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회: 1권 - 7장. 작별 -->
딱 사흘만 더 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무려 일주일이나 더 황야지대에 머물렀다. 매일 사냥할수록 돈이 되는 몬스터의 부산물이 차곡차곡 쌓이니, 요게 중독성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준비해온 식량은 다 떨어졌지만, 레토 강이 바로 옆에 흐르고 있어서 식수도 식량도 아무 문제도 없었다.
몬스터 사냥의 나날은 단조로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밥 먹고 장비를 점검한 뒤 사냥에 나선다.
황야지대를 떠돌며 어스 스웜이나 블러드 스콜피온을 발견하는 족족이 처치하고 부산물을 챙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서 부산물을 분류별로 정리해두고 씻고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저녁식사 준비야 간단하다. 내가 노움을 불러 어스 핸드를 펼치면 거대한 흙의 손에 민물고기들이 네댓 마리씩 잡힌다. 그걸로 시스가 ‘마법을 응용한 야영요리 50선’을 뒤적거리며 요리를 하는 것이다.
물고기를 구워먹는 것도 질렸다고 렉스가 투정을 부리자 시스는 삶기도 하고 스튜도 만드는 등 온갖 시도를 했다. 아무래도 요리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먹는 걸 몹시도 좋아하니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것도 좋아하겠지. 하지만 생선 내장만 모아서 끓인 스튜는 지나치게 혁신적이었어. 한 숟갈씩 먹고 다들 흐르는 레토 강에 버렸지. 그 뒤 렉스는 음식 투정을 부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무려 보름간이나 황야지대에서 몬스터 사냥을 했다.
첫눈이 내릴 때까지 말이다.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황야지대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어스 스웜도 블러드 스콜피온도 동면에 들어갔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야, 다들 수고 많았어. 즐겁고 유익한 사냥이었지?”
내가 능청맞게 묻자 렉스가 투덜거렸다.
“이렇게 빡세게 사냥을 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맥주와 따뜻한 잠자리가 그리워요.”
“음, 그렇다면 렉스. 네가 말을 타고 쿤트 남작가에 다녀와.”
“예?”
의아해하는 렉스에게 내가 말했다.
“이것들을 우리끼리 무슨 수로 다 가져갈 거야?”
흙집 옆에는 어스 스웜의 잔해와 블러드 스콜피온의 껍질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짐마차 4대는 필요한 분량이었다.
“가서 아서 형님께 짐마차 3대만 달라고 해. 아마 지금쯤 후디니 자작령에서 밀 4만 포대도 다 가져왔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렉스는 짐마차를 끌던 늙은 말을 타고 달려갔다. 렉스가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지루한 기다림을 보내야 했다.
나는 노움을 불러내서 시간을 때웠는데, 노움은 자꾸만 어스 스웜의 잔해를 가리키며 먹어도 되냐고 졸라댔다. 노움이 너무 귀여워서 조금만 먹으라고 했는데, 그만 짐마차 반 대 분량을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우리 노움의 키가 내 팔뚝만 해졌네. 그래,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렴.
반나절쯤 뒤,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짐마차 4대, 말을 탄 기병도 20명쯤 보였다. 기병 무리에는 렉스도 섞여 있었는데, 어라? 무리를 인솔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서 형님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여길 직접 오시고.”
“몬스터 토벌이 잘 되었는지 확인 차 왔다. 다른 지역은 이미 토벌이 마무리되었으니까. 그런데 이 돌다리는 네가 만든 거냐?”
아서 형님은 레토 강 위에 만들어진 돌다리를 보며 물었다.
“예. 정확히는 우리 노움의 솜씨죠. 잘 만들었죠?”
-헤헤.
노움이 몸을 배배 꼬며 쑥스러워했다.
“놀랍구나. 정령사란 참 쓸모가 많은 직업이군.”
감탄을 거듭하며 아서 형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빤히 쳐다본다. 마치 어서 사업 말아먹고 가문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형님, 그렇게 노예상인 같은 눈초리로 보지 말아줄래요? 사업이 망하면 평생 가문을 위해 봉사한다고 약속은 했지만, 저 아직 안 망했거든요?
“몬스터 토벌의 성과를 보여 다오.”
“예. 저쪽에 몬스터 토벌로 얻은 부산물이 있습니다.”
나는 흙집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보여주었다.
그걸 본 아서 형님은 또다시 놀라 입을 쩌억 벌렸다.
“블러드 스콜피온을 이렇게나 많이 잡다니! 정말 너희들끼리 해낸 일이냐?”
“대지의 정령을 부리는 정령사에게 블러드 스콜피온은 손쉬운 상대죠. 구덩이를 파서 묻어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허…….”
우리 쿤트 남작가에서 블러드 스콜피온을 처치하는 방법은 중장보병이 밀집대형을 취하여 포위 공격을 하는 패턴이었다. 이 방법을 쓰려면 중장보병이 20명 정도 필요했다.
그런데 우리는 고작 넷이서 수십 마리를 사냥했으니 아서 형님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블러드 스콜피온의 껍질은 중장보병을 무장할 갑옷과 방패의 재료로 적합하겠구나. 마침 대대적인 몬스터 토벌로 병장기가 많이 상했는데 잘됐군. 우리가 사겠다.”
“그래요? 잘됐군요. 쿤트 가문에서 산다니 특별히 싸게 해서 한 마리당 10레디나에 팔겠습니다.”
내 말에 아서 형님의 눈이 가늘어졌다.
“10레디나면 정상 시세 아니냐. 우리가 널 위해 밀 4만 포대도 운반해주고 그걸 보관하기 위해 군량고까지 하나 더 증설했는데, 가문에 대한 애정이 겨우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냐?”
나는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아서 형님은 날 시험하려는 모양이었다.
“에이, 다 아시면서. 조만간 전쟁과 관련된 모든 품목의 시세가 급등할 거라는 건 형님도 아시잖습니까.”
내 지적에 아서 형님은 뛸 듯이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상인은 정보가 생명이죠.”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때쯤 우리 레던 왕국의 늙은 국왕이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환을 얻은 국왕은 결국 추운 겨울에 상세가 악화되어 이듬해 봄에 세상을 떠난다.
“애송이 상인 녀석 주제에 너무 자신만만해하는 것 같아서 조금 골려주려 했더니, 이제 보니 제법이구나.”
“아버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어리석지는 않으니 상인이 되라고요.”
“녀석. 알았다. 10레디나.”
결국 아서 형님은 승복하고 말았다.
“전쟁 준비라면 독주머니도 사시겠습니까?”
“음, 그래. 그것도 좋겠구나. 그건 정상 시세대로 개당 5레디나에 사겠다.”
“좋죠.”
전쟁 물자 시세가 급증할 때를 기다렸다가 팔면 훨씬 큰돈을 받을 수 있지만, 가뜩이나 아서 형님께 신세를 많이 졌는데 그런 치사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자, 그럼 계산 좀 해보실까.
우리가 사냥한 블러드 스콜피온은 총 21마리. 껍질은 마리당 10레디나, 독주머니는 개당 5레디나니까…… 총 315레디나를 벌었구나.
보름간 번 소득 치고는 매우 훌륭한 성과였다.
딘, 렉스, 시스에게 79레디나씩 나눠주고 나는 78레디나를 갖기로 했다.
딘과 렉스는 무척 기뻐했다. 정령사인 내가 없으면 일개 용병인 그들이 단시간에 그런 큰 소득을 올리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병사들이 부산물을 짐마차에 모두 실었다.
우리도 타고 온 짐마차에 걸터앉았다. 노움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어스 스웜의 잔해를 먹어도 되냐고 물었지만, 나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참으라고 했다.
“가자.”
아서 형님의 명령에 기병들과 짐마차 5대가 출발했다.
쿤트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짐마차에서 블러드 스콜피온의 껍질과 독주머니를 내렸다.
나는 저택에 온 김에 아서 형님과 함께 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갔다. 아버지는 여전히 수련장에 틀어박혀 검술을 연마하고 계시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의 전용 수련장에 거의 도착했을 때, 아서 형님이 내 발걸음을 제지했다.
“잠시 멈춰라. 바로 수련장에 들어가면 안 된다.”
“네?”
아서 형님은 천장에 걸려 있는 종과 연결된 줄을 잡아 당겼다. 대앵, 댕,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어와라.”
수련장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웬 종이에요?”
“보면 안다.”
수련장 안에 들어서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간편한 평상복 차림에 롱 소드만 들고 계시는 아버지는 힘든 훈련을 했는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버지의 손에 들린 롱 소드는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오러 수련을 하고 계셨던 거예요?”
나는 놀라 물었다.
아버지는 중요한 건 오러가 아니라 검술이라는 지론을 갖고 계셨다.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강한 육체와 정신력, 그리고 검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곤 하셨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오러 컨트롤 수련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오러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곧 전쟁이 날지 모르니 실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러 컨트롤을 응용한 잔기술도 실전에서는 꽤 중요하니까.”
“그렇군요.”
전쟁을 준비하는 기사라. 이렇게 보니 새삼 아버지가 정말로 뼛속까지 기사구나 싶었다.
“서부 황야지대의 몬스터 토벌은 네가 맡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되었느냐?”
“한동안 그쪽에서는 몬스터를 보기 힘들 걸요?”
아버지는 웃었다.
“아서, 어떠냐? 네 동생이 허풍을 떠는 건지 말해봐라.”
“카록의 말은 사실입니다. 블러드 스콜피온만도 21마리나 사냥했더군요. 껍질과 독주머니는 모두 구입했습니다.”
“21마리? 사실이냐?”
“예. 카록이 대지의 정령을 다루기 때문에 블러드 스콜피온을 상대하기가 무척 쉽다고 합니다.”
“과연. 괜히 정령사가 우대 받는 게 아니었구나.”
아버지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신다.
이크.
72년 상인 인생으로 눈치가 백단이 된 나는 저 눈빛의 의미를 안다.
“카록.”
“예, 아버님.”
난 불안한 얼굴로 대꾸했다.
“피곤할 텐데 돌아가 쉬어라.”
“예.”
“그리고 내일 날 찾아오너라.”
“……예.”
아버지는 정령사인 나와 겨뤄보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대화가 끝나자, 나는 아서 형님과 함께 군량고로 향했다. 밀 4만 포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군량고는 모두 네 개가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보니 다섯 개였다. 하나를 더 증설한 모양이었다. 하긴, 밀 4만 포대가 좀 많긴 하지.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