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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9화 (9/529)

<-- 9 회: 1권 - 4장. 곡물 거래 -->

“히이이이익!”

마차 밖에서 울려 퍼지는 한센의 비명 때문에 달콤한 잠에서 깨어버렸다.

아 시끄러운 놈. 보나마나 오우거의 시체라도 본 거겠지.

“오, 오우, 오우우…… 오우우……!”

“노움. 저 바보 한 대 쥐어박아서 입 좀 다물게 하렴.”

-응.

잠시 후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보야 입 다물래’ 라는 노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하지만 잠은 이미 다 달아난 뒤였다. 

에이 씨. 

나는 뒤척이며 일어나 마차에서 나왔다.

머리에 혹이 난 한센은 훌쩍거리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딘 일행은 무기를 손질 중이었다. 마법사 소녀 시스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아침인 줄 알았는데 벌써 점심이 다 됐네.”

“일어나셨군요.”

딘과 용병들이 인사했다.

“시스는 어디에 있지?”

“마법사는 씻으러 갔습니다.”

“나도 가서 씻어야겠군. 어제는 씻지도 못하고 골아 떨어졌으니까.”

“그러십시오. 개울가는 동쪽으로 3백 미터쯤 가면 있습니다.”

“오케이.”

딘이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가 보니 정말로 졸졸 흐르는 개울가가 보였다. 

푸른 숲이 얼비치는 투명한 물이 흐르는 풍경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깊이는 척 봐도 수면이 한 허리까지 올라올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야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나신으로 개울에 몸을 담그고 있는 시스가 날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녀의 가슴 언저리까지의 높이니 나한테는 허리쯤 아니겠어?

“…….”

어색한 침묵이 드리웠다. 

자, 진정해라 나. 네 정신연령은 90살이야. 능숙하고 노련하게 대처하는 거야. 중요한 건 타이밍이야. ‘꺅!’ 하고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 그때 나도 얼굴을 붉히며 ‘미, 미안’ 하고 고개를 돌려주는 것이지.

그런데 얘야, 왜 아무 반응이 없니? 그런 무심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지 말아줄래? 얼굴에 부끄러움이나 충격, 당황 뭐 그런 게 있어야 하지 않니? 아무 감정 없는 그런 표정, 상당히 안 좋아요.

시스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지나가던 토끼를 바라보는 듯한 눈이랄까. 그 바람에 나도 대응할 타이밍을 놓치고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제 오우거와 사투를 벌일 때는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녀는 참 아름다웠다.

푸른빛의 머리칼은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그보다 더 짙은 푸른 눈동자는 맑고 깊고 차가웠다. 햇볕을 전혀 쬐지 않은 듯한 새하얀 피부와 가냘프지만 적당한 굴곡이 있는 몸이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맙소사.

전설의 엘프가 저러할까!

회귀 전의 내 마누라의 한창 때보다도 수천 배는 더 예뻤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데 내가 왜 그딴 마누라에게 홀려 결혼을 했을까? 이것 참 역시 젊을 땐 많은 여자를 만나봐야…… 이게 아니지!

망상에서 벗어난 나는 급히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미, 미안해.”

“…….”

시스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대신 개울가에서 걸어 나왔다.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발치에 떨어져 있는 천으로 물기를 닦고 옷을 입는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야생동물 같았다. 

“휴우…….”

옷을 다 입은 시스가 떠난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숲을 헤집고 다녔고 사투까지 벌인 탓에 몸이 상당히 더러워져 있었다. 나도 옷을 벗어 던지고 개울에 몸을 담갔다.

시리도록 차가운 개울물의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씻는 도중에도 시스의 벗는 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하하. 이런 두근거림이라니.

내 몸이 정말 열여덟 살이 맞긴 하구나.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90년 평생 저토록 아름다운 여자는 난생 처음이었다. 천하의 내가 넋을 놓고 있던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오우거의 사체는 마차 위에 얹어놓고 떨어지지 않게 꽁꽁 묶었다. 쌍두마차는 시스라는 새로운 일행을 추가로 태운 채 출발했다.

이틀, 사흘, 나흘…….

낮에는 움직이고 밤에는 적당한 장소에서 야영하는 일과가 반복되었다. 

이상하게도 몬스터의 습격은 더 이상 없었다. 

딘의 설명에 따르면, 오우거의 피는 그 냄새만으로도 웬만한 몬스터를 내쫓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우거의 피도 좋은 가격에 팔린다고 한다. 성벽이나 성문에 발라두면 몬스터가 접근을 못 한다나 어쨌다나.

시스는 우리 일행에게 잘 적응했다. 일행이 야영 준비를 할 때 마법으로 불을 피워주곤 했다. 말수가 적고 태도가 냉담하여 잘 어울리진 못했지만, 마법사가 그럴 수도 있지 싶어서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우리는 순탄하게 후디니 자작가의 성체가 보이는 큰 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에 들어서기 전에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검문을 받았다. 병사들은 마차에 얹어진 거대한 오우거의 시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오, 오우거를 잡으셨습니까?”

“그렇다.”

“대단하시군요.”

주변의 사람들이 경외와 부러움이 가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오우거가 얼마나 강한 몬스터인지, 그리고 얼마나 비싸게 팔리는 몬스터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구경꾼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우리는 단숨에 개선한 영웅이 되었다. 

딘 일행의 어깨도 으쓱해졌다. 그래, 마음껏 자랑스러워하라고. 오우거 슬레이어 용병단이라고 하면 몸값이 몇 배로 치솟을 테니까.

쌍두마차를 몰고 후디니 자작가의 저택으로 향했다. 도시 정중앙에 보이는 가장 큰 저택이었기 때문에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택 앞에서 다시 병사들의 검문을 받았다.

“나는 쿤트 남작가의 삼남이자, 카록 곡물 상회의 단주인 카록 쿤트다. 자작님을 뵈러 왔다.”

오우거의 사체에 정신 줄을 놓던 병사들이 내 말에 흠칫 제정신을 되찾았다. 

“지금 즉시 영주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병사는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닫힌 정문이 열리고 우리의 쌍두마차가 안으로 진입했다. 

잠시 후 돌아온 병사가 내게 말했다.

“카록 공자님께서는 저를 따라오십시오.”

“내 일행에게도 적당히 쉴 곳으로 안내해다오.”

“알겠습니다.”

다른 병사가 딘 용병단과 한센, 시스를 안내해주었다. 나는 병사의 안내에 따라 저택 본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후디니 자작가는 본래 평민 출신의 상인 집안이었다. 

손꼽히는 거상이었던 그들은 적자에 허덕이던 레던 왕실에 큰돈을 상납하고 대신 작위와 영지를 하사받았다. 

한마디로 돈으로 신분을 산 셈이었다.

그 뒤에 영지를 레던 왕국 최대의 곡물 생산지로 키운 걸 보면, 확실히 거상 집안답게 후디니 자작가의 수완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돈으로 신분을 산 가짜 귀족이라는 과거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그게 콤플렉스가 된 탓인지 역대 후디니 자작가의 가주들은 하나같이 과시욕과 허영심이 많기로 유명했다.

현 가주 브람 후디니 자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브람 후디니 자작이 가장 즐기는 취미는 몬스터 박제 수집이었다. 

저택의 홀에 대형 몬스터의 박제를 전시해두어서 가문의 힘을 과시하기를 즐겼다. 

방문한 손님들이 그것을 보고 놀랄수록 가문의 명예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양반이었다.

뭐, 그런 허영심만 빼면 그리 성격이 나쁜 위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름대로 수완도 있고, 영지 경영도 잘해서 가신들과 영지민의 지지도 받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장담하는데 아마 나보다 브람 후디니 자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다.

에잇! 뭘 더 숨기랴?

회귀 전, 나는 그의 사위였다.

나는 박제된 몬스터들에게 포위된 채 1층 홀에서 후디니 자작을 기다렸다.

이보쇼, 이 양반아. 댁의 패턴은 뻔히 다 아니까 그냥 빨리 나타나지 그래요?

후디니 자작은 손님이 오면 몬스터 박제가 전시된 홀에서 맞는다. 그리고 10분에서 15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몬스터 박제들을 감상하게 한다. 그 뒤에 (제 딴에는)드라마틱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15분쯤 지나자 후디니 자작이 나타났다.

“허허, 미안하네. 업무가 너무 많아서 짬을 내기 힘들었네.”

허이고, 그러세요?

“공사다망하신 자작님의 시간을 빼앗은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군요.”

“쿤트 남작은 건강한가?”

“물론입니다. 아버님께서도 자작님께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후디니 자작은 날 훑어보고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아들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헌앙하니 쿤트 남작이 부럽군. 나는 아들 하나에 딸만 다섯일세. 그렇지 않아도 열일곱 살 된 막내딸의 혼처를 아직 찾지 못해 골치라네. 허허허!”

허허허, 그러시겠죠.

그렇다고 사치스럽고 성격도 삐뚤어져 아무도 안 데려가는 골칫덩이 막내딸을 제게 떠넘기려 하진 마십쇼. 

이미 한 번 당해봤거든요?!

그것도 댁의 따님과 따님이 가정교육 시킨 망나니 아들까지 더블 크리티컬로요!

“후디니 자작가의 다섯 딸이 모두 미녀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가 따로 마음에 둔 정인만 없었더라면 감히 청혼이라도 해봤을 텐데 몹시 아쉽습니다.”

“아니, 정인이 따로 있던가?”

“예. 아직 아버님께도 밝히지 않았지만요.”

그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랬구먼. 내 딸과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소개시켜줄까 했는데 거참 아쉽구먼.”

장인…… 아니, 후디니 자작은 막내딸을 내게 떠넘기는 걸 포기했는지 금방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듣자하니 자네 아주 흥미로운 물건을 가져왔더군.”

“흥미로운 물건이요?”

“자, 보게.”

후디니 자작이 두 손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저택 1층 홀.

사방에 박제된 몬스터가 전시되어 있었다. 

블러드 스콜피온, 자이언트 엔트, 트롤, 미노타우로스까지 하나같이 중대형의 무서운 몬스터였다. 심약한 사람이 여기 오면 불알이 쪼그라들겠지.

“딱 하나가 없지 않나?”

나는 씨익 웃었다.

“오우거 말씀이군요.”

“맞네. 오우거만큼은 구하기가 힘들더군.”

당연하지. 

오우거가 보기 쉬운 몬스터였다면 아마 대륙 인구가 지금의 절반정도밖에 안 됐을 것이다. 영지에 오우거가 한 마리만 서식해도 끔찍한 재앙인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그걸 1천 레디나에 팔게.”

“이런, 죄송해서 이를 어쩌죠? 저 오우거의 가죽으로 아버님과 형님들께 갑옷을 한 벌씩 맞춰드릴 예정이라…….”

나는 몹시, 매우! 아주! 너무! 죄송한 표정을 지었다.

“3천 레디나. 이 돈으로 다른 선물을 할 수도 있겠군,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후디니 자작의 얼굴 표정은 단호했다. 

더는 못 주니 흥정은 그만둬라, 이 뜻이렷다? 나도 여기서 타협을 봐야겠군.

“그렇군요. 자작님께서 이토록 바라시는데 팔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싶습니다.”

3천 레디나라. 3대 3대 4로 나누기로 했으니 내 몫은 900레디나로군.

돈 계산 좀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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