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23화 (23/529)

<-- 23 회: 1권 - 9장. 중급 정령사 -->

마법진에서 쏟아지는 빛은 노움 때와 달리 황금빛이 아니라 푸른 하늘색이었다. 그 빛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그저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하지만 빛은 이내 사그라졌다. 이미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기다렸다. 

역시나.

허공에서 반딧불처럼 작고 푸른 빛 덩어리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하나, 둘, 셋…… 여러 개의 빛 덩어리가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일곱, 여덟, 아홉…… 물방울이 모여서 웅덩이가 되듯이 빛 덩어리는 점점 커져갔다.

이윽고 손바닥만 한 크기가 된 푸른빛의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찰흙을 주물러 모양을 만들듯이 얼굴, 팔, 다리가 생겨났다. 

마침내 푸른빛은 노움과 마찬가지로 열 살 남짓한 소녀의 모습으로 변했다.

몸은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흘렀다. 황금빛인 노움과는 또 달랐다. 물결치는 듯한 웨이브가 진 머리칼은 발끝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고 풍성했다. 수수한 원피스 차림의 정령은 방긋 귀엽게 웃으며 탱글탱글한 눈동자로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움만큼이나 귀여운 아이였다.

“넌 누구니?”

내가 물었다.

-운디네.

정령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나직이 대답했다.

물의 정령이구나! 

운디네는 얌전하고 차분해 보이는 게 시스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얼굴에 감정이 안 드러나는 시스와 달리 호기심과 흥미로 반짝거리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운디네. 나와 계약해줄래?”

-할래.

운디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직이 대답한다.

운디네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역시 손을 내밀었다.

서로의 손이 맞닿는다.

감각이 공유된다.

영혼이 이어진다.

맑고 시원한 물의 청량감 같은 상쾌한 느낌이 휘몰아쳤다. 두통이 싹 가시는 것처럼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탄생, 치유, 정화, 흐름…… 말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운디네가 가진 대자연의 의지가 내게로 전달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감동이었다. 까닭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계약이 이루어졌다.

손을 뗀 운디네는 방긋 웃으며 내 뺨에 흐르던 눈물을 닦아주었다. 물의 정령답게 손짓 한 번에 말라붙은 눈물이 깨끗하게 씻겨나갔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운디네.”

-응.

운디네는 수줍게 대답했다. 

정령계약이 끝나고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밤 9시였다. 이런, 아직 저녁 식사도 못했는데.

“그럼 이만 돌아가렴.”

그러자 운디네의 얼굴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진다. 그런 운디네의 반응에 나는 흠칫 놀라 물었다.

“나랑 더 있고 싶니?”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그래. 그럼 같이 거리를 구경하자.”

환하게 표정이 밝아지는 운디네.

나는 사무실에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운디네는 내 어깨에 앉은 채 거리의 풍경을 정신없이 두리번거렸다. 

노움처럼 ‘이게 뭐야?’ ‘저게 뭐야?’하고 적극적으로 질문하진 않았지만, 처음 보는 인간 사회의 풍경이니 궁금한 게 많은 것이다.

나는 수줍음이 많아 말을 못하는 운디네 대신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운디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거리 산책을 마치고 ‘맥스의 쉬어가는 집’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카록 공자님.”

날 반겨준 맥스는 내 어깨에 앉은 운디네를 보고 흠칫 놀랐지만, 내가 정령사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고요?”

“아직 못 먹었어.”

“금방 차려드립죠.”

“응. 백포도주도 한 잔 갖다 줘.”

“예입!”

장기 숙식 계약을 하면서 식사는 아침저녁으로 제공받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백포도주 한 잔 값만 지불했다. 

잠시 후 맥스는 노릇하게 구워진 호밀빵과 구수한 냄새가 풍기는 닭고기 스튜, 그리고 백포도주를 가져다주었다. 

백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윽, 맛이 별로네. 역시 전문 술집이 아니면 무난한 맥주가 정답인가?

평민들이 즐겨 마시는 저렴한 포도주라서 그런지 침전물이 많고 톡 쏘는 떫은맛이 지나치게 강했다. 뭐, 그래도 식사와 함께 곁들여 마실 만은 했다. 

그런데 옆을 보니 운디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백포도주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이건 포도주라는 거야. 포도를 숙성시켜서 만든 술이지.”

-맛있어?

“맛있는 것도 있고 맛없는 것도 있지. 음…… 이건 좀 별로네.”

-맛있게 할 수 있는데…….

운디네의 수줍은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게 가능해?”

고개를 끄덕이는 운디네.

“그럼 부탁할게.”

내 허락이 떨어지자, 운디네는 잔에 담긴 백포도주에 조막만한 손가락을 살포시 담갔다.

쏴아아!

잔에 담긴 백포도주가 별안간 소용돌이치며 회전했다. 정령친화력이 약간 소모되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을 뗀 운디네는 다 됐다는 듯이 날 바라본다.

나는 다시 백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어라?

떫은맛이 줄어들고 한결 맑고 깨끗해졌다. 게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화악 하고 몸에 생기가 도는 듯한 기분 좋은 느낌이 퍼져 나갔다. 이게 뭐지?

운디네는 눈을 반짝이며 내 말을 기다렸다.

“정말 맛있어.”

내 칭찬에 운디네는 활짝 웃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치유랑 정화…….

나는 그 말을 대략 알아들었다.

운디네는 더러운 걸 깨끗이 정화하고 또한 치유시키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운디네의 능력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있겠는데.

아무튼 운디네만 있으면 매일 이렇게 맛있는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니 몹시 기뻤다.

“고마워 운디네.”

나는 운디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말은 없지만, 운디네는 머리를 내 쪽으로 내밀며 더 쓰다듬어달라는 뜻을 보였다.

운디네 덕에 저녁 식사는 맛있게 했다. 호밀빵은 담백하고 닭고기 스튜는 구수하고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거기다가 정화와 치유의 힘으로 맛있어진 백포도주를 음미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식사를 마치고 객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이제 잘 시간이라 운디네를 돌려보내야 했는데, 운디네는 돌아가기 싫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런이런.

나는 운디네를 품에 안고 쓰다듬고 달래주었다.

“나도 운디네랑 오래오래 있고 싶어. 하지만 운디네가 돌아가지 않으면 정령친화력이 소모돼. 그럼 내일 운디네를 다시 불러서 함께 놀 수 없어. 그래도 좋아?”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운디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내일 일찍 불러서 놀아줄게.”

-……정말?

“그럼. 약속할게.”

운디네는 아쉬운 듯 날 보더니, 내 입술에 쪼옥 입을 맞추고는 허공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   *   *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는 내 정령들을 모두 소환하기로 했다.

“노움, 운디네.”

-불렀어?

언제나처럼 땅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노움.

반면 운디네는 허공에 있는 수분이 모여 커다란 물방울이 형성되면서 나타났다. 운디네는 소환되자마자 내 뺨에 입을 맞추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거의 동시에 소환된 노움과 운디네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노움이 날 보며 물었다.

-주인님, 쟤가 내 친구야?

“응. 물의 정령 운디네야. 노움이 언니니까 운디네를 잘 보살펴줘야 해. 알았지?”

-나 언니야?

“그럼. 노움이 언니지.”

-헤헤, 나 언니야.

노움은 언니라는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시시 웃으며 기뻐했다.

나는 이번에는 운디네에게 말했다.

“노움은 운디네보다 먼저 나와 계약한 정령이야. 운디네한테는 언니가 되니까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야 돼. 모르는 게 있으면 언니한테 물어봐. 알았지?”

운디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서로 인사하자.”

노움과 운디네는 서로 마주보았다. 나란히 놓고 보니 노움이 운디네보다 두 배 이상 컸다. 그간 많이 성장했으니 막 계약한 운디네와 차이가 많이 나는 게 당연했다.

-안녕, 운디네.

-안녕…… 언니.

노움의 인사에 운디네는 수줍어하며 간신히 대답했다.

노움은 운디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운디네는 부끄러운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두 정령은 정말 친자매 같았다.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자매의 탄생을 보는 것이리라.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자, 그럼 아침 해도 떴으니 유술 수련을 해볼까?

나는 사무실 뒤편에 있는 마당에 나와 수련을 시작했다.

노움과 운디네는 내가 뭐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둘이 잘 놀았다. 노움이 운디네의 손을 붙잡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이건 뭐고 저건 뭔지 가르쳐준다. 그런데 노움도 잘 모르는 게 많았기 때문에 설명이 어설펐는데 그게 또 너무나 귀여웠다.

정령 자매가 놀고 있는 동안 나는 수련을 했다. 수련을 게을리 하면 또 살이 찌고 게을러진다. 하루도 거르지 말고 해야 한다.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반복한 뒤 굵은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근육 단련이 끝나자 아버지에게 배운 유술 동작 연습이 이어졌다. 긴박한 순간에 반사적으로 유술을 써먹기 위해서는 평소에 동작을 반복함으로서 몸에 익게 해야 한다.

그렇게 세 시간을 하고 나니 녹초가 되었다. 근육이 그만 좀 하라고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수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육 단련, 유술 동작 연마 뒤에는 유산소 운동이 남아 있었다.

“잠깐 이 근처를 달리고 올 테니까 사이좋게 놀고 있어.”

-응.

노움이 대답했다. 운디네는 노움의 머리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이 또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녀석들, 그 새 많이 친해졌나보네. 정령들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

나는 적당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를 따라 달리니 금방 송골송골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15분이 지나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참고 계속 달렸다. 

처음에 오는 고통만 참으면 된다. 이것만 참고 버티면 그 뒤에는 계속 달릴 수 있게 된다. 아버지의 빡센 지도하에 수련해본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30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서 사무실 뒷마당에 돌아오니 노움과 운디네가 다가왔다.

땀과 피로로 범벅이 된 나는 벌렁 땅바닥에 누웠다. 운디네가 그런 내게 말했다.

-운디네, 치유랑 정화 할 수 있어.

“그래줄래?”

고개를 끄덕인 운디네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별안간 허공에서 물 덩어리가 나타나더니 나를 감쌌다. 

촤아아악!

“……?!”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물 덩어리는 내 몸을 구석구석 훑어냈다. 옷과 몸에 흠뻑 젖어 있던 땀이 깨끗이 씻겨 졌다.

물 덩어리가 사라졌을 때, 나는 막 목욕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체력이 완전히 떨어져서 헐떡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피로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상쾌했다.

“운디네는 피로까지 회복시킬 수 있는 거야?”

놀란 나의 물음에 운디네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잘했어. 고마워, 운디네.”

나는 운디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칭찬 받은 운디네는 몹시 기뻐하며 노움에게 다가간다. 노움도 내 흉내는 내는 건지 운디네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준다.

-잘했어,

아무리 봐도 정말 친자매 같은 두 정령이었다. 조물주가 가장 잘 한 게 있다면 바로 정령을 만든 것이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