국, 오리엔 왕국, 그리고 그 너머의 동대륙의 수많은 나라까지, 온 대륙 전체가 다 끔찍한 가뭄을 겪고 있다면 어떻겠소?”

아서의 안색이 변했다.

“설마…….”

“맞소, 지금이 바로 그러하오. 흉년은 우리 레던의 문제만이 아니오. 가을의 추수기가 되어도 어디에서도 곡물을 구할 수 없소.”

바스크와 아서는 비로소 일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함을 깨달았다.

대륙 전체에 가뭄이 들었다면, 곡물을 구할 데가 어디에도 없다.

굶어 죽는 사람이 대량으로 나온다는 뜻이다.

그것은 국가의 존립을 뒤흔드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사자가 많아지면, 그것이 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평소에 악덕 영주로 알려진 자들 대부분이 죽을 지도 몰랐고, 그렇게 생긴 권력의 부재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짐은 왕이기 때문에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봐야 하고, 그래서 이 사실을 일찍 알아챘소. 그래서 지금부터 당장 세계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곡물을 매입하고 있소. 올해 가을이 지나면 식량이 곧 권력이 될 거요.”

그것은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곧 식량이 무기가 되는 시기가 온다.

“아! 그럼 폐하께서 이곳에 몸소 서둘러 오신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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