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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26화 (26/529)

<-- 26 회: 1권 - 10장. 대흉년의 조짐 -->

“…….”

“아니면 이제라도 밀 4만 포대 운송비와 군량고 대여료를 내던가.”

“제게 맡겨주십시오, 형님. 꼭 한 번 미친 듯이 땅을 파보고 싶었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다른 일은 모두 내팽개치고 오직 땅만 파게 되었다. 

아서 형님은 관리 두 명을 우리 상회에 파견해주고, 추가로 아버지가 타고 다니는 명마도 빌려주었다. 

튼튼하고 덩치 큰 하얀 말. 아버지가 전장에서 타고 다니며 리타 백작의 목을 벤 바로 그 말이다. 이거 타고 빨리 가서 땅 파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밥 먹고, 맥스에게 주문해둔 도시락을 챙겨서 말을 타고 땅 파러 갔다.

노움을 불러내 지하수를 계속 파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대략 150미터씩 파내려갔다. 

아서 형님은 영지민 중 15세 이상 40세 미만의 남자를 모두 동원해 수로를 파게 했다.

농사는 영지의 생사가 걸린 일. 영지민도 죽기 살기로 삽질을 했다. 

그런 영지민을 격려하기 위해 아서 형님은 ‘정령사인 삼공자 카록 쿤트가 물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홍보를 해댔고, 심지어는 아버지까지도 삽에 오러를 실어서 삽질을 했다. 

아버지가 나설 정도니 그 휘하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5백 명의 병사들이 훈련을 때려 치고 수로를 파댔으니 그야말로 영지의 전력이 동원된 공사였다.

그 결과 저수지와 내가 파는 구덩이를 잇는 수로가 완성되었다. 길이가 4백 미터밖에 안 되는 수로였고, 오러 엑스퍼트인 아버지와 군대까지 동원했으니 금방 완성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내가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사흘째.

-주인님. 이제 9.63미터 남았어.

노움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드디어 다 팠구나!

때마침 수로도 다 완성된 상황이라,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물론 영지민들까지 잔뜩 구경하러 왔다. 영지민들은 나와 정령들을 보고 ‘정말 정령사이셨나 봐.’ ‘정령은 처음 봐!’ 하며 수군거렸다. 

“잘 되가느냐?”

아버지가 다가와 물었다. 

“이제 다 팠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나는 노움과 운디네를 불렀다.

“운디네. 지하수가 올라오면 수로를 따라서 저수지까지 물의흐름을 제어해 줘. 할 수 있지.”

운디네는 걱정스레 말했다.

-주인님이 힘들어지는데…….

“난 괜찮아. 힘들어도 하루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지니까.”

운디네를 토닥거려주고 나서 노움에게 말했다.

“노움, 이제 구덩이를 마저 파자.”

-응!

노움은 활기차게 답하곤 우물만 한 너비의 5백여 미터짜리 구멍 속으로 쏙 들어갔다.

이윽고 노움이 판 구멍으로부터 물이 콸콸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물이다!”

“해냈어!”

“카록 공자님 만세!”

흘러나오는 지하수를 보자 영지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지하로부터 콸콸 솟아나오는 물은 수로를 따라 흘렀지만, 그 흐름이 약했다. 이대로라면 물이 저수지까지 이르지 못한다.

“운디네!”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디네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물을 가리켰다. 순간,

“크윽!”

정령친화력이 대폭 소모되는 특유의 두통이 밀려왔다.

그러자 물의 흐름이 빨랐다. 수로를 따라 저수지가 있는 북쪽으로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지민들은 환호하며 물을 따라 저수지로 우르르 달려갔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날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내가 무리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신 것이었다.

“으으윽!”

정령친화력은 계속 빠져나갔다. 지하수는 계속 지하로부터 올라와 수로를 따라 흘렀다. 

그렇게 20분쯤 지나자 나는 서 있기조차 힘들어졌다. 

“카록!”

“괜찮으냐?”

아버지와 아서 형님이 달려와 나를 부축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령친화력의 소모가 멈췄다. 이제 된 건가?

운디네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다 됐니?”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어.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줘.”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라졌다.

“우리도 가보자꾸나!”

“카록, 내 뒤에 타거라.”

아버지와 아서 형님이 말에 올랐고, 나는 아서 형님의 뒤에 탔다. 

가뭄 때문에 애가 탔던 터라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급히 말을 몰았다. 그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멀미가 나서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뒤에 탄 사람도 좀 생각해달란 말이야!

저수지에 도착했다.

“만세!”

“이제 살았다!”

“정령사 카록 공자님 만세!”

“쿤트 만세!”

“영주님 만세!”

영지민이 우리를 보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저수지가 약 3분의 2 이상 차 있었다.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일은 성공한 것이다.

“정말 장하다. 카록!”

아버지가 크게 기뻐 나를 칭찬해주셨다. 아서 형님도 표정이 몹시 밝았다.

나는 씨익 웃었다.

이제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머리가 띵하고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후디니 자작은 잔뜩 긴장했다.

그의 눈앞에는 마른 체격에 근엄한 인상을 가진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나이는 40대 중반쯤 됐을까. 여름임에도 붉은 롱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몸의 치수와 완벽하게 맞아 떨어져 맵시 있고, 세련된 인상을 풍겼다. 단추 대신 달린 마력석이 가끔 은은한 빛이 나고 있었다. 아마도 체온을 적절히 유지시켜주는 마법이 발동되고 있는 것이리라.

“후디니 자작. 내가 온 용건은 알고 있겠지?”

“예, 란즈헬 백작 각하.”

볼프강 란즈헬 백작.

바로 레던 왕국의 육제후의 1인이 눈앞에 있었다. 후디니 자작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포대당 3골드, 전량.”

그 말에 후디니 자작은 헛숨을 들이켰다. 한 포대당 3골드? 전량? 엄청난 가격이었다. 작년에 밀의 시세가 30실버였다. 10배나 되는 가격을 부른 것이다.

‘급하긴 급했구나.’

올 여름의 대륙적인 가뭄은 이미 전례 없는 대흉년을 예고하고 있었다. 물론 그 심각성을 아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근 5년간 비축해둔 식량이 있는 탓에 식량을 더 확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영주들도 있었다. 비가 내릴 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가뭄의 정도를 보고 대흉년이 올 것임을 예감한 인물들은 바쁘게 식량 확보에 나섰다.

레던 왕국에서는 최고의 곡창지대를 가진 후디니 자작이 가장 식량을 많이 보유한 상황.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육제후의 1인인 란즈헬 백작이 몸소 찾아온 것이다. 이미 에릭 국왕도 넘어선 육제후의 권세를 생각하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후디니 자작은 본래 거상의 핏줄을 이어받은 인물답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하지만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나면 절망적인 소출량에 비로소 전 대륙인이 심각성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추위가 시작된 겨울이 되면 곡물 가격이 최고조에 오른다. 그때 판매한다면…….’

그때, 란즈헬 백작이 다시 입을 연다.

“팔 수 있는 전량을 내게 팔게. 그대가 베풀어준 의리를 잊지 않겠네.”

그 말은 후디니 자작을 강하게 유혹했다. 말인즉슨 육제후가 후디니 자작가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란즈헬 백작이니 명예를 안다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킬 터였다.

‘그래, 장기적으로 봤을 때 바덴 강 유역을 지배하는 육제후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편이 우리 후디니 가문에게는 더 이득이지.’

후디니 자작은 결정을 내렸다.

“제가 팔 수 있는 밀은 6만 포대입니다.”

근엄하고 변화 없던 란즈헬 백작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대는 적게 잡아도 10만 포대 이상의 밀을 가지고 있네.”

후디니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예, 작년 가을까지는 분명 11만 포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가을에 4만 포대를 팔았습니다. 남은 양은 7만 포대. 1만 포대는 영지민에게 베풀어야 하고 따라서 6만 포대가 팔 수 있는 전부입니다.”

“누구인가?”

4만 포대를 산 사람을 묻는 것이리라.

“쿤트 남작가, 아니 자작가의 삼남 카록입니다.”

“쿤트?”

란즈헬 자작의 눈빛이 깊어졌다.

들어봤다.

내전 때 리타 백작의 목을 벤 기사의 이름이 바스크 쿤트였다.

“알겠네.”

“예.”

란즈헬 백작과 후디니 자작은 계약서에 서명해서 한 부씩 나눠 가졌다.

란즈헬 백작은 계약이 채결되자마자 떠났다. 

후디니 자작은 그가 어디로 갈지 알고 있었다.

*   *   *

“서둘러라!”

“옛!”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급히 달렸다. 선두에 선 사람은 얇은 아마 천으로 짠 고급스런 옷에 황금빛 망토를 걸친 젊은 미남자였다. 황금빛 머리칼이 사자 갈기처럼 거칠게 휘날렸지만 그의 고귀함은 바래지지 않았다.

그 뒤로는 금빛 갑옷으로 무장한 수십 명의 기사단이 뒤따랐다. 

선두에 선 미남자의 이름은 바로 에릭 레던.

작년까지는 태자였고, 지금은 국왕인 남자였다. 그런 그가 몸소 말을 타고 급하게 달리는 것이다.

뒤따르는 기사단은 당연히 왕실을 수호하는 로열나이츠였다.

“육제후보다 빨리 쿤트 자작령으로 가야 한다! 말이 쓰러지지 않는 한 계속 달려라!”

그 본인 역시 오러 엑스퍼트 초급의 검사였기 때문에 에릭 태자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말을 몰았다.

‘후디니 자작가로 가봐야 늦었다. 육제후와 경합을 벌여야 하는데, 우리 왕실은 그들보다 높은 가격을 부를 수 없어!’

젊은 국왕 에릭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바스크 쿤트 자작의 셋째 아들이 가지고 있는 밀 4만 포대! 그것만은 절대 놓쳐서 안 돼!’

무능한 군주라면 아직도 올해에 흉년이 날 거란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농사는 천한 것이나 하는 일이라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릭은 유능한 군주였다. 그는 매일 평민의 삶을 돌아보며 민생을 살폈고, 가뭄이 심각하다는 걸 진즉에 눈치 챘다. 

문제는 육제후도 이를 눈치 챘다는 것이었다.

레던 왕실과 육제후는 식량 확보 경쟁을 벌였다. 거의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휘하의 모든 부하를 각지에 풀어서 식량 구입에 나섰다.

서대륙에서 가장 식량을 많이 가진 건 후디니 자작가. 하지만 에릭은 육제후의 일인인 란즈헬 백작이 직접 출발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에릭은 과감하게 후디니 자작가를 포기, 대신 밀이 4만 포대나 있는 쿤트 자작령으로 국왕인 자신이 직접 움직였다. 그가 식량 확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다.

쿤트 자작가의 삼남 카록 쿤트가 밀 4만 포대를 보유한 사실을 안 건 행운에 가까웠다.

내전 때 에릭은 당시 남작이었던 바스크 쿤트 자작을 만났다. 사람 보는 눈이 있는 에릭은 그가 실력과 신의를 겸비한 인재임을 알아보고 내전 내내 중용했다. 바스크가 전공을 세운 데에는 에릭이 중용한 덕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친해졌고, 그를 심복으로 만들기로 결심한 에릭은 조촐한 술자리를 열었다. 함께 술을 마시면서 바스크는 자신의 아들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걸 에릭은 기억해낸 것이다.

‘그는 내 편이다. 내전 때 나는 그를 잘 대우해주었어. 그의 아들이라면 밀 4만 포대를 내게 팔아줄 것이다!’

젊은 국왕의 눈빛이 굳은 의지와 믿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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