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회: 1권 - 6장. 사냥 -->
“영지에 포고령을 내려라. 영지에 있는 짐마차란 짐마차는 전부 2주에서 3주간 징집한다.”
쿤트 남작가의 대공자 아서 쿤트는 영지의 관리들을 모두 모아놓고 지시했다.
아버지 바스크 쿤트 남작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아서는 사실상 영주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카스토 경.”
“예, 대공자님.”
40대 초반의 기사 딜런 카스토가 걸어 나와 부복했다. 18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와 우람한 어깨를 가진 딜런은 20년째 쿤트 남작가를 섬겨온 우직한 수석기사였다.
“병사 100명의 지휘권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짐마차를 전부 끌고 가 후디니 자작령으로부터 밀 4만 포대를 가져오시오.”
“예.”
지시사항이 끝나자 관리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후우.”
아서는 집무실에 홀로 앉아 한숨을 쉬었다. 카록 녀석 탓에 무슨 일거리가 이렇게 많아졌는지. 속 편하게 검술이나 수련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속이 울컥했다.
쿤트 남작가에는 아들이 셋 있다.
아서, 릭, 카록.
그중 맨 처음 두각을 드러낸 건 아서보다 세 살 어린 둘째 릭 쿤트였다.
릭은 불과 10세의 나이에 13세였던 아서가 채 다 익히지 못한 가문의 검술을 전부 소화해냈다. 그 어린 나이에 날렵하게 움직이며, 검술 동작을 모조리 펼쳐내는 릭을 보며 아버지와 가신들이 얼마나 감탄했던가.
어린 동생보다 뒤쳐진 아서는 크게 좌절했지만 곧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검술에 재능이 없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우리 쿤트 남작가는 정통 기사가문이니 아버지의 뒤를 잇는 후계자는 릭이 어울린다.’
그때부터 아서는 적성에 맞지도 않는 검술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지 않기로 했다.
대신 대공자의 신분에 걸맞게 가문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아버지를 도와 행정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전혀 의외의 분야에서 아서가 두각을 드러냈다.
행정 업무 능력은 물론 사람 마음을 잘 헤아리고 배려하는 용인술에 침착한 성격까지. 통치자의 재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가문의 검술은 둘째 릭, 통치력은 첫째 아서.
둘 다 차기 후계자로 걸맞은 재목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가신들은 곤혹스러워했다. 어서 한 명을 선택해 후계자로 확정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다툼이 벌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고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바스크 쿤트 남작에게.
레던의 남쪽 지방에 용기와 강한 검술을 겸비한 영주가 있다는 명성은 익히 들었네. 또한 그 차남이 그대를 닮아 재능이 탁월하다는 이야기 또한 들어 무척 흥미로운 바일세.
내 비록 부족하나 레던 왕국의 미래를 위하여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데, 허락한다면 그대의 차남도 제자로 삼고 싶네.
―크라일 뮤트 공작.」
크라일 뮤트 공작!
레던 왕국 유일의 오러 마스터. 빼어난 검술 실력도 널리 알려졌지만, 검소하고 명예를 중시 여기는 인품 또한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기사라고 존경 받을 만했다.
그는 레던 왕국의 변경백으로서 서쪽의 혼트 제국과 인접한 국경지역을 통치했다. 휘하에 둔 제자만 무려 백여 명. 검술에 뜻을 둔 자라면 누구나 뮤트 공작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그래서 뮤트 공작가를 달리 ‘템플 오브 나이트(Temple of knight)’라 부를 정도였다.
막강한 군사강국인 혼트 제국이 약소국인 레던 왕국을 아직까지 가만 내버려두는 것도 뮤트 공작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뮤트 공작은 그 정도로 훌륭한 기사였다.
돈과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서 한 수만 가르쳐달라고 애걸해도 모자랄 판에, 뮤트 공작이 친히 제자로 삼고 싶다고 서신을 보내왔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당연히 당장 짐 싸서 달려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뮤트 공작의 제자가 되러 떠나면 가문의 계승권과는 멀어진다는 단점이 있었다. 때문에 바스크 쿤트 남작과 가신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등했다.
그런데 그 갈등은 허무하게 끝났다. 릭이 찾아와 뜻을 밝힌 것이다.
“위대한 기사이신 뮤트 공작 전하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찾아가 가르침을 받아야지요. 가문은 대공자인 아서 형님께서 이어 받아야 마땅한데 대체 뭘 고민들 하시는 겁니까?”
쿤트 남작도 가신들도 멍해졌다.
그랬다.
릭은 아버지 쿤트 남작과 쏙 빼닮았다. 검술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어 하지 않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애당초 본인은 차기 가주 자린 신경도 안 썼는데, 다른 사람들만 괜한 고민을 했던 것이다.
이에 아서가 오히려 반대를 했다.
“우리는 정통 기사 가문으로, 가문의 검술을 보전하고 발전시켜 후대에 이어줄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역량이 부족하여 가문의 검술을 이어받아 제 아들에게 물려줄 능력이 못 됩니다.”
“에이, 아서 형님도. 그럼 아들 팍팍 낳으셔서 몇 놈은 제게 보내세요. 제가 잘 가르쳐서 돌려보내게. 그럼 됐지요?”
“……어, 그래. 그럼 되긴 하다만…….”
“그럼 저 갑니다? 뮤트 공작 전하의 제자라니, 나이스! 만세! 이게 꿈이야 생시야!”
희희낙락하며 짐 싸들고 떠나는 릭을 다들 얼빠진 얼굴로 쳐다봐야 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아서는 차기 쿤트 남작가의 가주로 입지를 확립했다.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아서는 셋째 카록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재능 없는 아서조차도 오러를 익힐 수 있는 체질이라 오러 유저 상급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카록은 아예 오러 자체를 느낄 수 없는 둔재.
거기다 마법에 대한 재능도 없고, 신분은 계승권이 없는 서자이니 얼마나 자괴감을 느끼겠는가?
가문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할 막내 카록의 괴로움을 아서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도 카록을 잘 대해주고, 돌봐준 것도 그 탓이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나?’
최근 들어 카록에 대한 자신의 관대함에 회의가 드는 아서였다.
어쩌다 보니 밀 4만 포대의 운반은 물론 보관까지 떠맡아 버리다니? 홀로 서기 하는 동생 뒷바라지치곤 일이 너무 크다.
아서는 영지의 지도를 살펴보며, 밀 4만 포대를 대체 어디다 보관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3만 포대까지는 성내의 군량고에 수용할 수 있다. 나머지 1만 포대가 문제인데…… 꼼짝없이 새로운 군량고를 만들어야겠군.’
결국 그는 적당한 위치에 군량고를 신설하는 방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서류에 가문의 인장(아버지가 갖고 있어야 할)을 찍고, 관리들에게 추진하도록 시켰다.
일은 끝나질 않았다. 몬스터 토벌에 대비하여 부대 편성도 해야 했고, 얼마 전에 징수한 세금이 정확히 걷혔는지도 확인해서 비리를 저지른 징수관을 처형해야 했다.
그렇듯 아서가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가문의 기사 딜런 카스토 경이 들어왔다.
“병력 100명과 짐마차 63대가 준비됐습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수고해주시오, 카스토 경.”
“예. 아, 그리고…….”
“또 뭐요?”
“짐마차 한 대를 카록 공자께서 좀 쓰겠다면서 빌려가셨습니다.”
카록 덕에 일에 치이고 있던 아서는 그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징집한 것이니 잘 쓰고 반납하라고 하시오.”
“예.”
카스토 경이 떠나고 아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결심했다.
‘카록, 이 녀석! 어디 사업에 실패 했담 봐라. 평~생 내 밑에서 죽어라 일하게 해주마!’
* * *
덜그럭 덜그럭.
늙은 말 한 필이 끄는 낡은 짐마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아간다.
짐마차 위에 나를 포함하여 네 사람이 탔지만, 늙은 말은 힘겨워하지 않고 그저 꾸준히 걸음을 옮긴다.
근데 쟤들은 저게 뭔 짓이래?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호흡하는 딘과 렉스.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호흡을 반복할수록 폐가 있는 가슴이 아닌 배가 움직이는 게 특이했다.
저건 흡사 오러 브레싱(Aura breathing)을 하는 듯한 모습이잖아?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이나 하는 짓을 왜 저 두 사람이…… 잉? 설마?
잠시 후, 딘과 렉스는 눈을 떴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나에게 딘이 웃으며 설명했다.
“오러 브레싱이 맞습니다.”
“오러 유저였던 거야?”
놀란 내 물음에 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얼마 전에 배웠습니다. 오러 유저 용병에게서 일주일간 오러 브레싱과 오러 컨트롤을 교습 받았습니다. 겨우 일주일 배우는데 교습비가 1인당 50레디나나 하더군요.”
“지금껏 용병생활을 잘 해왔는데 왜 거금을 들여서까지 오러를?”
“저와 렉스는 고민 끝에 평생 용병업계에 몸을 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왕 이 짓을 하는 거, 오러도 배워서 실력을 갈고 닦기로 했지요. 오러로 대성하기에는 이미 나이가 늦긴 했습니다만…….”
호오, 그렇구나.
다시 봤는데, 저 둘. 개인당 50레디나씩이나 주고 교습 받을 생각을 하다니, 보통 용병 같은 경우에는 오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과감히 돈을 투자하여 지속적인 발전을 택한 건 현명한 일이었다.
“늦기는! 열심히 하면 적어도 오러 유저 상급 이상은 될 수 있을 거야. 혹시 알아? 오러 수련은 이제 걸음마 단계지만, 창은 평생 잡았으니 순식간에 엑스퍼트까지 될지도 모르잖아?”
“감사합니다.”
딘과 렉스는 쑥스러워했지만 내 격려에 내심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군. 일주일간 딘과 렉스는 오러에도 입문하고 강철창도 구입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어.
나도 정령술을 수련하고, 트롤 레더 재킷으로 방어력도 좀 높였지.
그렇다면 우리 시스는?
“시스는 일주일간 무슨 준비를 했니?”
시스가 귀여워서 그런지 자꾸만 나도 모르게 노움에게 말할 때와 똑같은 말투를 쓰게 된다.
시스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가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