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회: 1권 - 6장. 사냥 -->
“렉스!”
딘은 이를 갈았다. 놈과 렉스가 뒤엉켜 있어서 창으로 찌를 수가 없었다. 저대로 가다간 저 망할 놈이 렉스의 체액과 피를 쪽쪽 빨아먹을 터였다.
그렇게 놔둘 순 없지!
“어스 핸드!”
나는 왼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흙의 손이 나타나 놈의 흙 몸뚱이를 파헤치고, 렉스를 끄집어냈다. 어스 핸드에 뒷덜미를 붙들린 채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렉스는 죽다 살아난 얼굴이었다.
“썬더 에로우.”
시스가 쏜 번개 화살이 어스 스웜의 몸뚱이 중앙을 꿰뚫었다. 핵을 파괴당했는지 놈은 퍼석 하고 부서져 흙을 쏟아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이거 놈들이 땅속으로 움직인다는 걸 깜빡했군요.”
“그래. 발밑에서부터 공격 받는 걸 경계해야겠어. 시스, 알람 마법을 펼칠 수 있겠나?”
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팡이를 들었다.
“알람.”
파앗! 하고 미약한 빛이 사방에 퍼져 나갔다.
“짐마차. 10미터.”
누군가가 짐마차에 10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경고음이 들리도록 설정했다는 뜻이었다. 범위가 더 길면 좋겠지만, 시스가 2서클밖에 안 돼서 10미터가 한계겠지.
“충분하다.”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날 보며 말했다.
“벌써 14마리째이니 분위기를 보아 더 많이 출현할 것 같군요. 일단 안전한 장소를 찾아서 근거지로 삼아야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자.”
이대로 계속 출현하는 어스 스웜과 싸우다가는 금방 내 정령친화력이 바닥날지도 모르니까.
일단 노움을 시켜 어스 스웜의 잔해를 수거하고, 다들 짐마차에 올라탔다. 녀석들의 잔해인 검은 흙에서 거름 같은 구릿한 냄새가 났지만 참는 수밖에 없었다.
-맛있는 냄새 나.
“잉?”
노움의 발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얘야, 방금 뭐라고 그랬니?
놀랍게도 노움은 짐마차에 실어놓은 검은 흙을 보며 몹시 맛있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사탕을 앞에 두고 먹어도 되냐고 묻는 아이처럼 노움은 날 쳐다봤다.
“머, 먹어도 돼. 정말 먹고 싶으면…….”
-응!
노움은 득달같이 검은 흙으로 달려가 두 손으로 마구 퍼먹기 시작했다.
딘도 렉스도 시스도 나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검은 흙을 집어서 삼키더니 그 뒤 퉤 하고 뱉어냈다. 노움이 먹고 버린 흙은 모래처럼 물기 하나 없이 곱고 하얗게 변했다.
그렇게 양으로 치면 십여 포대쯤 되는 검은 흙이 전부 모래가 되어 버렸다.
-맛있어.
노움은 보는 사람도 행복해지게 만드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레 말했다.
“그, 그래. 맛있었다니 다행이다.”
-헤헤헤.
나는 노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정령이 뭘 먹는다는 소리는 난생 처음 들었다. 그런데 순간 뇌리로 ‘정령술의 입문’의 한 구절이 스쳤다.
「계약한 정령의 속성에 걸맞은 장소가 정령친화력을 늘려준다. 물의 정령과 계약했다면 바닷가나 강가가, 바람의 정령과 계약했다면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 정령친화력 상승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헐?!
그래. 생각해보니 노움은 대지의 정령.
검은 흙은 어스 스웜이 그동안 빨아먹은 영양분이 듬뿍 들어 있으므로 땅을 비옥하게 해준다. 그러니 당연히 노움이 좋아할 수밖에.
그렇다고 먹을 줄은 몰랐지만.
“노움, 혹시 너도 어스 스웜처럼 땅의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는 거니?”
-아니.
“그럼 이건 어떻게 먹은 거니?”
-몰라. 다른 건 먹어도 맛 몰라. 이건 맛있어. 무지무지 맛있어.
맛있다는 걸 재차 강조하는 노움.
결국 노움이 먹을 수 있는 건 어스 스웜뿐인 모양이었다.
‘정령술의 입문’에서는 이런 얘기는 없었는데.
혹시 이거 내가 멘 처음 발견한 건가? 학회에 발표라도 할까? 아하하.
음, 아니지.
정령술은 세속적 욕망이 적을수록 대성하는 분야다. 따라서 부귀영화 갖겠다고 세상에 나와 이름 날리는 정령사보다는 시골구석에서 조용히 살다 가는 정령사가 훨씬 많을 것이다.
내가 알아낸 노움의 식성도 이름 모를 누군가가 먼저 밝혀낸 것일 수도 있지.
정령술은 이래서 문제야.
마법길드처럼 정령사들을 하나로 엮어주어 지식을 공유하는 커뮤니티가 없으니 발전이 없고 후학을 양성할 수도 없다.
내가 하나 만들어볼까? 정령길드 같은 거.
……생각해보니 나도 귀찮다.
이미 90년씩이나 살아본 놈이 무슨 감투를 써보고 싶다고 그런 피곤한 짓을 하나.
역시 정령사는 이래서 안 되는 거구나.
세 시간쯤 길을 가다가 우리는 강을 발견했다. 폭이 5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강이었는데, 우리 가문의 영지를 관통하는 레토 강이었다.
“이 강을 건너면 안전하겠군요. 블러드 스콜피온도 어스 스웜도 강은 건너지 못하니까요.”
“우리 가여운 늙은 말도 짐마차를 끌고 강을 건너는 재주는 없지만.”
딘의 말에 내가 가볍게 대꾸해주었다.
“정령술로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음, 한번 해볼게. 노움.”
-응?
“우리가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만들어주겠니?”
-알았어.
이윽고 띵~ 하고 두통이 밀려왔다. 노움이 레토 강 위에 아치형의 돌다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짐마차가 건너야 하기 때문에 폭도 넓어야 하고 두께도 충분해야 했다. 그만큼 내 정령친화력이 소모되었다.
“우와, 띵한데?”
“괜찮으십니까?”
“난 좀 쉬어야겠어.”
“예. 오늘은 이만 여기서 야영을 하죠.”
우리는 짐마차에서 내려서 야영 준비를 했다.
나는 정령친화력을 쥐어짜서 넷이 누울 수 있는 둥그런 흙집을 만들었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 거야?”
“불침번은 필요 없습니다.”
내 물음에 딘은 빙긋 웃었다.
“위험한 상황은 블러드 스콜피온이나 어스 스웜이 돌다리를 건너 공격해오는 경우뿐인데, 이렇게 해놓으면 문제없죠.”
딘은 늙은 말을 몰아서 짐마차로 돌다리의 입구를 가로막아놓았다.
아, 저런 수가 있었구나!
짐마차를 엄폐물로 만들어 놓는 수가 있었어. 역시 전직 십인장이군. 짐마차에는 시스가 걸어 놓은 알람 마법도 있으니 문제없었다.
“좋아. 그럼 난 먼저 잘게. 저녁은 알아서들 먹어.”
나는 흙집 안에 들어가서 모포로 몸을 둘둘 말고 잠을 청했다. 피곤해서 밥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레토 강 건너편을 근거지로 삼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했다.
낮이 되면 돌다리를 건너서 어스 스웜 사냥을 다녔는데 때때로 블러드 스콜피온이 출현했다.
블러드 스콜피온도 지금이 한창 알을 낳을 시기라서 영양을 공급하려고 혈안이 된 암컷들이 수시로 출몰해 흉악한 독 꼬리를 휘둘러댔다.
어스 스웜은 딘, 렉스, 시스가 팀플레이로 처리했고, 블러드 스콜피온은 내가 도맡아야 했다.
“노움, 트랩!”
-응!
노움이 삽으로 땅을 찍자 정령친화력이 소모될 때 느껴지는 특유의 띵한 두통이 일었다.
우리에게 다가오던 블러드 스콜피온이 우르르 부서지는 지표면과 함께 5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빠졌다. 독을 품은 꼬리를 마구 휘저으며 버둥거렸지만 거꾸로 빠진 탓에 함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좋아, 묻어버려!”
이내 거대한 전갈 녀석은 구덩이에 파묻혀 생매장 당하고 말았다.
잘 묵혀뒀다가 꺼내야지. 껍질도 독주머니도 짭짤한 가격에 팔리는 녀석이니까. 어떤 미친놈들은 블러드 스콜피온으로 술도 담근다던데 사실일까?
내가 블러드 스콜피온을 해치운 사이 딘 일행은 어스 스웜 여섯 마리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시스는 워터 볼을 잇달아 펼쳐 어스 스웜을 흠뻑 적셔놓고, 딘과 렉스가 강철창으로 마구 찔렀다.
“침착하게 찔러라! 흥분하면 핵을 맞추지 못해!”
“예, 단장님!”
딘과 렉스는 척척 맞는 호흡으로 창질을 하며 어스 스웜들을 찔러 죽였다.
어스 스웜의 검은 잔해는 노움을 시켜 짐마차에 실었다. 저 중 절반은 노움이 먹어치우겠지. 저 봐, 지금도 우리 귀염둥이가 군침을 뚝뚝 흘리잖아.
“이제 꺼낼까?”
상황이 정리되자 나는 블러드 스콜피온이 묻힌 자리를 툭툭 발로 치며 물었다. 딘은 난색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기다리죠. 질식사를 하려면 얼마나 걸릴지 잘 모르잖습니까.”
“그래? 하긴, 괜히 꺼냈다가 성난 독 꼬리에 스치기라도 하면 한 방에 골로 가니까.”
“그보다는 이 근처에 블러드 스콜피온의 알이 묻혀 있을 겁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놈들은 알을 낳고 알을 묻어놓은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찾아서 부숴야겠군. 노움, 근처에 알이 묻힌 곳이 있니?”
-잠깐만.
노움은 눈을 감고 땅에 귀를 기울였다. 이내 서쪽 근방을 가리켰다.
-저기 있어.
“땡큐.”
우리는 함께 노움이 가리킨 곳으로 가서 땅을 팠다. 정말로 사람 머리통만 한 알들이 무려 열한 개나 묻혀 있었다.
“이, 이놈들이 모두 부화하면…….”
렉스가 질린 얼굴이 되었다.
딘은 대꾸대신 군화로 알을 짓밟아 터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뜬금없이 먹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탈이 날 것 같아서 관뒀다.
다시 돌아와 트랩으로 생매장시킨 블러드 스콜피온을 끄집어냈다.
질식사한 블러드 스콜피온은 거대한 시뻘건 몸뚱이를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딘과 렉스는 준비해온 망치와 모루 같은 연장으로 놈의 딱딱한 껍질을 해체해 짐마차에 싣고, 독주머니도 조심스럽게 두꺼운 천에 싸서 보관했다. 독주머니는 전쟁 시 독화살을 만들어 쏠 수 있는 훌륭한 전략적인 무기여서 비싸게 팔린다.
“짐마차가 벌써 꽉 찼군요. 오늘은 이쯤 하죠.”
딘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사냥을 마치고 근거지로 돌아왔다.
내가 만들어둔 둥그런 모양의 흙집 옆에는 어스 스웜은 잔해들과 블러드 스콜피온의 껍질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짐마차로 다섯 번을 옮겨야 할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일주일 내내 사냥한 성과였다.
“이거 다 팔면 얼마일까요?”
렉스가 무척 기대 어린 얼굴로 물었다.
“어스 스웜의 잔해는 내가 다 구입할게. 한 사람당 20레디나씩 주면 되겠지? 노움이 먹어치운 것까지 계산해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딘이 동의하자 렉스와 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노움이 내 어깨 위로 폴짝 올라와 물었다.
-주인님. 나 저거 먹어도 돼?
“물론이지. 하지만 조금만 먹어야 한다?”
-응!
노움은 짐마차로 뛰어들어 어스 스웜의 잔해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노움이 먹고 나서 뱉은 잔해는 황토색의 평범한 흙으로 돌아갔다. 저렇게 먹어치운 것만 짐마차 두 대 분량은 족히 되겠군. 어스 스웜 50여 마리를 먹어치운 꼴이니 참으로 무서운 식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노움이 상당히 커졌다. 얼마나 먹어댔으면 손바닥만 하던 애가 머리통만 해졌을까! 정령이 밥 잘 먹고 쑥쑥 큰다는 말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듣는다.
물론 노움이 검은 흙을 얼마나 먹든 하나도 아깝지 않다. 노움은 몸집이 커질수록 더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정령친화력을 써도 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이거 겨울이 되기 전까지 계속 어스 스웜만 사냥해도 좋겠어. 노움이 이대로 실제 열 살 남짓한 어린아이와 똑같은 크기로 자란다면…… 으흐흐, 상상만 해도 너무 귀여워! 진짜 내 딸로 삼을 테다!
노움이 먹는 걸 보고 덩달아 배가 고팠는지, 시스가 식사준비를 했다. ‘마법을 응용한 야영요리 50선’을 구입한 이후로 식사준비는 시스 몫이 되었다.
딘과 렉스는 몬스터의 부산물 수거 등 전투의 뒷수습을 담당하니 다들 역할분담이 확실한 셈이었다.
나? 돈을 주지. 고용주니까.
“카록 공자님.”
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이 일대에서는 몬스터의 출현이 뜸해졌습니다. 몬스터 토벌은 이걸로 끝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사흘만 더 하자. 추가금 줄게.”
“목적은 다 이루신 것 같은데 다른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우리 노움이 좋아하잖아.”
나는 맛있게 어스 스웜의 잔해를 퍼먹는 노움을 가리켰다. 한동안 할 말이 없던 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추가금은 알아서 쳐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