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회: 1권 - 5장. 재미있는 정령술 -->
쿤트 남작령에 돌아온 나는 빌린 쌍두마차를 반납하기 위해 가문의 저택에 갔다.
마차를 돌려주고 아버지와 아서 형님을 만나 밀을 거래한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내가 밀 4만 포대를 샀으며, 내년 겨울이 끝나기 전에 5천 레디나를 더 지불해야 한다는 말에 아서 형님이 화를 냈다.
“이놈아! 4만 포대? 끽해야 1만 포대 정도겠지 생각했는데 네 녀석의 배포는 대체……!”
“물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5천 레디나를 더 지불해야 한다니? 내년에 밀 값이 안 떨어지면 넌 완전히 파산이다!”
“헤헤헤, 그때는 가문의 충성스러운 정령사가 되어서 여생을…….”
“에라 이 녀석아!”
기어코 아서 형님의 돌려차기가 내 뒤통수에 작렬했다. 꾸엑!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보다 4만 포대나 되는 밀을 운반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일단 운송도 ‘공짜로’ 해주기로 했으니 해줘야지요.”
아서 형님을 공짜를 강조하며 날 보며 이를 으드득 간다. 에구, 무서워,
“우리 가문에 짐마차가 15대밖에 없을 텐데?”
“영지의 모든 짐마차를 임시 징수해서 운반하면 됩니다. 기사 한 명과 병사 백 명만 동원할 수 있게 허락해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건 네게 맡기마.”
아버지는 이 문제를 아서 형님께 맡겼다.
아서 형님은 아버지나 둘째 릭 형님과 달리 검술에 대한 재능은 없었다.
하지만 맏아들이기 때문에 일찌감치 후계자로서 영지 업무를 담당해왔고, 통치자로서는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수완이 뛰어났다. 덕분에 아버지도 아예 아서 형님께 모든 일을 위임해버리고는 좋아하는 검술에만 전념하며 사신다.
나는 이번 밀 거래로 아서 형님께 부담을 많이 준 것 같아 살짝 미안해졌다.
“저, 형님.”
“뭐냐.”
아서 형님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에이, 삐치기는.
“그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이제 곧 겨울이잖습니까.”
“그렇지. 몬스터 토벌도 해야 하는 바쁜 시기에 밀 4만 포대를 운반해야 하지.”
“하, 하하. 그래서 말인데, 남쪽의 황야지대에 서식하는 몬스터는 제가 사냥을 하겠습니다.”
“그럼 나야 고맙다만, 너 혼자서 되겠느냐?”
“황야지대에는 서식하는 몬스터가 그리 많지 않고, 일행이 있으니 문제없죠.”
“그럼 좋다. 그쪽은 너에게 맡기고 우리는 동쪽 숲과 북쪽의 초원지대만 토벌하면 되겠군.”
그제야 아서 형님의 기분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아서 형님과 이야기를 마친 뒤 저택에서 나와 ‘맥스의 쉬어가는 집’으로 돌아왔다.
딘 용병단과 시스도 이 여관에서 숙박 중이었다. 내가 권한 덕분이었기 때문에 주인인 맥스가 무척 고마워했다.
커다란 테이블에서 그들은 한창 식사 중이었다.
딘 용병단은 은퇴한 전직 용병 출신은 맥스와 죽이 잘 맞았는지 맥주를 퍼마시며 시끄럽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시스는…… 술 대신 거대한 칠면조 통구이를 묵묵히 뜯어먹고 있었다. 혼자서 거의 절반은 먹어치운 모양이었다.
아아, 어떻게 입가에 기름을 덕지덕지 뭍인 채 며칠 굶은 아이처럼 먹어대는 모습조차도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더 먹고 싶은 거 있니?”
나는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에게 물었다.
“……주스.”
오랜만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역시 먹는 게 약점이었어!
“어이, 맥스. 오렌지 주스 한 잔.”
“예입! 여편네야, 오렌지 주스 하나!”
맥스가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소리쳤다.
“오셨습니까?”
딘 일행이 인사했다.
“아아. 잘들 마시고 있네?”
“실컷 퍼마셔야죠. 내일이면 작별이니까요.”
“그렇군. 그럼 오늘은 나도 정신줄 놓고 마셔야겠는데? 맥스! 나도 흑맥주 하나. 아니, 오크통 하나 통째로 가져와!”
내 말에 딘 일행이 환호했다.
“예입! 어이, 여편네!”
“네가 가져가서 처먹어!”
화난 맥스 아내의 고함이 울려 퍼지자 우리는 푸하하 웃어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부터 마시기 시작해서 날이 저물어도 술판은 끝날 줄을 몰랐다. 술기운이 올라 나는 그들과 함께 신나게 떠들고 놀랐다.
“아이고, 전 이만 일어나야겠네.”
맥스가 벌겋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허어, 이러기요?”
“그렇게 안 봤는데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남자였군!”
“도중에 술잔을 놔버리는 사람이 아직도 있었다니!”
“실망이요!”
딘 용병단이 한마디씩 하며 비난하자 맥스는 당황했다.
“그, 그러지 말고 좀 봐주게. 자네들도 결혼해봐! 마누라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낄낄대는 우리를 뒤로 한 채 맥스는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잇, 가라 그래! 빈자리를 내가 메꾼다. 노움! 우리 귀여운 노움,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꾸나.”
바닥에서 쑤욱 하고 노움이 튀어나왔다. 오오! 하고 딘 일행의 감탄사가 울려 퍼졌다.
-술?
“그래그래, 여기 앉으렴.”
나는 맥스가 떠난 자리에 노움을 앉혀놓았다.
“오오오, 오우거를 무찌르는데 한 몫 한 우리 정령님께도 한 잔 바쳐야지!”
마크가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노움에게 내밀었다.
“위대한 정령님이시여, 한 잔 받으소서!”
마치 공물을 바치는 사이비 교도 같은 상황. 노움은 맥주잔을 보다가 날 빤히 쳐다봤다.
-저거 마셔?
“응응, 마셔마셔. 정령이면 어때! 한 잔 해!”
-알았어.
노움은 테이블로 폴짝 뛰어올라와 앙증맞은 두 손으로 맥주잔을 들었다. 단숨에 마셔버리자 우리는 갈채를 보냈다.
“오오, 주당 정령!”
“잘 마신다!”
“어때, 맛있니?”
-맛? 몰라.
“응?”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움은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턱을 손에 괴고 고민했다.
이윽고 적당한 표현이 떠올랐는지 말했다.
-땅에 물 붓는 느낌.
“아…….”
“그렇지. 대지의 정령이니까…….”
“하긴.”
우리는 곧바로 납득해버렸다. 대지의 정령에게 술을 주는 것과 땅에 술 붓는 것이 뭐가 다르겠나.
-맑고 깨끗한 물은 좋아해.
노움의 말에 우리는 뜨겁게 반응했다.
“맥스! 여기 물!”
“아주 깨끗한 물로 갖다 주쇼!”
“우물에서 막 푼 거!”
맥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우물물을 푸러 나갔다.
그렇게 술자리는 여관 문을 닫아야 할 자정까지 계속되었다. 귀염둥이 노움도 술자리를 흥겹게 했다.
나중에는 맥스가 와서 애걸했다.
“카록 공자님, 제발 오늘은 이만 끝내주십쇼. 저희 여관 문 닫아야 합니다. 객실의 손님들도 시끄러워할지도…….”
“잘 왔어, 맥스. 여기 앉아.”
난 맥스를 끌어다 앉혔다.
“아니, 전…….”
“자자, 맥스 형님 한 잔 받으시고!”
한스가 맥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당황한 맥스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딘과 내가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마시지 않으면 여기다 토할 거라고 렉스가 협박하자 마지못해 맥주잔을 입에 대는 맥스였다.
결국 “에구머니, 죄송해요!” 하며 맥스의 아내가 테이블을 ‘실수로’ 엎어버리고 나서야 술자리가 끝났다.
딘 일행은 아쉬워하며 하나둘 객실로 올라갔다. 그렇게 마시고도 아무도 곯아떨어지지 않은 걸 보니 상당한 술고래들이었다.
아참, 시스는?
내가 옆을 돌아보니 시스는 깨끗이 비워진 칠면조고기 접시 위해 엎어져서 쿨쿨 자고 있었다. 그만 피식 웃은 나는 시스를 들쳐 업고 객실로 올라갔다.
술기운 때문에 나도 비틀거렸지만 다행히 노움이 흙의 손을 만들어 받쳐주었다.
-괜찮아?
“응, 땡큐.”
노움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시스를 객실 침대에 눕혀주었다.
내 객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회중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새벽 2시였다. 맥스가 그만 술자리를 접어달라고 애걸한 것도 이해가 갔다.
-잘 거야?
“응.”
-그럼 난 돌아가야겠네?
무척 아쉬워하는 노움.
……어라? 지금 새벽 2시 아냐?
“노움. 내가 오늘 널 몇 시간이나 소환했지?”
-시간? 으음, 한참?
아차.
시간 단위를 잘 모르는구나.
나는 노움에게 회중시계를 보여주며 초, 분, 시의 개념을 가르쳐주었다.
노움이 대답했다.
-그걸로 6시간 32분 26초 지났어. 아니 27초, 28초, 29…….
“벌써 그렇게 됐다고?”
-응.
내가 처음 노움을 소환했을 때 소환할 수 있는 최대시간이 4시간가량. 그런데 오늘은 6시간 30분간 소환해놓고도 아직 정령친화력에 여유가 있었다.
-주인님의 힘이 늘어났어.
노움이 말하는 힘은 정령친화력을 뜻했다.
“어째서 내 정령친화력이 늘어난 걸까?”
-몰라. 하지만 주인님 힘 늘어나서 난 좋아.
“하하, 물론 나도 좋지. 우리 귀여운 노움을 더 오래 볼 수 있는걸?”
-헤헤.
나는 내일 또 불러주겠다고 약속하고 노움을 돌려보냈다.
정령친화력이 처음보다 약 1.5배가량 늘어났으니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이유였다. 그걸 알아야 정령친화력을 키우는 연습을 할 게 아닌가.
이리저리 고민을 해봤지만 술기운 탓에 머리만 아플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령친화력을 많이 소모한 탓인지도 몰랐다.
이거 안 되겠군.
오늘은 이만 푹 쉬고 내일부터 몬스터 사냥에 대비해 정령술을 한 번 제대로 파봐야겠어.
일어나서 회중시계를 확인하니 1시였다. 씻기 위해 밖으로 나왔는데 1층 식당에서 이미 딘 일행과 시스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
“벌써 일어났어? 시스는 그렇다 쳐도, 너희들은 다 나보다 많이 마셨을 텐데.”
렉스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군바리 출신들은 원래 세상이 무너져도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거참 부러운 습관이네.”
“군대에서 몇 년 굴러보시겠습니까?”
“미쳤냐?”
내 반응에 딘 일행이 낄낄거렸다. 그런데 어쩐지 그들의 분위기가 영 우중충했다. 억지로 밝게 웃고 있는 느낌이었다. 90년 살다 보니 내가 분위기 하나는 기막히게 파악한다.
아참, 용병을 은퇴한 마크와 한스가 오늘 떠난다고 했었지! 헤어지는 날이라서 그렇구나.
나는 우물가에서 씻고 와서 그들과 합석해 점심식사를 구운 밀 빵과 닭고기 수프로 가볍게 해결했다.
그리고 딘 용병단의 작별 시간이 찾아왔다.
마크와 한스는 우울한 얼굴로 짐을 싸들고 여관을 나섰다. 우리는 떠나는 두 사람을 마중 나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단장님.”
“그래. 고생 많았다. 마크.”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마찬가지다. 한스.”
딘은 두 사람을 하나씩 보듬어주었다. 렉스 역시 마찬가지로 두 사람과 작별을 나눴다.
그들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서로의 목숨을 지켜주던 사이였으니 당연했다.
마크와 한스는 나와 시스에게도 간단히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떠나야 하는데, 마크와 한스는 도무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떠나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단장님. 저희 그냥 이번 의뢰까지만 함께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황야지대에서 몬스터 토벌을 해야 하는데 저희 도움이 필요할…….”
“닥쳐!”
딘이 버럭 소리쳤다. 마크와 한스는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